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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닷없이, 한글의 안부를 묻다.

“알파벳의 역사에서 아마 가장 주목해야 할 유례없는 성과는, 한국에서 1443년 조선의 왕 세종이 한국인을 위해서 알파벳을 고안하라는 칙령을 내렸을 때 이룩되었다.(???)
세종이 불러모은 학자들은 앞서 준비기간을 거치기는 했지만 한국식 알파벳을 3년만에 완성했다.
그 성과는 매우 훌륭한 것이어서 조선어의 음운 체계에 거의 완전하게 적합하였고, 한자로 쓰여진 텍스트의 외양과 유사하게 알파벳의 스크립트를 쓸 수 있도록 아름답게 도안되었다.”

위의 인용은 한글에 대한 수없이 많은 찬사의 하나일 따름이다.
하지만 이러저러한 여러 감탄사들은 이제 우리에게 그다지 감흥을 주지 못한다. 오히려 그것은 방해만 될 뿐이다. 그러한 찬사가 꼭 우리 자신을 향한 것인 양 착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정작 한글은 그에 걸맞는 대우도, 우리가 늘상 보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평온하지도 않다.
인쇄된 한글은 무리 지어, 아무 욕심없이 그저 뜻하는 바를 우리에게 일러줄 뿐이지만, 하나의 문자로서 한글은 그가 겪어온 모진 시련만큼이나 위태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 ‘국어의 순화’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태어날 당시 하나의 타이포로서 한글이 지니고 있던 시릴 정도의 명징함은 여전히 우리에게 열린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지만, 600여 년의 풍상은 그에게 많은 변화와 선택을 내리도록 하였고 한글은 지금 그 속에서 갈팡질팡 하고 있다.

먼 옛날의 일은 제쳐두고 최근에 그가 겪은 사건들 중 하나만 들어보자.
누구나 머리를 내젓는 ‘띄어쓰기’. 한글에 띄어쓰기가 처음 나타난 것은 일반적으로 <독립신문>(1896~1899)으로 알려져 있으니 어느덧 100여 년이 지난 셈이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띄어쓰기에 대해 명확한 지침을 가지고 있지 않다.
국어학자 이익섭 선생은 일찍이 이러한 띄어쓰기의 어려움을 지적하면서, 누구나 자신의 띄어쓰기에 대해 ‘자신 없어 한다’고 하면서 방금 쓴 ‘자신 없어 하다’조차 어떻게 띄거나 붙일지 기준이 없음을 한탄하였다. 국어학자가 이 정도니 일반인들의 혼란스러움이야 오죽할까.

‘띄어쓰기’가 다소 국어학의 영역으로 비춰진다면 ‘가로쓰기’는 어떨까? ‘가로쓰기’가 본격적으로 나타난지 반 백년, ‘세로쓰기’가 우리 눈에서 사라진지 10년이 채 안된 지금, 한글은 자신의 변화에 잘 적응하고 있는 걸까?
혹은 컴퓨터 속으로 들어간 한글의 상태를 살펴보는 것은 어떨까? 혹시 자리가 불편하지는 않은지 말이다.
굳이 컴퓨터 속까지 들어가지 않더라도 여기저기서 우리는 이러한 급작스런 변화에 아직 자신의 자리를 찾지 못하는 한글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번 디자인디비 특집 ‘한글 타이포그라피 사건사’는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 중 주로 근대 이후 한글 글꼴에 있어 중요한 전환점들을 하나의 사건으로 규정하고, 그 전후를 한쌍의 대구어로 묶어 그에 따른 한글 글꼴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물론 극히 단편적인 사건, 또 그 사건에 대해서도 단편적인 입장 밖에 언급하지 못하겠지만 적어도 이런저런 사건들을 겪으면서도 항상 우리 곁에 있어준 한글에게 묻는 최소한의 안부 정도는 되리라 생각한다.

얼마 전 문화관광부에서 글자체를 저작권법으로 보호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또한 이와 별도로 특허청에서도 글꼴에 대한 ‘의장권’을 인정하는 법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반대되는 입장을 보였던 곳에서 무슨 바람이 인 것인지는 모르나 반가운 소식임에는 틀림없다.
글꼴에 대한 기본적인 권리조차 보호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다양하고 아름다운 한글 글꼴이 나오기만을 바라는 것은 너무 염치없는 일이 아닌가.

한글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문화의 음각과 양각 모두를 아우른다.
마치 이 납으로 된 자모(字母)와 활자(活字)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