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 3. 네모와 탈네모

아름다운 들날뚱홀체를 기다리며.

정보화 사회에서는 대부분의 정보들이 글자를 통해 보관, 전달, 활용된다.
정보화 사회의 중요한 특징으로 첫째 대량생산을 들 수 있고, 둘째 고속생산을 들 수 있는데 글자를 대량, 고속으로 생산하려면 반드시 글자생산 기계에 의존해야 하며 또 그러자면 어떤 글자꼴이 가독성과 판독성이 높고 또 기계화에 적합할 뿐 아니라 경제적인가 하는 점이 아주 중요하게 된다.
그래서 정보 사회는 어떤 의미로는 글자전쟁의 시대라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렇게 보면 정보 전쟁의 승패는 누가 더 과학적인 글자를 사용하고, 누가 더 과학적인 기계를 사용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할 수 밖에 없다.

여기서 거론되는 것이 소위 글자 생산의 원가이다. 글자에 원가를 운운하는 것이 생소하게 느껴질 지 모르나, 손을 사용해 붓이나 볼펜으로 글을 쓰던 시대에는 도저히 상상할 수는 엄청난 양의 글자를 쏟아내는 요즘 세상에서, 글자 생산의 원가는 한 문화의 경쟁력을 이루는 한 요소임이 당연하다.
결국 하나의 문화로 인식되는 글자마저도 경제적인 문제를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여기서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이 바로 네모꼴과 탈네모꼴 글자의 문제이다.

탈네모꼴 글자란 말 그대로 네모꼴 공간에서 벗어난 글자를 말한다. 그러니 네모꼴 글자에 대칭되는 용어이기도 하다.
이 글자를 두고 주요한 박사는 빨래줄 글자라 하였고 나는 <한글자형학>(디자인하우스/1985년)에서 이 글자꼴이 들쭉날쭐 뚱뚱홀쭉하다 하여 '들날뚱홀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탈네모꼴 글자를 논할 때 먼저 초기 한글 타자기와의 관계를 거론하지 않을 수가 없다.
1949년 안과의사 공병우 박사가 실용적인 한글 타자기를 발명한 이래, 그 뒤를 이어 김동훈식 타자기가 등장했다. 시장 경쟁을 통해서 이 두 타자기가 보급되자 일반 사용자들은 속도 위주의 공병우식 타자기와 글자꼴 위주의 김동훈식 타자기 중에서 선택을 하게 되었다.
공병우식 타자기는 3벌식이었고 김동훈식 타자기는 5벌식이었는데 바로 3벌식인 공병우식 타자기 글자가 기존 네모꼴 글자에서 벗어난 빨래줄글자꼴 모습이었다.
타자기의 인자방식은 글자막대(타이프바) 끝에 있는 한글 자모의 낱자가 글쇠를 한번 칠 때마다 한 자씩 찍히는 방식이었다.
타자기의 글쇠 수가 44개로 정해져 있었으니 이 한정된 범위 안에 한글 자모와 숫자 그리고 기본적인 부호를 모두 넣어야 했던 것이다. 어떻게 보면 결과적으로 이런 기계적인 제약을 여러가지 방법으로 해결하려는 시도 속에서 근대 탈네모꼴 글자가 탄생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이중 공병우식 세벌식은 그저 편의대로 나온 것이 아니라 한글의 구성원리에 따른 것이었다.
한글의 기본구조 자체가 닿자(닿소리 글자)와 홀자(홀소리글자)와 받자(받침글자)로 구성되는 3벌식 구조이니 이를 그대로 자판에 반영한 세벌식이 그에 맞다 할 것이다.
만약 1969년, 정부의 급하고도 일방적인 자판 통일화가 없었다면 과연 지금 우리들이 쓰고 있는 자판이 2벌식일지 3벌식일지 모르는 일이다. 타자기는 이제 더 이상 사용되지 않으니 상관없는 일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글자꼴 자체도 세벌식으로 해야 값싸고 실용적인 글자를 대량생산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개발도 쉽고 간편하고 다양해진다.
한 예로 현재 네모꼴인 완성형 글꼴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모두 11,712자의 개별 글자 디자인이 있어야 하지만 탈네모꼴 글꼴은 67개의 자소만 디자인하면 된다. 이 말은 곧 시간과 경비가 덜 든다는 말이다.
글자의 대량생산과 다양한 글자꼴의 개발이 민족문화 발전의 중요한 뿌리라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무엇이 더 경쟁력 있는 방법인지는 자명해진다.

