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 2.

한국의 타이포 유산2. 금석문. 전각.

한국의 타이포 유산_금석문
영평치동양문탑동(永平治東梁文塔洞)
한글이 새겨진 비문이나 금속자료는 극히 드물다.
돌이나 금속에 문자를 새긴다는 것은 오랜 시간의 풍상을 뛰어넘어 변치 않는 메시지를 남기기 위함이며, 새기는 데 드는 품과 시간 때문에 꼭 남겨야 할 중요한 메시지만 신중하게 취사선택 되었음을 생각해 볼 때, 조선시대에 한글로 된 금석문이 거의 남겨지지 않은 데는 분명히 어떤 이유가 있다.
우리는 그 이유를 역설적이게도 남아있는 극소수의 조선시대 한글 비문에서 찾아볼 수 있다.

조선 중종 때의 문인 묵재 이문건(李文楗)이 아버지 이윤탁의 묘 옆에 세운 비석인 영비(靈碑)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한글 비석이다.
묘비 전면에는 이윤탁과 그의 부인 고령 신씨를 합장한 묘임을 한문으로 표시했고, 묘비 측면에는 한글로 "신령한 비석이라 훼손하는 사람은 화를 입으리라/이는 글 모르는 사람을 위해 알리노라"라고 새겨져 있다.
또 하나의 귀중한 예로 선조의 손자로 서화가였던 낭선군 이우가 왕실 묘역 입구에 세운 4면 표석의 일부가 있으니, 비석 아랫 부분에 한글로 새긴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 비가 극히 영험하니 혹시라도 사람이 훼손치 말라."

그러니 엄밀히 말해 이 두 비는 한글로 된 비석이라 할 수 없다.
먼 후대까지 전해져야 할 비문은 물론 한문으로 새겨졌고, 혹시 그 비문의 영속성을 해칠지도 모르는 "글 모르는 사람을 위해" 새겨놓은 글자가 한글이었다.
세월을 타지 않는 영속적인 글자로 여겨진 한문에 비해, 한글은 발화의 짧은 순간을 재현하는 덧없는 입말로 비춰진 탓일까? 조선 중기의 문인 사대부들에게 한글은 진정한 의미에서 글이 아니었다.
하지만 시간의 흐름에, 또 사회의 변화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그저 자신의 영속성만을 고집하는 말과 글이란 또 얼마나 편협한 것인가.

비석에 새겨진 한글의 낯선 고어체는 이 문자가 시간과 함께 변화하는 모습을 잘 보여준다. 글씨는 마치 붓으로 쓴 듯 부드럽고, 백 년 후대의 <오륜행실도>나 <태산감응편>의 조화로운 활자에 댈만치 아름답다.

한국의 타이포 유산_전각
과거지보(科擧之寶)
문자는 쓰여지기 이전에 "새겨졌다".
종이도 필기구도 발명되기 전에, 뼈조각과 진흙판과 돌밖에 문자를 기록할 매체가 없었을 때의 일이다. 그것이 전서체가 한문 서체 중에 가장 오래된 역사를 지닌 이유이다.
전서체는 애초에 제한된 매체와 제한된 공간에 새기기 위해 만들어진 글꼴이다.

조선시대의 어보(御寶), 즉 옥새에 쓰인 문자 형태는 대부분 금나라 이후 명·청 시기까지 성행했던 구첩전(九疊篆)이었다.
구첩전이라고 하는 것은 자획을 "아홉 번 구부린다"는 뜻으로, 획수가 적은 글자도 인면(印面)에 빈틈이 없이 채우기 위해 자획을 구부려서 장식적으로 도안화한 것이다. 자연히 판독보다는 조형미가 우선시되어 원래 글자를 알아보기가 쉽지 않다.

그렇다면 '새기는 시대'에서 '쓰는 시대'를 넘어 문자를 '찍어내기 시작한 시대'에 와서야 비로소 만들어진 한글의 경우는 어떨까? 공식적으로 '한글 전서체'는 존재하지 않지만, 그것을 눈으로 확인하기는 어렵지 않다.
관공서 앞에서 10분만에 새겨주는 한글 막도장이나, 만원권 지폐에 찍힌 한국은행 총재의 관인을 들여다보면 된다. "총재의인"의 "ㅈ" 자와 "ㅣ" 자의 변형된 형태는 자획을 구부리는 한문 전서의 관행에서 유래한 것이다.
한글은 모아쓰기를 하는 연유로 글자의 윤곽이 일정치가 않다. 그것을 네모꼴 틀에 꼭 끼워 맞춘 결과는 한글이 아닌 다른 상형 문자 같은 독특한 느낌이다.

전각학회에서는 심하게 구부러지고 변형된 한글 전서가 원래 한글의 제자원리에 맞지 않음을 지적하며 '한글 글자체 되찾기' 운동에 나섰다.
그 대표적인 결과물이 훈민정음 판본체를 모델로 한 현재의 대한민국 국새이다.
한글 전서체라는 이 독특한 사생아가 버려야 할 유산일지, 아니면 참고할 가치가 있는 유산일지는 각자가 판단할 문제다.

글_편집실

영평치동양문탑동
(永平治東梁文塔洞)
인흥군묘 세장지 표석.
1686년(숙종12년).
경기도 포천군 영중면 양문리.

과거지보(科擧之寶).
보인부신총수
(寶印符信總數) 四八.
서울대 규장각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