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logue

한글, 정지를 넘어 움직임으로

어느 학자의 말을 빌리면, 디지털은 현대 과학이 우리에게 남겨준 선물이라 했다.
같은 맥락에서 현재 전세계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현상의 하나인 무빙타입(Moving Type), 즉 움직이는 타입은 디지털이 디자인에 준 선물로 이해된다.

예술에서 시간과 움직임에 대한 시도는 오래 전부터 있어 왔지만, 정작 오늘날과 같이 타입들이 모니터나 스크린 상에서 이리저리 공간 속을 떠들며 살아 숨쉬는 것은 실로 감탄스럽다.
그러면 왜 타입들은 오랜 기간을 고집해오던 스스로의 정체성을 떠나 가지런히 정렬된 평면을 이탈하는 것일까? 커뮤니케이션을 위함일까 아니면 맹목적으로 유행을 뒤쫓는 것일까? 과연 움직이는 타입들은 커뮤니케이션의 미래에 대해 진지한 소명감을 갖고 있을까? 디자이너인 우리들은 이러한 물음들에 대해 사실 분명한 답변을 내놓기가 조심스럽다.
그러나 타이로그라피의 기본적인 책무가 언어적(verbal)이며 육성적(voice)이라는 사실을 간과하지 않을 때 물 만난 고기처럼 타입들이 왜 평면을 떠나 허공으로 떠다닐 수밖에 없는가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글이란 언어의 화석(frozen sound)이다. 움직이고 숨을 쉬는 정서적 뉘앙스의 집합체이다.
이들은 흐느끼고, 격노하고, 속삭이고, 탄식하고, 울부짖고, 노래하고, 때로는 숙연한 생물이다. 이러한 내용을 충실히 커뮤니케이션하기에는 포승줄처럼 보이는 행, 창살 같은 단락, 그리고 죄수의 감방처럼 보이는 사각형 평면은 이제 타입을 구속하는 존재일 뿐이다. 이제 글은 자유로워졌고 움직이며 태어나고 죽기도 한다.

무빙 타이로그라피의 출현과 형성 과정
타입에 움직임을 시도한 과거의 역사를 잠시 돌아보면, 20세기초에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양상은 유동적인 대격변 속에서 시각예술 또한 그 의의 및 구성 체계와 사회적 역할에 의문을 던지는 일련의 혁명을 겪게 된다.
빅토리아 시대를 거쳐 19세기까지의 전통적 타이로그라피는 장식 단계에 머물러 있었으며 구태의연한 관습과 기교적 접근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20세기에 이르러 이러한 표현들에 권태를 느낀 전위적 자유 시인들은 그들의 생각을 표현하기 위해 시에 다양한 활자를 도입하고 실험함으로써 현대 타이로그라피 발전 방향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이러한 시도는 과거에 수평적, 수직적 구조로 일관되어온 속박을 과감히 타파함으로 동적이고 비직선적인 구성을 추구하며 지면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또한 언어에 음악적 속성을 도입하기 위해 구문파괴, 문장 해체, 낱말의 분리, 구두점의 억제, 거친 의성어의 도입 등 언어의 일상적인 의미와 문법적 규칙들을 파괴시키며 극도의 암시성만을 남겨 놓는 혁신적 시도를 모두 수용했다.
이와 더불어 예술 분야의 여러 장르 즉, 미래파(futurism), 다다이즘(dadaism), 구성주의(constructivism), 데 스틸(de stile), 그리고 바우하우스(bauhaus) 시대를 거쳐 현대의 디지털 문명이 도래하기까지 동적 타이로그라피는 끊임없는 발전을 거듭해 왔다.