그러나 한글 창제 당시 이미 그 조형원리의 기반이 마련된 탈네모꼴 글자는 그동안 역사적으로 홀대를 받아온 것이 사실이다.
가장 큰 문제는 한글 창제 당시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인쇄기술이 탈 네모꼴 글자와 궁합이 맞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즉, 활자를 이용한 인쇄에서는 사각형이라는 규격화가 필수적이었기 때문에 자연히 글자들은 고정된 틀 안에 표현되어야만 했다. 이러한 제약은 위에 언급한 타자기를 제외하고는 해방 후 컴퓨터를 이용한 인쇄기술이 발달하기 전까지 계속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인쇄기술 자체는 글자꼴 연구의 폭을 제한하는 기재로 사용되어왔다.
그 무렵에는 디자인이란 개념보다 도안이란 개념이 널리 퍼져 있었으며 자연히 글자꼴 연구도 도안사류의 연구내지는 단순 기능공 수준의 연구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문제는 그 무렵의 도안사류의 글자꼴 연구, 기능공류의 글자꼴 연구가 대부분 사진식자기 판매업자들의 상업주의에 영합한 연구들이었다는 것이다.
바람직한 한글 글자꼴의 연구는 한글의 특성을 살리는 과학적인 글자꼴의 연구여야 하는데도 그 무렵 한글 글자꼴의 연구는 일본식 글자생산 기계에 맞는 비경제적이고 비과학적인 연구들이 대부분이었다는데 연구의 한계가 있다.
도안사류의 연구나 기능공류의 글자꼴 연구가들은 생활의 방편으로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을 할지 몰라도 결과만 놓고 보면, 그들이 수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 만든 글자꼴들이 현실적으로는 일본식 시진식자기 판매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일본 사진식자기가 한국 시장을 점령하고 있었던 것은 과학적인 글자의 발전을 방해하는 결과가 되었다.
일본식 사진식자 기계 장사꾼들의 주머니만 불려준 네모꼴 글자꼴 연구들이 결과적으로 한글 기계화 발전을 늦추고, 그 바람에 끝내는 한글 글자꼴 연구가 일본에 예속화되기도 했다.
아무리 그럴싸한 구실을 내세워도 제 나라의 얼과 혼을 살리지 못하고 일본 사진식자기 회사만 살찌운 연구는 다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덧붙여 그동안 한글 글자꼴에 대한 연구는 주로 미술대학의 교수, 디자이너, 출판관계 종사자, 컴퓨터 연구가, 국어학자, 한글 기계화연구가 등에 의해 진행되어 왔다.
그런데 대부분의 연구들이 인접 분야와 단절된 체 단독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적지 않은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그동안 발표된 한글 글자꼴에 대한 연구나 논의들이 안고 있는 문제를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한글의 특성에 대한 무지
둘째, 과학적인 한글 기계화에 대한 무지
셋째, 로마자 타이포그라피 이론을 무비판적으로 한글에 적용
넷째, 일본식 글자생산 기계의 대량 보급으로 일본의 문화적 예속 자초
다섯째, 글자꼴과 인접 분야의 관계에 대한 무시
여섯째, 총체적이고 통합적인 시각의 결여로 지엽적 연구 치중
일곱째, 한글자형학 이론 부재 등

일반인들의 글자에 대한 인식에도 큰 문제가 있었다. 많은 사람들은 글자꼴의 실용적 가치보다는 미적 가치를 더 우선시 혹은 중요시하는 경향이 있다.
근대 이후 현재까지 사용되어온 네모꼴 글자들을 미적으로 더 균형잡힌 형태로 인식하고, 기능상에 있어 문제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눈에 익어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이 한글 글자꼴의 발전을 늦추고, 그 바람에 한글 기계화 발전도 늦어지게 된 것이다.

