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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 산맥, 그 무거움 그대로...
최정순 선생님을 인터뷰하러 가던 날 아침. 한글글꼴개발원에서 발행한 <한글글꼴용어사전>에 수록된 '최정순' 항목을 다시 한번 들춰 보았다.
1917년 생. 올해로 87세. "최정호와 더불어 우리나라 인쇄 서체의 양대 산맥을 형성해온 신문용 활자 서체의 개척자" 우리나라 인쇄 서체의 양대 산맥. 양대 산맥이라. 얼마나 멋진 말인가. 그러나 또 얼마나 무서운 말인가. 그를 만나러 가는 길 앞에는 이런 설레임과 두려움이 질서 없이 뒤섞여 있었다.
우리가 가졌던 '두려움'이라는 감정에는 조금 부연 설명이 필요하다. 사실, 우리는 그를 전혀 알지 못했다.
그의 이름은 알고, 그의 서체를 보았지만 여전히 그는 무언가 뿌연 막 속에 잠겨 있었다. 그리고 그 막 앞에는 언제나 최정호라는 또 다른 산맥 하나가 버티고 서 있었다.
한국 타이포그라피 역사를 서술할 때 최정호는 항상 최정순의 앞에 버티고 서 있다. 그는 이미 훌륭한 서체 개발자였다.
그에 비해 최정순 선생의 자리는 극히 불분명했다. 그의 자리는 간혹 삭제되기도 했으며, 또 간혹 아주 작게 묘사되곤 했다. 상대가 자리한 곳을 모르고서 그를 만난다는 것. 이 사실이 우리를 두렵게 했던 것이다.
인터뷰는 평소보다 더 오랫동안 진행되었다. 노구의 선생님은 자신의 자리를 꼿꼿이 지키고 앉아 우리의 질문에 기억을 더듬어가셨다.
또, 원도(原圖) 활자에 대한 이해가 적은 우리를 위해 책상 서랍 가득히 쌓인 원도와 필름들을 손수 꺼내어 하나하나 설명해주시는 수고도 잊지 않으셨다.
산맥. 녹음기에 차곡차곡 쌓여가는 선생님의 기억 속에는 분명 산맥이라는 단어의 크기에 걸맞는 무게가 가로놓여 있었다. 그가 누구인지, 그가 어떤 평가를 받아야 마땅한지에 대한 대답은 극히 조심스러운 일이지만, 그는 분명 50년이 넘는 세월을 한글 서체만을 생각하며 살아온 것이다.
그 단순한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는 산맥이라는 묘사에 전혀 모자라지 않으리라.
이 인터뷰는 서울 남산자락에 위치한 선생님의 자택에서 이루어졌다.
가짜 담배와 고무도장: 한글과의 만남
서체 개발자로서 선생님의 공식 이력은 1952년 서울신문사 주조부의 목각공으로 입사한 것으로 시작됩니다.
그 이전 활동에 대해서 말씀해주실 수 있나요?
그게 좀 우스운 얘긴데. 해방 후에, 남산에 가보면 가짜 담배를 만들어 파는 장사들이 있었거든. 보니까 나도 할 수 있겠다 싶더라구. 그래서 그 가짜 담배꼬치에 글씨 만들어 찍는 일을 했었어.
주로 ‘공작’이니, ‘백두산’이니 하는 담배들이었는데. 진짜하고 똑같이 글씨를 새겨 팔았지. 말하자면 전매청 노릇을 한거지.
말하자면 담배 위조로 활자를 처음 접하신 셈이네요. 그때 새긴 글씨는 어떻게 제작하셨어요? 혼자 익히신 건가요?
그건 고무도장으로 찍은 거야. 나하고 같이 일감을 맡아서 하던 대학 다니던 고학생이 있었는데, 그놈이 고무도장을 잘 새겼거든.
그래서 고무도장에다 ‘공작’ 표지를 그대로 베껴서 찍어낸 거지.
그럼 신문사 일은 어떻게 시작하시게 됐나요?
전쟁이 나고 부산에 피난을 갔는데 거기에 항도신문사가 있었어요. 부산으로 내려온 경향신문이 그 항도신문사 기계를 이용해 신문을 만들었거든.
그때 경향신문사와 계약을 하고 신문판매를 하고 있었는데 일거리 제안이 들어왔어. 제목으로 쓸 만한 활자가 없다고 활자주조를 좀 해보지 않겠냐고 하더라고. 항도신문 같은 지방지야 없으면 없는 대로 하는데 경향신문은 없으면 만들어 썼어야 했거든.