무빙 타이로그라피의 새로운 환경과 특징
여하튼 우리가 사용하는 매체들의 상당수는 이제 정적 매체에서 동적 매체로 바뀌게 되었고 이를 제어하는 시간+움직임이라는 새로운 인자가 부상하는 것을 막을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미디어를 둘러싼 환경은 본질적으로 새로운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는데 그 하나 하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과거의 독서 방법은 타입이 고정되어 있고 시선이 따라 다녔지만 이제는 타입이 움직이고 시선은 이를 지켜보기만 하면 된다.
둘째, 아날로그는 유형적이지만 디지털은 무형적이다. 그래서 정보량의 제한이 없을 뿐 아니라 항상 보충되거나 삭제될 수 있다.
셋째, 타겟 오디언스의 개념이 달라졌다. 과거 영사막/관객 그리고 TV 스크린/시청자들이 오늘날은 모니터/유저로 바뀌게 되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사실로 자발적이며 또 적극적으로 영상을 지켜보려는 대중들이 이제 소극적이며 주위 환경(밝고 시끄러운)으로부터도 여러 가지 방해를 받는 가운데 모니터 앞에 앉아 있는 유저들로 바뀌었다.
관객들은 약속된 시간만큼은 자리를 떠날 수 없지만 유저들은 언제라도 마음만 내키면 자리를 뜰 수 있게 되었다.
넷째, 종횡비의 변화를 들 수 있다. 과거 4:3. 1.66:1, 16:9의 비례가 오늘날은 어떠한 비례로든 변할 수 있게 되었다.
다섯째, 시점의 변화다. 과거 타입들은 수평적, 수직적, 정면적이었으나 오늘날은 공간적, 입체적, 다층적으로 변하게 되었다.
여섯째, 스토리텔링 기법이다. 과거는 이미 아는 바대로 선형 구조였다면 이제는 비선형 구조이며 나아가 쌍방향 인터랙티브를 지향한다.
일곱째, 엔터테인먼트와 커뮤니케이션의 우위 다툼이 벌어지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대중을 압도할 만큼의 현란한 움직임들은 오히려 커뮤니케이션의 본질을 훼손하여 메시지 전달력을 방해할 지경이다.
이제 타입이 움직이는 새로운 환경에서 디자인의 질과 컨텐츠를 담보해야 하는 디자이너는 더욱 중요한 역할을 떠맡게 되었다.

오늘날에 이르러 시청각 매체의 발달 및 인터넷의 등장으로 인터랙티브가 가능해지면서 무빙 타이로그라피의 범위는 더욱 확대되었고 보다 다양한 표현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제 타이로그라피는 더 이상 언어 정보에 국한된 정적 요소로서가 아니라 영상 및 음향까지를 아우르는 동적이고 복합적인 무빙 타이로그라피(Moving Typography)로 발전하고 있다.
무빙 타이로그라피의 구체적 특징은 다음과 같이 운율성, 연속성, 시간성, 역동성 등의 네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운율성
타입에서 운율이란 타입이 관객의 마음속에서 어떻게 노래되고 있는가를 묻는 것과 같다. 운율적 요소는 억양, 강조, 휴지(休止, pause), 리듬, 페이스(pace)로 규정할 수 있으며, 이러한 요소들은 정적 타이로그라피에서 쉼표, 콜론, 세미콜론 등으로 휴지나 억양을 표시하였던 것을 대신하는 장치이다.

연속성
무빙 타이로그라피에서 동적 효과는 한 화면에 한 단어씩만 등장시킬 수도 있으며, 글이 좌우나 상하로 흐르는 것처럼 연속적으로 단어들을 등장시킬 수도 있다. 이러한 방법은 많은 양의 텍스트를 다양한 방법으로 화면에 등장시킬 수 있게 한다.

시간성
타입의 형태, 크기, 자간, 행간 등을 조절하는 가운데, 단어와 음절 사이에 시간적 개념을 획득할 수 있다. 이러한 결과는 그 잔상이 관객의 심상 속에 오래 지속될 수도 있으며 그 반대일 수도 있다. 또 화면이 희미해지거나 위치의 변화를 통해 관객의 뇌리 속에 깊은 인상과 여운을 남길 수도 있다.

역동성
무빙 타이로그라피는 움직임을 통해 관객과 멀어질 수도 가까워 질 수도 있다. 작은 흔들림으로도 여러 가지 감정을 표현할 수 있다.
타입이 프레임 가장 자리에 가까이 있으면 더욱 크고 어둡게 나타나며, 타입이 그로부터 멀리 떨어지면 더 작고 희미해진다. 또한 프레임 안에서 빨리 움직이는 것은 보다 가깝게 느껴지고 서서히 움직이는 것은 멀리 있는 것으로 지각된다.

마치며_한글에 있어서 무빙 타입의 의미와 전망
내가 기억하는 영화들 중에 툼 레이더, 매트릭스, 백 투 더 퓨처, 큐브, ET, 쥬라기 공원, 그리고 우리 나라의 영화로는 편지, 은행나무 침대 등이 있다.
일상에서, 요즈음 사고하는 것의 큰 부분이 시간과 움직임이라는 명제로 내 머리 속이 가득 차서 일까, 시간+움직임이라는 개념으로 흥행된 영화들이 상당수이다. 그리고 이 영화들은 한결같이 흥행에 성공했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현대인들의 지대한 관심이 시간과 움직임을 기반으로 하는 줄거리에 심취해 있을 뿐 아니라, 이러한 가상적 내용들을 부담 없이 받아들인다.
우리가 알고 있던 모르고 있던 간에 시간+움직임이라는 새로운 개념은 이미 커뮤니케이션 환경을 뒤바꿔 놓았다. 화학 기호들이 가득 늘어선 원소주기율표에서 보듯, 이제 시간+움직임이라는 개념은 커뮤니케이션 디자인이 발견한 새로운 성분으로 이전의 전통적인 디자인 팩터(factor)들에 화학 작용을 일으키며 어느 하나 남김없이 보다 나은(또는 다른) 차원으로 디자인을 변모시킬 것이 자명하다.