일찍이 필자는 '한글의 과학성과 글자의 비합리성_표준글자꼴 시안'(예술과 비평/1987년 9월호)이라는 글을 통해 글자꼴 표준화의 정의, 필요성, 방법, 적용범위 등에 대해 논하고, 우선 남한의 표준글자꼴 제정을 제안하면서 당시 대표적인 탈네모꼴 글자였던 안상수체를 그 대안으로 제시한 적이 있다.
그 뒤 서서히 탈네모꼴 글자에 대한 일반의 인식이 달라지면서 지금은 여러가지 다양한 탈네모꼴 글자가 나오게 되었다.
더욱이 이어령 교수가 문화부 장관으로 재직할 때 문화부에서 탈네모꼴 글자(안상수체)를 앞장서서 대대적으로 사용한 것이 탈네모꼴 글자꼴의 실용성을 전국적으로 알리는 단초가 되기도 했다고 본다.
그 뒤 매킨토시를 이용하여 공병우 박사와 한재준 교수가 만든 '공한체'의 등장으로 탈네모꼴 글자의 일반적 사용의 지평은 점점 확대돼갔다.
초기에는 아동용 도서에서 쓰이기 시작해서 이제는 일반도서에도 두루 쓰일 만큼 일반인들의 사랑을 받는 글자꼴로 격상되어가고 있으며 자연히 일반인의 미감도 변해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글자꼴은 미적인 가치는 물론 실용적 가치 역시 지녀야 한다.
실용적 가치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가독성과 판독성이 높아야 하는 점이며 미적 가치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글자꼴의 아름다움이다.
이 두 요소를 충족시키려면 풀어쓰기를 하는 로마자와는 달리 모아쓰는 한글에서는 여러가지 문제가 파생된다. 이중 실용적인 면에서 획의 많고 적음에 상관없이 같은 공간에 글자를 몰아넣는 네모꼴 글자는 판독성과 가독성에 있어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다.
한편, 미적인 측면에서는 아직까지 사람들은 네모꼴 글자를 더 미적으로 균형있는 것으로 인식한다.
하지만 그것은 네모꼴 글자가 사람들이 보아온 익숙한 글꼴이기 때문이다. 또한 오랜 세월에 걸쳐 다듬어져 온 네모꼴에 비해 아직 실험적인 시도가 한창인 탈네모꼴 글자가 덜 다듬어진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며 이는 시간이 지날수록 보완될 것이라 생각한다.

탈네모꼴 글자의 조형원리의 근거는 바로 한글 창제의 원리에 있다.
한글의 구성원리 자체가 초성, 중성, 종성의 세벌식으로 되어 있다. 또한 훈민정음 반포 당시의 글자체를 살펴보면 일정한 네모꼴 안에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글자꼴을 유지하면서 통일성 있게 성립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한글의 조형원리에 더 가까운 것은 네모꼴이 아니라 탈네모꼴인 것이다. 끝으로 네모꼴 글자와 탈네모꼴 글자를 비교해보았다.

글_송현(시인, 한글자형학자) , 사진_윤행석
 

탈네모꼴 글자는 초,중,종성이 일정한 모듈에 의해 배치됨에 따라 자연스럽게 네모꼴 형태에서 벗어나게 된다.

탈네모꼴 글자는 이제야 걸음마 단계를 지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그만큼 조형적으로나 기능적으로 아직 다듬어질 여지가 많다.

공병우 타자기
세종대왕기념관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