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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은 오랜 세월에 걸쳐 형성된 한 문화의 핵심 談笑 三

선생님께서 쓰신 논문을 살펴보니 ‘한국인의 기질’이나 ‘미의식’에 대해 관심이 많으신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 전통문양 속에서 그런 요소들을 찾아본다면 어떤 특성들을 들 수 있겠습니까?
미의식에는 미적관조와 예술창작의 두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미적관조가 미적 대상을 수용하는 작용임에 대하여 예술창작은 작품을 생산하는 작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질문하신 내용은 생산적 측면, 즉 예술창작의 결과물로서 문양에서 감지할 수 있는 한국인의 기질과 미의식이 어떤 것인가에 대한 것으로 이해됩니다.

전통문양이 지닌 미적 형식의 특징을 한마디로 잘라 말할 수는 없겠으나, 전통문양은 조형효과가 없는 세기(細技)를 배척함으로써 무기교의 소박함을 드러내고 있고, 그 소박함 속에 인간의 따스한 정감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고 있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우리와 같은 한자문화권에 속해 있는 중국이나 일본의 경우와 확실히 다른 면모라 할 것입니다.
중국의 경우를 보면, 어떤 조형 원리나 형식에 입각하여 의도적으로 베풀어진 느낌이 강하고, 일본의 경우는 지나치게 장식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와는 달리 우리의 전통문양은 형식에 얽매이지도 않고, 지나친 작위성도 장식성도 없습니다.
문양이 지니는 뜻을 중요시 여기면서 그저 마음가는 대로 손을 놀려 문양을 베풀었습니다. 그것은 정해진 틀에 얽매이기 싫어하고 세부에 집착하지 않는 한국인의 자연주의적 심성과 미의식이 발로된 것이라 할 것입니다.

전통문양에 깃든 특성들이 한국의 미의식을 어느 정도 대표하신다고 보십니까?
일반적으로 문양은 대개 권력이나 부, 혹은 종교적으로 힘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소비되어 왔습니다.
물론 그런 문양들이 서민들과 상호작용하면서 영향을 주고받았겠지만 대중성이란 맥락에서 볼 때 서민들의 일반적인 정서를 나타내주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요?
물론 전통시대에 있어서는 그 내용에 따라서 특정한 계층의 사람만 사용할 수 있는 문양이 있었습니다.
예컨대 용이나 봉황문 같은 것들은 왕과 왕비만이 사용할 수 있었고, 특정한 내용을 담은 흉배 문양은 그 관직에 해당하는 사람만이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문양은 특정한 신분을 나타내는 징표의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신분에 해당하지 않는 사람들이 그 문양을 사용할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러나 그런 특정한 문양이라 해도 그것을 직접 제작한 사람은 왕이나 귀족이 아닌 장인들이었습니다. 따라서 왕공 귀족이 독점적으로 사용한 문양이라 해도 당연히 서민의 보편적 정서와 미의식이 스며들어 있기 마련인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어떤 계층의 사람들이 독점, 또는 애호했던 것이건 간에 그 문양의 미적 형식은 한국인의 보편적 정서와 미의식으로부터 벗어나지 않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신분이 높은 사람들이 장인이 만든 작품을 거부감 없이 수용했다는 자체가 그들도 한국인의 보편적 정서와 미의식을 공유하고 있었다는 것을 반증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한 시대의 문화는 영구불변하는 것이 아니라 외래적인 요인이나 자생적 요인 등에 의해서 끊임없이 변화해 가는 것이니 만큼, 전통문화 또한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은 옳은 말입니다.
그러나 전통이라는 것은 오랜 세월에 걸쳐 형성된 한 민족 문화의 핵심(Cultural Core)으로서 변화하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도 크게 흔들리지 않는 부분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나무에 비유한다면 뿌리이며, 과일로 따지면 속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외래의 것이라는 점에서 보면 용문(龍紋)과 버버리 체크 문양은 서로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문화적 성격으로 보면 용문은 버버리 체크 문양과 엄연히 구별됩니다.
용문이 한국적 집단 정서에 의해서 수용되고 한국의 전통 생활문화라는 나무에 접붙여진 것이라 한다면, 버버리 체크 문양은 보이지 않는 타의 힘에 의해서 한국 땅에 옮겨 심어진 색다른 품종의 나무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언젠가 유행이 변하면 스스로 말라죽거나 뽑혀 나갈 수도 있는 것입니다.