그런데 처음 제대로 활자를 만지다 보니까 만들어놓고 그 이튿날 신문을 보면 아주 맘에 안들 수밖에. 그래도 계속 하다보니 얼추 자리가 잡히더라구.
또 당시에 한국은행 사보를 발행하는 인쇄소도 부산에 내려와 있었는데, 거기서는 더 잔글씨들을 요구했어요. 그래서 그럭저럭 활자 조각 일을 하게 됐지.
서울신문사에 입사하셨을 때 신문용 활자들은 어떤 걸 사용하셨나요?
그때만 해도 왜정 때 사용하던 활자 자모를 거의 그대로 썼어.
서울신문 전신인 매일신보에서 사용하던 활자들 말이야. 그런데 간혹 빠진 것들이 있잖아.
대부분은 갖춰져 있었는데 제목 글씨로 쓸만한 큰 것들이 주로 없었거든. 그러면 이미 있는 활자모양을 기본으로 해서 나무로 새로 깎았지. 그걸 가지고 전태자모(電胎字母)(주1)를 만들고, 주조기에서 활자로 만들고.
최현배 선생, 자모조각기, 그리고 국정교과서.
1954년에 초기 국정교과서 활자체(이후 ‘국교체’) 개발에 참여하셨잖아요? 선생님 최초로 서체를 개발하신 일이기도 한데요. 그 일에 참여하시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당시 문교부 편수국장으로 있던 최현배 선생님이 교과서용 활자를 가지고 아주 고심을 하셨다거든.
그걸 일본에서 만들어오느냐, 아니면 기계를 들여와서 한국에서 직접 만드느냐를 말이야. 또, 만약 기계를 들여온다면 누가 그걸 감당해서 맡아볼 것이냐도 문제였지.
그런데 마침 내가 자모조각기를 연구 중이었거든. 그래서 운 좋게 일을 맡게 된거지.
조금 더 자세히 말씀해주시겠어요?
그러니까 내가 서울신문사에서 일을 하다보니까 일본에서는 이미 자모조각기를 사용하고 있더란 말이지. 그래서 ‘우리나라에도 언젠가 기계로 자모를 조각할 때가 올 것이다’라는 생각으로 혼자 연구를 시작했지.
그러다보니 '캇타홀타'라는 자모조각 바늘이 필요하더라구, 이게 1초에 8천회 정도 회전하는 건데 한국에서는 구할 수가 없었어. 그래서 문교부에 편지를 냈지. 이거 하나 일본에서 구입해주시요, 하고.
그 편지를 읽은 최현배 선생이 “마침 잘됐다. 내가 그 기술자를 구하던 참인데 니가 연구를 한다니 됐구나. 너 일본 가라.” 하신거지.
일본 어디에서 연수하셨나요?
두 달간 여러 회사를 돌아다녔지. 다이니폰 인쇄주식회사, 돗반 인쇄주식회사, 그리고 후지코시라고 자모조각기 만드는 회사.
거기서 기계에 관련된 기술을 다 배워가지고 왔어. 이임풍 선생하고, 김인형 선생하고 같이. 이임풍 선생은 당시 국정교과서 연구실 실장이었는데 영어를 잘하시는 분이었어.
사진식자기에 대해서도 이론적으로 좀 알고 계셨고.
당시에 교과서체 한글개량위원회에 위원으로 참여하셨잖아요? 그때 주로 논의되던 내용은 무엇이었나요?
최현배 편수국장이 위원장을 하고, 국문과 교수 세분, 이임풍씨, 공병우 박사가 참여하고 있었지. 나는 나중에 끼어들었고.
한 달에 한 번씩 자신들이 그린 원도들을 가지고 설명회 겸 발표회를 가졌어. 어떤게 더 조화롭냐, 균형이 맞았냐 하면서 말이야.
그때 그분들이 주로 가지고 논의하던 글씨는 바탕체보다는 돋움체, 그러니까 고딕체였거든. 그래서 내가 돋움체 만드는 데 큰 도움을 받았지.
짧은 경력에도 불구하고 국교체 개발을 성공적으로 해낸 것은 이 위원회 도움이 컸어.
국교체 개발 당시 재미있는 에피소드는 없었나요?
자모 원도라는게 일일이 정성스레 그려야하는 거거든. 바탕체건, 돋움체건 말이야.
그런데 문교부에서 6개월 동안에 자모를 다 새기고 아동교과서를 발행하라잖아. 그래서 하는 수 없이 간이방식으로 자모를 만들어냈어. 원도도 간이로 그리고 말이야.
