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 4. 보편성과 특수성

개인 글꼴의 가능성과 한계.

개인성의 승리?
1999년 발행된 <한글의 새로운 시도>에는 '개인 활자 시대 the age of personalized fonts'라는 특집이 실려 있다.
이 특집의 서문에서 필자들은 "다양한 글꼴 환경이 전개되면서 이젠 디자이너들이 기존에 개발되어있는 일반서체를 사용함과 동시에 자신만의 개성이나 목적에 맞게 서체를 직접 개발,제작해 쓰는 경우가 늘어나고있는 추세"라며 바야흐로 개인 활자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고 적고있다.(주1)
이어, '다양한 글꼴 환경'이란 다름 아닌 '디지털 방식'으로 고안된 '기술의 개발'과 '탈네모틀의 조합형 글자꼴 디자인'의 대두이며, 이에 따라 '전에 없던 다양한 글자꼴이 탄생'되었고, 결과적으로 '우리의 글꼴 환경은 양적인 면이나 질적인 면에서 놀랄 만큼 발전'하고 있다고 자평하고 있다.

이러한 지적은 상당한 설득력이 있다. 우선, 폰토그라퍼fontographer나 폰트매니아fontmania 등의 디지털 서체 개발 소프트웨어의 탄생은 주조활자 시대에는 시도하기 어려웠던 여러 실험들을 가능케 했으며, 1950년대부터 시작된 탈네모틀 한글꼴의 연구는 한글의 기본 형태를 네모틀에서부터 해방시킴으로써 한글꼴의 가능성을 무한대에 가깝게 열어 제쳤기 때문이다.
이러한 여러 변화는 우리로 하여금 '개인 활자 시대'라는 용어를 더 이상 선언적 의미가 아닌, 한글꼴의 현재적 의미와 가능성을 동시에 포함하는 것으로서 받아들이게 한다.

글꼴의 개인성이 보편성을 압도한 것일까? 보편적 글꼴의 대명사였던 명조와 고딕의 오랜 독재는 이제 막을 내리고 있는 것일까? 정치적으로 비유하자면, 개인 활자와 더불어 글꼴의 민주주의가 도래하고 있는 것일까?
마지막으로, 우리는 이 시대를 개인성이 최대한으로 꽃피는 글꼴의 르네상스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인가?

명조와 고딕의 독재는 끝났는가?
너무 거친 감이 있지만, 새활자 시대(1864~1949)부터 원도활자 시대(1950~현재)를 거친 최근까지의 한글 글꼴 상황을 '명조와 고딕의 독재'라 한다 해도 크게 틀린 것은 아닐 것이다.(주2)
명조체와 고딕체는 한글 창제 이후 붓글씨를 본으로 한 활자들이 정련되면서, 그리고 일본과 한자 활자체의 영향을 받으며 형성된 활자체로서 현재까지 가장 애용되고 있는 글꼴들이다.(주3)
이러한 두 글꼴이 현재와 같은 형태로 다듬어지고, 또 막강한 영향력을 미치기 시작한 것은 출판물과 인쇄물이 대량으로 유포되기 시작한 일제 후기와 한국 전쟁 이후부터였으며, 이러한 영향력 뒤에는 박경서(?~1965?)와 최정호(1916~1988), 최정순(1917~ ) 등 서체 개발자들의 막대한 노력이 있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렇다면 명조와 고딕이 근대 100여년이 지나는 동안 그토록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또 이제 두 활자체의 독재는 끝나가고 있는 것일까?
첫번째 질문에 대한 답은 명확하다. 명조체와 고딕체는 지금까지 개발된 한글꼴 중 가장 균형감 있고, 가독성이 뛰어난 활자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즉, 이 두 활자체는 지금까지 개발된 한글꼴 중 아름다움과 실용성이라는 글꼴의 필수 조건을 가장 완벽하게 갖추고 있는 예인 것이다.(주4)
물론 이러한 주장에는 한계가 있다. 해방 이후 한글 글꼴의 형태를 오랫동안 지배했던 초기 국정 교과서체와 초기 동아출판사체가 모두 명조와 고딕에 국한되어 있었기에 우리는 다른 글꼴의 가능성을 시험할 기회를 좀처럼 갖지 못했던 것이다.
또한, 글꼴 자체가 지니고 있는 보수성과, 익숙한 서체만을 반복해온 서체 개발자들의 안전주의 또한 명조와 고딕의 오랜 독재를 가능케 한 원인으로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공공교육을 통해 보편적 서체를 반복적으로 훈육시켜온 근대의 국어 교육도 다양한 서체의 등장을 가로막는 큰 요인으로 지적될 수 있을 것이다.
조선시대 '전예해행초'를 반복해서 학습하던 맥락은 근대 한국의 공공교육에 그대로 이식되어, 명조체와 같은 정자만이 좋은 글씨로 인정받게 한 것이다.
개성적인 글꼴이란 결국 개성적인 손글씨에 그 기본이 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이와 같은 '바른 글씨'의 일방적 강요는 개인 활자의 개발에 큰 장애 요인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개인 활자 시대의 개막과 함께 명조와 고딕의 독재는 끝이 나고 있는 것일까? 개인 활자는 과연 명조체와 고딕의 장점을 대체할 만한 역량을 보여주고 있는가? 아니면 균형감과 가독성이라는 획일화된 가치에서 벗어나 글꼴이 가질 수 있는 가능성의 공간 자체를 확장시키고 있는 것일까?

