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 1.

한국의 타이포 유산1. 활자. 서예.

한국의 타이포 유산_활자
석보상절
한글은 손글씨에 앞서 활자체가 먼저 존재하는 유일한 문자이다. 훈민정음 목판본의 글자꼴은 한글 형태의 시원(始原)을 보여준다.
창제 직후의 한글 자체는 음운체계의 구조와 원리를 투명하게 드러내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
따라서 하나하나의 글자는 어느 모임자리에 오건 그 기본적인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며(위 사진의 "가"와 "고"에서 닿소리 ㄱ 의 형태 비교), 초ㆍ중성과 종성이 같은 크기의 공간을 점하고 있다. 그리고 필기구의 영향을 받지 않은 각진 산세리프 형태를 띠고 있다.
병용한 한자체의 부드러운 필체와 대조되는 저 추상적이고 현대적인 미감을 보라. 이는 두 문자가 서로 전혀 다른 패러다임에서 탄생했음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다.
하지만 극도로 인위적이고 기하학적인 초기의 형태는 오래 가지 못했다.
한글 창제 겨우 1년 후에 발간된 이 <석보상절>만 보더라도, 벌써 새김의 편의를 위한 변형이 조금씩 이루어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를테면 홑소리에 딸린 방점(?)이 획으로 변해서 ?ㅣ, ?__ 가 각각 ㅓ, ㅗ가 되었다.

<석보상절>에 쓰인 글자체는 현존하는 한글 활자체의 최고본(最古本)이다(훈민정음은 목판본으로 간행되었다). 금속 활자를 주조했다는 것은 그만큼 이 글자에 중요한 가치를 부여했다는 뜻이다.
그러나 실제 본문에서 한글이 주가 되고 한문이 보조적인 역할에 머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자체는-다른 한글 활자체들이 그러하듯-갑인자 '병용' 한글 활자라는 어정쩡한 이름을 가지고 있다.
이후 한글 활자체는 계속해서 붓글씨 필체의 자연스런 느낌을 살리는 방향으로 진화했다.
창제 초기의 판본체는 20세기에 와서 돋움체라는 형태로 불완전하나마 그 명맥을 잇게 된다.

한국의 타이포 유산_서예
옥원중회연(玉鴛重會緣) 권지육(卷之六)
이 글씨가 이제 다소 지루하게 느껴지더라도 한 번은 보고 넘어갈 가치가 있다.
오늘날 우리가 서예 학원에서 배우는 한글 궁체 채본 글씨의 원본격인 이 소설 <옥원중회연>은 필사본만 무려 22권에 이르는 장편 대하애정소설이다(그중 1권부터 5권까지는 소실되고 없다).
대체 이렇게 길고 긴 소설의 독자는 누구였을까?

헌종이 사랑하는 후궁 경빈을 위해 지은 창경궁 낙선재에는 이런 장편 한글 소설이 수천 권씩 쌓여 있었다.
후궁은 왕이 자신의 처소를 찾지 않는 길고 긴 밤을 이런 애정 소설을 읽으며 지새웠던 것이다. 왕비나 후궁들이 소일거리로 읽을 소설들을 열심히 베끼는 일은 한글 문서를 전문적으로 필사하는 임무를 띠고 있는 서사상궁들의 몫이었다.
<옥원중회연>의 앞부분은 정성들여 쓴 정자체로 되어 있지만 뒤로 갈수록 글씨체가 흘림체로 바뀌어 간다.
아마 긴 소설의 앞부분을 잽싸게 읽고 뒷부분을 다 베껴쓰는 걸 기다리는 데 진력이 난 여주인의 독촉 때문이었으리라.

궁체는 여자들을 위해 쓰여진, 여자들에 의한, 여자의 글씨였다. 그리고 지금도 어느 정도는 그렇다.
이름난 남성 서예가들은 대부분 한문서예가들이며, 한글 궁체로 일가를 이룬 사람들은 여성 서예가들이었다.
소혜왕후의 <내훈>에 보면 "이리와 같은 아들을 낳는다 해도 약해질까봐 두려워하고 쥐같이 약한 딸을 낳고도 범같이 될까봐 걱정을 한다"고 나와 있다.
자고로 여자의 글씨는 약해 보여야 한다. 더욱이 상궁이 쓴 글씨라면 쓰는 사람의 개성이 담겨서는 안된다. 오늘날엔 악덕이나 다름없는 유약함과 개성없음이야말로 궁체가 갖추어야 할 미덕이었다.
이 단아하고 틀에 박힌 고객지향의 글씨체는 단순히 아름다움만을 추구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기하학적으로 완벽하게 균형잡힌 창제 초기 판본체 한글꼴의 착시현상을 보정하여, 한글의 시각적 균형감과 가독성을 끌어올렸다.
오늘날 한글 글꼴의 기본이 되는 바탕체가 이 궁체에서 비롯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글_편집실

석보상절
초주갑인자(初鑄甲寅字) 병용 한글 활자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옥원중회연(玉鴛重會緣) 권지육(卷之六)
서사상궁 필사체.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