그렇게 하니 정식 방식보다 3배는 빨리 만들어낼 수가 있었어. 일본에서 들여온 벤톤자모조각기(주2) 4대를 쉴 새없이 돌렸지.
국교체의 모델이 된 한글서체로 흔히 박경서씨의 서체가 거론되곤 합니다. 반면 모잡지에 기고한 선생님의 글에서는 박경서체가 아니라 백학성씨의 서체가 근본이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는데요
나도 당시에는 박경서체인 줄만 알았지. 그런데 십 수년 전에 유풍인쇄주식회사 사장을 만나게 되서 이 이야기를 했더니 그분이 그건 사실이 아니라고 하더라고. 그분이 14살 때부터 인쇄업에 종사했거든.
활자주조기를 손으로 돌리던 시절부터 말이지. 그분이 초전활판제조소(初田活版製造所)라고 일본인이 경영하던 회사에서 활자 심부름을 하다가 백학성씨라는 분을 만났대.
백학성씨가 당시 만든 활자 견본을 보면 그게 박경서체랑 거의 같아. 2천 몇 백자 한 벌 그대로.
그 활자 견본이 몇 년에 만들어진 건가요?
초전활판제조소에서 찍어낸 견본은 1910년 정도 될거야. 1910년에 박경서씨는 아직 애였지. 유풍 사장하고 거의 비슷한 또래라니까.
그러니까 박경서씨는 그 이후에 이 백학성체를 모델로 자모를 새겼다고 할 수 있는 거지. 5호도 새기고, 4호도 새기고 말이야.
물론 박경서씨도 분명 공로가 있는 분이지만 백학성체를 원본으로 봐야 하지 않겠냐, 그말이지.(주3)
故 최정호 선생과의 만남
이 당시의 한글 서체하면 흔히 국교체와 동아출판사 활자체(이후 동아체), 이 두 가지를 꼽잖아요? 그런 만큼 동아체를 개발하신 故 최정호 선생님(1916-1988)과의 관계에 대해 여쭙지 않을 수 없는데요. 당시 두 서체에 대한 평가는 어땠나요?
최형은 원래 평판인쇄용 글씨를 쓰던 사람인데, 대구에서 인쇄소 사업도 했고. 1955년 동아출판사 일을 하면서 서체 개발을 시작했지.
당시에는 동아체보다 국교체에 대한 평가가 좀 더 나았던 것 같아. 비록 급하게 6개월 만에 만들어낸 것이긴 하지만 말이야.
그래서 평화당 일도 하게 되고 그랬지. 지금와서 국교체가 덜 주목받는 것은 아마 교과서에만 쓰이고 다른 데에는 안 쓰여서 그렇지 싶어.
선생님이 평화당 일을 하실 때 故 최정호 선생님은 삼화인쇄소 일을 하셨는데요. 당시 같은 서체 개발자로서 교류는 없으셨나요?
그 일이 사실은 이렇게 된 거야. 내가 국정교과서에 다닐 때 평화당에서 글씨체를 좀 써달라고 의뢰가 왔어. 그래서 평화당일을 하고 있는데 삼화인쇄소에서 또 연락이 왔어.
삼화인쇄소 사장하고 평화당 사장은 서로 남매지간이야. 그래서 사장 집으로 찾아갔더니 우리 글씨도 좀 써주지 않겠느냐고 그래. 그래서 난 평화당하고 예약이 돼있어서 안되겠다고 했지. 그랬더니만 3만원을 수표로 써주고는 택시 불러서 밀어넣잖아.
평화당하고 구두계약으로 다른 데는 해주지 않기로 했거든. 그래서 어떻게 해. 원도를 한부 가지고 최형을 찾아갔지.
삼화인쇄소 일을 부탁하시러 직접 만나신거예요?
그럼. 당시 최정호씨는 남대문경찰서 자리 근처 모퉁이에 있던 張타이프사에 사무실을 얻어 가지고 사진식자 선전하고 그랬을 때거든. 동아출판사 글씨도 한 벌 다 써주었을 때지.
최형을 만나서 나는 평화당 일을 하기로 했으니 삼화인쇄 일은 할 수가 없다. 내 계약금으로 3만원을 받았는데 이걸 받고 삼화인쇄 일을 좀 맡아주시오, 그랬지. 내가 가지고 간 원도를 보여주면서 말이야.
그 후에 최형은 보진재 일도 하고, 사진식자일도 많이 하고 그랬지. 신명조체도 만들고 말이야.(주4)
지금까지 알려져 있던 것과는 많이 다르네요.
이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은 믿질 않아. 삼화체는 최정호씨가 혼자 개발한거다라고 믿는거지.
