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형식과 내용이 달라지면 자연히 과거의 문화는 변화를 강요받게 된다.
한자 문화의 시대가 지나가고 시지각의 시대가 도래한 요즘, 자연히 붓과 먹을 이용한 서예는 옛날 선비들의 것으로만 치부되어가고 있다. 하지만 달라진 환경에 맞춰 서예를 현대적으로 표현하는 데 견인차 역할을 하는 회사가 있으니 그 이름이 바로 '필묵'이다.
필묵은 전문 캘리그라피스트(calligraphist) 3명과 2명의 디자이너 그리고 자문위원 4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 밖에 서예가 5명, 전각가 3명, 수묵화가 3명 등 타 분야의 예술가들이 따로 또 같이 작업을 하고 있다.
국내외 기업 및 디자인 회사의 다양한 디자인 프로젝트를 수행한 경험과 실적을 바탕으로 캘리그라피, 캘리일러스트레이션, 전각, 수묵화를 통한 독특하고 개성있는 캘리그라피 디자인 개발을 시도하고 있는데, 아직은 회사홍보 및 캘리그라피를 알리는 데 힘을 쏟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과연 캘리그라피가 무엇이며, 어디에 응용할 수 있고, 또한 새로운 어떤 시도들을 하고있는지 들어보도록 하자.
먼저 필묵을 설립하게 된 배경을 말씀해주십시오.
현대의 디자인 환경은 어떤 절대적 기준이 없는 다양성의 시대이며, 표현방식과 소재 등에 있어서도 이미 상상의 가능성을 넘어서고 있습니다.
또한 타이포그라피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캘리그라피에 관심을 가진 디자이너들이 늘어나는 추세입니다.
저희는 캘리그라피의 특성을 살려 디자인 표현의 한계를 극복하고, 한국적인 디자인을 표현해보려는 욕심에 '필묵'을 설립했습니다.
한마디로 '캘리그라피'란 무엇입니까?
보통 서예, 혹은 서법으로 번역되는 캘리그라피(Calligraphy)는 '아름답게 쓰다'란 말에서 나온 단어입니다. 즉, 캘리그라퍼(calligrapher)는 '글씨를 아름답게 쓰는 것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이란 뜻이 되겠죠.
현대의 캘리그라피는 붓과 마우스라는 도구로 문자와 일러스트레이션을 통해 한국의 정서를 현대적인 감각으로 새롭게 디자인하고 시각화함으로써 대중들에게 우리 문화의 우수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정체된 서예계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이슈라고 생각합니다.
한마디로 타이포그라피와 일러스트레이션이라는 두 가지 요소가 접목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현재 중점을 두고 진행하는 일은 무엇입니까?
아무래도 시장진입 초반이기 때문에 일단 붓을 이용한 문자와 이미지의 다양함과 아름다움, 그리고 과학적인 미를 바탕으로 생활에서 흔히 접하는 디자인 제품에 접목시키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일단 예술작품이라고만 여겨온 서예를 대중들에게 친숙하여 느끼게 해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우리문화의 아름다움을 깨닫든 21세기 서예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는지 하는 일이 가능할 것입니다.
서예가 디자인 제품에 적용되는 일은 새로운 것이 아닌데요.
물론 서예가 디자인 제품에 사용된 것은 오래 전부터이지만 대부분 전문서예가의 작품이거나 충무로 대필소에서 나온 글씨, 혹은 디자이너가 붓을 잡고 캘리그라피 로고타입을 만든 것이라 진정한 의미의 캘리그라피라 하기엔 부족함이 많습니다.
문자에 대한 충분한 지식이 부족해 문자학적으로 틀린 글자를 쓴다던지, 디자인 컨셉에 로고 타입을 맞추기보다는 작가의 작품을 그대로 쓰고 있는 실정입니다.
오래 전부터 캘리그라피 전통을 쌓아온 일본의 경우와는 많이 다르지요.