개인 활자란 무엇일까?
이러한 여러 질문에 답하기에 앞서, 개인 활자라는 현상, 혹은 실천에 대한 간단한 정의와 역사를 훑어보자.
개인 활자가 무엇인지, 그 시작과 현재의 상황은 어떠한지를 짚어보는 것은 이 독특한 실천의 가능성과 한계 지점을 파악하는 기초 작업이 될 것이다.
우선 우리는 개인 활자라는 용어의 모호함을 지적해야 한다. 쉽게 생각하자면, 개인 활자란 개인에 의해 발안되고 제작된 활자를 말하는 듯 하다.
앞에서 인용한 글을 통해 확인하자면 "자신만의 개성이나 목적에 맞게 서체를 직접 개발, 제작해 쓰는 경우"가 개인 활자인 셈이다. 이런 정의에 따를 때만, 개인의 고유명이 붙어있는 과거의 서체들과 현재의 개인 활자를 구분할 수 있게 된다. 예를 들어, 세조 원년인 1455년에 개발된 강희안체를 두고 개인 활자라고 부를 사람은 없을 것이다.
강희안 자신의 서체에 의해 개발된 활자이지만, 자신의 목적에 따라 제작된 것도 아니며, 또한 강희안 자신이 직접 제작한 것은 더더욱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1692년에 제작된 원종체나, 19세기 초에 제작된 장혼체 또한 같은 맥락으로 개인 활자로 볼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예들은 개인의 서체를 본으로 제작되었지만, 이 글꼴들에는 자신들의 목적이 결여되어 있었으며, 더욱이 개인 서체가 전제하는 직접 제작의 과정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해방 후 양대 서체 개발자들인 박경서나, 최정호, 최정순 등의 서체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이것들은 명확한 목적에 의해 개발되었고, 그들은 글꼴 제작과정에도 직접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위의 정의만을 놓고 보자면, 예를 들어 최정호체, 최정순체는 분명 개인 활자로 인정받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서체는 각 서체 개발자의 개인적인 미감에 의해 개발된 것이라기보다는, 글씨에 대한 당시 한국인의 보편적인 미감과 요구에 의해 개발된 것이기에 개인 활자라고 부르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개인 활자를 정의하는데 있어 한가지의 기준이 더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바로 글꼴의 특수성, 개인성이 그것이다.
명조, 고딕, 그래픽체 같은 일반적, 보편적 서체와 명확히 구분되는 개인적 글꼴을 두고 우리는 개인 활자라 부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기준으로 보면, 최정호체와 최정순체 등과 같이 분명 개인에 의해 개발, 제작되었지만 그 형태에 있어 개인적이라기보다는 집단적 미와 목적을 드러내고 있는 것은 개인 활자로 볼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