이 글을 쓰며 간략하지만 움직이는 타입에 대해 여러 가지를 논의하는 가운데 움직이는 타입 즉, 무빙 타입을 변호하듯 비쳐질 수도 있었다.
그러나 미래의 무빙 타입은 인쇄 매체를 기반으로 하는 전통적인 타이로그라피의 큰 흐름과 더불어 생존하리라는 점을 의심할 사람은 없다. 따라서 미래의 한글은 바람직한 무빙 타입의 기반 조성을 위해 현재 우리 갖고 있는 한글의 조형성에 대해 진지한 성찰이 필요한 때이다.
우리가 갖고 있는 한글은 납작한 지면 위에 잉크로 흡착된 형태로서 항상 상하좌우가 같은 모습이어야 한다. 그러나 모니터나 스크린의 공간 속은 이제 더이상 납작하지도 않으며 정면적이지도 않다.
그렇다면 중력이 휘발된 상태처럼 허공을 유영하는 낱자들은 ‘ㄱ’과 ‘ㄴ’을 어떻게 분별할 것이며, ‘ㅏ’와 ‘ㅓ’를 어떻게 구별할 것인가? 또 ‘름’과 ‘믈’, ‘아’와 ‘우’ 등은 것은 어찌 판독할 것인가? 이러한 의문들이 공연한 걱정일 뿐이라고 무시할 수는 없지 않은가?
우리는 완벽히 새로운 환경을 맞아 지금까지 갖고 있던 한글의 모습을 다시금 겸허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디자인의 진화는 항상 과학과 미학의 발전과 괘도를 함께했다. 미학은 통찰이며 과학은 도구였다. 21세기는 디지털이 조성한 밭이 아니면 꽃필 수 었고 그 가능성마저 희박하다.
필자는 디지털을 기반으로 하는 미래의 한글을 전망하며 디지털 환경에 걸맞는(어쩌면 훨씬 이전부터 있어 왔던) 한글의 크고 작은 문제들을 누군가는 진심으로 고뇌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글의 정신은 우수하다. 진실로 우리 문화의 전령이다. 그러나 한글의 구조 및 집합 구성도 그러한가? 이것이 과연 우리가 예비하는 디지털 공간에 적합한 형상인가를 자문한다.
오늘날까지 디자이너인 우리들은 우수한 한글의 터락들을 다듬고만 있지 않았는가 생각해 본다.
오늘까지는 구체적인 어떤 대안도 마련되어 있지 못하다. 그것이 무엇이든 본격적인 이야기를 논의해야 한다. 국문학자가 아닌, 디자인을 배운 우리들이...

필리포 마리네티.
산+계곡+거리x조프르.
1915

스테판 말라르메.
주사위 던지기.
1897

기욤 아폴리네르.
비가 온다.
1918

쿠르트 슈비터스.
소나타.
1924

로베르 마생.
대머리 여가수.
1964

TV 방송타이틀.
일명'고화질TV(HDTV)' 라 불리는 하이비젼 방송사에서 제작된 오프닝 타이틀.
화면내 모든장식을 자제하고 오직 5,000여개의
'NHK'와 'Hi-Vision'이라는 타입만을 사용하여 강렬함과 함께 무중력 공간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움직임을 보여주었다.

<세븐(Seven)>
오프닝&엔딩 타이틀.
영화에서 타이포그래피의 '해체성'을 보여주는 것으로는'세븐(Seven)' 을 들 수 있다
이 영화는 오프닝 타이틀에서 익명의 제보자가 보내는 편지를 보는 것과 같은 착각속에 빠지게 한다
즉, 콜라주로 모아진 타입들을 보고서 형식의 지면처럼 보이는 스크린 위에 불규칙하게 나열하고 있다.
그리고 이 영화의 엔딩 타이틀은 다른 영화와 달리 텍스트가 위에서 아래로 내려온다.
텍스트의 동선이 관객의 예상과 달라 마지막 장면에서 보여준 예상 밖의 결과를 강조한다.

www.yugop.com
유고 나카무라.
움직이는 타입이 가장 활발히 진행되고 있는 곳은 인터넷이다.
인터넷 상의 웹사이트 역시 TV광고나 영화와 마찬가지로 동영상 및 소리, 텍스트, 그래픽 등이 복합적으로 절충되는 공간으로 타입에
'시간+움직임'이라는 개념이 더해지는 또 하나의 장이다.
특히 유고 나카무라의 프로젝트는 무빙 타이포그래피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표본이라 할 수 있다.
이 사이트는 타입을 읽는 이용자들을 위해 자신의 건축 및 공학적 감각을 디지털 타이포그래피에 적용함으로써 새로운 차원을 창조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