일본의 경우 '캘리그라피' 작업이 구체적으로 어떤 식으로 진행되어 왔는지요?
일본은 80년대 이후 타이포그라피의 붐이 일어나면서 공식적으로 상업광고, 이니셜 등 모든 상품에 서예적 요소를 접목시켜왔습니다. 짧은 기간 내에 급속도로 형성된 유행이 아니지요.
그 이면에는 서예인들이 중심이 되어 가장 일본적인 특징을 살릴 수 있는 방안을 끊임없이 모색하고 연구해온 일련의 노력이 숨겨져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서예의 생동적인 요소가 상품에 고스란히 살아 숨쉬는 것은 그들이 실험과 실패를 거듭하면서 일구어 낸 결과입니다.
아직 우리나라는 그에 미치지 못합니다. 일본상품을 보면 일본어 글자체만으로 상품 패키지를 만드는 경우가 많고, 일본인조차 그리 이상하다고 느끼지 않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보통 한글만으로 패키지를 만든다거나 하면 촌스럽다고 느끼거나, '저게 끝이야?...' 하는 생각을 하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까?
캘리그라피의 응용분야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현재는 주로 제품이나 패키지, 영화포스터 등의 제작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필' 폰트도 빼놓을 수 없겠군요.
하지만 먹과 붓으로 글씨를 써서 만든 '필'폰트의 경우는 아무래도 서예의 느낌이나 감성을 그대로 전달하지는 못하는 것 같습니다.
서예의 경우 글씨를 쓸 때의 본인의 감성이나 태도, 느낌이 그대로 배어나는 것인데, 소프트웨어로 만들어 놓으니 그런 감성이 느껴지지 않는 것이죠.
이 외에도 타이포가 사용될 수 있는 곳이면 무엇이든 가능합니다. 상품의 제목을 글씨로 쓰는 정도에만 국한되었던 기존의 상업서예가 아니라 북디자인, 패션, 광고포스터 등 흔히 일상생활 속에서 문자, 부호로써 이루어진 모든 주변 사물에 적용할 수 있겠죠.
교통 표지판의 모든 선과 부호를 모필로 나타내어 한국인의 정감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겠고, 인테리어에 적용해 실내의 벽면을 모두 붓글씨로 채운다든지....
모든 가능성을 열고 캘리그라피의 영역 확대를 모색하고 있습니다.
설립하신지 3년이 지났는데 캘리그라피에 대한 일반인의 인식이 달라졌다고 느끼십니까?
무엇보다 디자인 분야에 있어서는 서체에 대한 관심이 계속 커지고 있습니다. 당연히 창업 초기인 3년 전과 비교하면 많이 발전했다고 생각합니다.
본격적으로 회사의 이름을 알리게 된 계기는 영화 포스터였죠.
독립영화로 흥행에 성공을 해 이름을 날렸던 유승완 감독의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를 필두로, 박찬욱 감독의 영화 <복수는 나의 것>, 곽경택 감독의 <챔피온>의 영화 포스터 제작에 참여하면서 큰 홍보효과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실제적인 작업이 다른 디자인분야와 다를 것 같습니다.
보통 의뢰가 들어오면 다같이 모여서 아이디어를 내는 것은 여느 회사와 같지요.
다만 아무래도 캘리그라피가 서예에서부터 시작을 하다보니, 아이디어도 온고지신(溫故知新)이라는 말대로 고전에서 많이 참고하게 됩니다. 우리의 고전과 현대의 글꼴을 함께 보고 있노라면 여러가지 아이디어들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여러 차례의 브레인 스토밍에 걸쳐 아이디어가 하나로 모아지면, 화선지에 먹과 붓으로 글씨를 쓰고, 그 후 스캔을 해서 프로그램을 가지고 글자체를 늘렸다가, 줄였다가 하면서 느낌을 결정하지요.