물론, 여기서 개인적이다, 집단적이다 라고 하는 것은 지극히 상대적인 개념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엄밀하게 이야기하자면 모든 글꼴의 형태는 어느 정도의 집단성과 개인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이 맥락에서 명조체는 집단적 미를 구현한 것이고, 개인 활자는 개인적 감성을 나타낸 것이다, 라고 이야기 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단지 지금까지 한글꼴의 역사뿐이다.
이에 따른 보편적 글꼴과 개인적 글꼴 사이의 구분은 단지 정도의 차이에 의한 임의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이 글에서 그 임의적인 구분을 굳이 채택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이러한 구분을 통해 개인 활자의 가능성을 점검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개인 활자가 처한 어려움
당연한 얘기겠지만, 글꼴은 언어와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다.
글꼴이란 결국 언어가 구체화, 물질화된 한 형태이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가 언어에 대해 던졌던 질문은 개인 활자라는 현상에 많은 시사점을 가진다.
그들은 자신들의 공저 <카프카- 소수적인 문학을 위하여>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했다. "자신의 것이 아닌 '언어'안에서 사는 사람이 오늘날에는 얼마나 많은까?"(주5)
그렇다면 우리는 같은 질문을 글꼴에 대해서도 던질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것이 아닌 '글꼴' 안에서 사는 사람이 오늘날에는 얼마나 많은가?"라고 말이다. 그리고 개인에 의해 개발, 제작되는 개인 활자는 이러한 질문에 대한 유효한 반응으로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사람이, 혹은 일반 대중의 욕구에 의해 제작된 일반적, 보편적 글꼴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욕구의 결과로서 말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개인 활자는 진정 보편적인 글꼴의 지루함을 떨쳐버리고, 개인적인, 그리고 소수적인 욕망의 근거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인가? 은밀한 소수자의 언어들이 표준어의 일방통행이 가져올 수 있는 폭력성과 억압을 완화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현재까지의 상황만을 놓고 본다면 이에 대한 대답은 다소 부정적이다. 그리고 이러한 부정적 상황은 언어에 비해 글꼴, 활자만이 지닌 특수성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
언어, 그러니까 말은 누구나 내뱉을 수 있는, 물질적인 제약이 적은 소통 수단임에 비해, 글꼴은 자체가 무거운 물질성의 중력에서 자유롭지 못한 매체이기 때문이다.
물론, 언어라고 해서 무한대의 자유를 구가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소통가능성'이라는 제약이 있기 때문이다.
언어의 자유는 서로 이해 가능한 토대에서 이루어지며, 소수자의 언어일 경우에도 이런 법칙은 엄격히 적용된다. 활자가 처한 상황은 이보다 더 제한적이다. 소통가능성이라는 언어적 제약에 물질로서 표시될 수 있어야 한다는 조건이 추가되기 때문이다.

인쇄, 출판에 쓰이는 활자가 디지털화 되면서 글꼴의 물질성이 과거에 비해 현격하게 줄어든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영어의 알파벳과는 달리 조합형인 한글의 특성상 폰토그라퍼나 폰트매니아 등의 소프트웨어를 이용한다고 해서 누구나 쉽게 한글 글꼴을 제작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개인 서체 개발자들 대부분이 개인 활자가 처한 가장 큰 문제점으로 최소 2,350자를 한자 한자 만들어야 한글꼴 한 벌이 완성되는 상황을 꼽고 있듯, 최소한 완성형 글꼴에 있어 개인 활자를 가진다는 것은 은어 하나를 개발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노력과 시간을 요구하는 것이다.