현대에 있어 문양의 의미나 상징성이 많이 희석, 변질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닭 그림을 보며 용맹이란 의미를 떠올린다던지 박쥐 그림을 보고 행복을 기원하는 아이는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치킨런’이나 ‘배트맨’을 떠올리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입니다.
문화의 보존에 있어 물론 개개인의 노력도 필요하지만, 현대 사회에서는 이를 뒷받침해 줄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문화재나 전통문화의 발굴 및 보존, 개발 등에 대한 우리나라의 문화 시스템 정책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문양은 그것을 향유하는 집단 사이에서는 그것이 이미 무엇을 대신하는 것인지 알 수 있는 약속된 부호와 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문양이 묘사하고 있는 사물이 눈앞에 존재하지 않는 경우에도 어떤 적절한 반응을 지향하게 됩니다.
예컨대 박쥐를 보게되면 행복이 눈앞에 있다고 믿으며, 까치 문양을 보면 즐거움과 희소식의 전령으로 인식하며, 복숭아 문양을 보면 곧 서왕모의 천도와 관련된 이야기를 상기하고 장수의 염원을 되새기게 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반응은 그런 문양을 그린 사람이나 그것을 보는 사람들이 서로 인식을 공유하고 있을 때 가능한 일입니다.

현대인들이 전통문양에 대해 적절한 반응을 보이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런 문양을 생활 속에 향유했던 옛 사람들과 인식을 같이하고 있지 못한 때문입니다.
전통문양이나 선조들의 생활문화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도모하고 그 맥을 잇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옛 사람들과 인식을 공유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전통의 맥이 자연스럽게 이어지지 못한 오늘날에 있어서 이 문제는 교육의 힘을 빌어 풀어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상적으로는 초등학교 때부터 전통문양 교육에 관심을 기우려야 하고, 현실적으로는 평생교육의 장에서 일반인들로 하여금 전통문양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도록 힘써야 합니다.
또 한편으로는 전통문양을 현대 그래픽 디자인의 소재로 폭넓게 활용하여 일반화시키는 것과 함께 문양의 소재가 갖는 의미와 상징성에 대한 연구도 병행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가장 애착을 갖고 계신 문양이나 소재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세 마리의 물고기를 도상화한 문양에 특별한 애호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조형적으로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내포하고 있는 뜻이 매우 깊고 교훈적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문양을 보통 ‘삼여도(三餘圖)’라 부르는데, 그 내용은 ‘남을 여(餘)자’와 ‘물고기 어(魚)자’의 중국식 발음이 서로 같음을 이용하여 물고기 세 마리를 ‘삼여(三餘)’의 의미로 표현해 놓은 것입니다.
‘삼여(三餘)’는 ‘세 가지 여유 시간’이라는 뜻으로,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 왕숙전(王肅傳)의 동우(董遇)에 얽힌 고사(故事)에 그 연원을 두고 있습니다.
옛날 한 농부가 학문 높은 선비인 동우를 찾아와서 공부 배우기를 청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백 권의 책을 읽으면 뜻을 스스로 터득할 터이니 먼저 책을 읽고 오라.”고 말했습니다. 농부가 말하기를, “저는 농사일이 바빠서 그 많은 책을 도저히 읽을 수 없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이에 동우는, “농사일이 아무리 바쁘다지만, 겨울은 1년의 여분(餘分)이고, 비 오는 날은 맑은 날의 여분이고, 밤은 낮의 여분이니 어찌 시간이 없다고 하느냐?”고 나무랐습니다.
이 이야기에 연유하여 ‘삼여(三餘)’라는 말이 생겨났고, 그것이 학문하는 자세를 상징하게 되었으며, 이것이 세 마리의 물고기 문양으로 그려져서 선비들 간에 사랑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 뜻을 새겨 볼 때 오늘날에 있어서도 공부방 장식 문양으로 ‘삼여도’가 제격이 아니겠습니까?

허균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미술사 책임연구원
글_박활성 기자
 

[어해도십첩병풍]
중.조정규
조선시대.
서울대박물관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