그 중에서 '복수는 나의 것' 같은 경우는 그리 여러 번 실패하지 않고 완성한 작품인데, '복수'와 '나의것' 이라는 큰 덩어리감이 있고, '것'이라는 글자에서는 'ㅅ' 받침을 칼 모양처럼 그려서 정말 가슴 속에서부터 복수에 불타는 마음이 나오는 것 같은 느낌을 표현했습니다.
'한국적 캘리그라피'란 어떤 것일까요?
한국적 캘리그라피의 근원은 바로 서예의 '선(線)'입니다.
꼭 캘리그라피로 표현되지 않더라도 이러한 선을 바탕으로 나온 모든 디자인이 한국적 디자인의 원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끔 한국적 디자인은 글씨의 '획(劃)'에서 비롯되어 전통서예의 격조 있는 선만이 제대로 된 선이며 올바른 선이라고 캘리그라피를 낮게 평가하는 이들이 있는데, 이처럼 디자인에 응용하는 서예를 무조건 비난한다면, 21세기 서예는 오로지 고루한 예술로서 그 명맥만 유지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또 캘리그라피를 한때 스치는 디자인의 유행으로 여겨서도 곤란하구요.
다들 물어보곤 하는 한국적 캘리그라피란 무엇인지 답을 찾았느냐는 질문에는 아마 계속 찾는 중이라는 말을 할 것 같습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캘리그라피라는 용어조차 익숙하지 않았던 얼마 전과 비교해 요즈음의 변화는 정말 비약적인 발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확산 뿐만 아니라 어떤 것이 좋은 캘리그라피인지 구별할 수 있는 안목이 더욱 절실한 것 같습니다.
요즘 전시회를 많이 열고 있는 것으로 아는데요.
캘리그라피를 알리기 위한 활동의 일환입니다.
캘리그라피의 응용이 아직 초기 단계라 다양한 제품이라기보다 예술을 하는 작가들이 만든 소품전처럼 벽시계, 부채, 도자, 조명등, 의상, 벽걸이, 커튼, 방성, 쿠션, 그리고 서예와 전각 그리고 문인화를 응용한 다양한 생활용품들을 선보였습니다.
이런 시도가 일반 관람객들이 서예작품을 좀더 가깝고 편하게 감상할 수 있고, 어느 누구에게나 편하고 친숙한 생활 속의 서예로 즐길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앞으로의 회사 발전방향은...
우리가 한글을 쓰는 한 서예는 생활입니다.
이렇듯 캘리그라피가 우리의 생활 속에 늘 같이 할 수 있도록 생활용품 및 아트 상품을 개발 판매할 예정이며, 캘리그라피 문화를 대중들과 함께 하기 위한 노력은 끊임었이 지속할 것입니다.
그밖에 필묵 아트센터에서 디자이너를 위한 캘리그라피 교육에서부터 대중들을 위한 서예교육. 서예를 통한 심신건강법과 정신집중법을 선보일 예정입니다.
또 필묵 아트숍에서는 필묵을 응용한 여러가지 아트 상품들을 개발해 과거 서예가 생활이었던 것처럼 현재에도 서예가 대중들 속에 함께 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연구 개발해나갈 것입니다.
필묵
1999년 11월 캘리그라피 전문회사 필묵 설립
2000년 12월 필묵·문디자인 공동 문화상품「통일캘린더」제작
2001년 4월 日本 (株)POLYTECH INKFONT 개발
2001년 5월 필묵·윤디자인연구소「필」폰트 10종 공동 개발
2001년 10월 2001 Good Deign Festival 전시
2002년 3월 필컴(필묵커뮤니티) 사이트 오픈(현회원 270명)
2002년 12월 디자이너를 위한 캘리그라피 세미나 개최
2003년 6월 제1회 캘리그라피 디자인전 개최
2003년 6월 필묵의 생활용품전 개최
진행,글_임혜진(KIDP 정보컨텐츠팀)／사진_윤행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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