또한, 이렇게 어렵게 개발된 서체들 또한 광범위한 지지를 얻지 못하고, 단지 개인의 성과물로서 방치되고 있는 상황도 긍정적인 것은 아니다.
개인 활자는 물론 개발자 개인의 개성이 가장 많이 묻어 있는 것이지만, 언어와 마찬가지로 일정한 집단에 의해 공유되었을 때 그 의미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는 글꼴이 유통되는 합리적 시장이 형성되어 있지 못하다는 데에도 한 원인이 있겠지만, 개인 활자들이 너무 독특한 형태에만 그 강조점이 두어진 나머지 은어나 속어들이 지니고 있는 효과적인 '의미의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지 못하고 있는 것에도 기인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개인 활자 시대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
'개인 활자 시대'라는 구호는 한 가지 사실을 전제로 성립한다. 즉, 지금까지의 글꼴은 개인의 개성이나 목적이 아닌 불특정 집단 전체의 성격과 목적만을 위해 제작, 유포되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또한 후자만으로는 효과적인 의미 전달과 감정을 표출하기에 부족하다는 주장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 '개인 활자'라는 용어가 지닌 속뜻이다.
이렇게 본다면 개인 활자의 등장은 단순히 글꼴 제작 툴의 개인화, 절차의 간편화에 의한 산물이 아니다. 개인 활자의 등장은 글씨를 통한 자신의 표현, 글씨는 자신을 표현하는 강력한 수단이라는 단순한 진리를 반증하는 사건이기도 한 것이다.

글꼴은 단순히 뜻을 전달하는 매개체가 아니다. 그것은 글씨라는 강력한 미디어를 통해 자신의 감성과 느낌을 전달하는 둘도 없는 조형물이다.
과거 한글 활자의 역사가 보편적 소통을 위해 개인의 표현가능성이 제한되어온 시간들이었다면, 개인 활자 시대의 개막은 이러한 구도가 극적으로 역전될 수 있는 가능성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다.

글_김형진(객원기자) , 자료제공_윤디자인, 산돌커뮤니케이션
 

오랜 세월동안 한글 글꼴을 지배해온
명조체와 고딕체.

학교에서 열리는 '경필대회'에서는 아직도 이 중 명조체를 본으로 한글의 아름다움을 평가하고 있다.

주
주1)
단국대 시각디자인과,
『한글의 새로운시도』,
안그라픽스, 1999.
p. 95.

주2)
이 글에서는 새활자 시대와 원도활자 시대를 거친 현재까지 만을 논의의 대상으로 삼는다.
이 짧은 글에서 한글 글꼴의 전 시기를 대상으로 삼는 것은 무리이기도 하거니와, 현재 개인 활자가 비판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이 주로 원도 활자 시기 이후에 개발된 활자꼴들이기 때문이다.
새활자 시대와 원도 활자 시대에 대한 논의는
김진평,
「한글 활자체 변천의 사적 연구」,
『고 김진평 교수 추모 논문집』,
1999.를 참조.

주3)
김진평 교수는 위의 글에서 명조체(明朝體)와 고딕체(Gothic體)의 명칭 문제를 제기하면서, 명조체를 정조체(正朝體)로 대체할 것을 제안하였다.
이 제안은 의미 있는 것이지만, 아직 일반화되지 않았으므로 이 글에서는 편의상 명조체라는 명칭을 그대로 사용하기로 한다.
요즈음에는 명조체 대신 바탕체, 고딕체 대신 돋움체라는 명칭도 많이 사용되고 있다.

주4)
이와 관련해 1928년 <동아일보>에 실린 활자체 개량을 위한 자체(字體) 공모 규정은 흥미로운 예를 제시한다.
이 규정에는 "적절한 자체, 즉 적은 면적에서 크게 보이게 될 수 있는 대로 명조체로 하는 것이 좋다"라는 문구가 삽입되어 있는데, 이는 명조체가 일찍부터 가장 가독성이 뛰어난 활자로 인정받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김진평,
「한글 활자체 변천의 사적 연구」,
p. 152.에서 재인용.

주5)
질 들뢰즈,
펠릭스 가타리,
『카프카- 소수적인 문학을 위하여』
(이진경 역),
동문선, 2001,
p51. 강조는 인용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