내가 계약금 받은 것을 다 줬다는 얘기도 믿질 않고.
두 분이 같이 작업하셨다면 좋았을텐데요.
최형하고 사이는 좋았어. 만나서 차도 마시고... 그런데 그분은 술을 잘했거든. 나는 술을 잘 못했으니 그리 잘 어울리지는 못했지.
신문용 활자와의 긴 인연
국교체 개발 이후 주로 신문사 활자체 개발에 힘을 기울이셨는데요. 1962년 한국일보를 시작으로 여러 신문사의 활자를 개발하셨습니다. 특별히 신문사 활자에 관심을 기울이시게 된 계기라도 있으셨나요?
아무래도 내가 신문사 일로 시작을 하기도 했고...
또 당시 인쇄소들이 어떻게나 인색한지 수금을 하려면 아주 사람 미쳐요. 돈을 안줘. 그래, 아무래도 신문사가 좀 낫지 싶어 그렇게 됐지.
그 중 가장 기억에 남았던 작업을 꼽으신다면요.
아무래도 중앙일보 창간 작업한 거겠지. 그때 최초로 신문용 활자를 전량 납품했거든. 자모 5만종을 말이야.
62년부터 65년까지 3년을 작업 했다구. 한글 한 벌을 만들려면 거의 2천자를 써야 하는데, 맘에 안 들어서 몇 번을 다시 썼어. 그러다 다 늙었지, 뭐.
그리고 한국일보에 화재가 나서 자모들이 많이 소실됐을 때 그것들 보충해준 것도 있고. 그게 1968년인가 그랬는데, 당시 내가 자모공장을 직접 운영하고 있었거든.
공장에 갖추고 있던 자모 원도를 가지고 재빨리 작업을 했지. 동직공장인가 하는데 하고 동시에 말이야.
당시 경영하시던 자모 공장의 운영은 어땠나요?
중앙일보 작업하고 그랬을 때는 꽤나 괜찮아서 기계도 몇 대 더 사고 그랬지.
그런데 결과적으로는 망했어. 자모값들을 너무 안쳐주고, 그냥 헐값에 빌려가고들 했으니까. 다 내 영업술이 없었던 탓이지.
이후에 경제적으로 어려워지면서 원도들도 거의 다 팔았어. 남은 건 원도 필름들 뿐이야.
자모공장을 운영하시던 당시에는 일본제 자모조각기뿐만 아니라 서독제도 들어와 있었잖아요? 그 기계들의 특성이 많이 달랐나요?
평화당 일을 할 무렵부터 서독 자모조각기도 수입돼 있었지.
당시에 일본이 좋네, 서독이 좋네 업자들끼리는 말이 많았어. 두 기계는 바늘 끝 모양이 달랐거든. 그러니까 글자 맛도 다를 수 밖에 없었지.
개인적으로는 서독기계에서 나온 결과가 좋았는데. 반면 일본 자모조각기는 더 오래 쓸 수 있었어
1989년에 내외경제신문 활자체도 제작하셨잖아요? 한국일보 작업부터 따지자면 거의 27년간 신문용 활자를 만드신 셈인데, 그 동안의 변화라면 무엇이 있을까요?
62년에 처음 했을 때는 글씨가 무척 작았어요. 그러던게 점점 커졌지. 80년대 초반에 한국언론연구원에서 비용을 대줘서 신문 본문 서체를 키우는 연구도 했어요.
그리고 89년에 작업한 거는 가로전용이잖아? 그렇게 점차 세로쓰기에서 가로쓰기로 변하기도 했고. 이래저래 신문 본문용 자모만 10번 가까이 바꿔 제작했어.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C.T.S.(computerized typesetting system)라고 컴퓨터를 이용해서 신문을 제작하게 된 거겠지.
쓰고, 깎은지 이제 50년
선생님께서 한글과 인연을 맺은지도 50년이 되었습니다. 선생님께서 생각하시는 한글, 한글 서체란 무엇인가요?
사람의 얼굴을 봐요. 요만한 면적에 눈하고 입만 달라도 아주 감정이 달라지잖아. 우리 한글도 얼굴과 비슷해. 초중종성을 모아서 써야 하니까.
그러니까 한글도 작은 면적에서 재간을 얼마든지 부릴 수 있단 말이야. 같은 얼굴이 하나도 없듯이. 그런데 그게 쉽질 않아.
또 한글은 알파벳과 다르게 획 하나가 있느냐 없느냐가 의미를 다르게 하는 글자야. 'ㅏ' 다르고 'ㅓ' 다르다고 하잖아.
그 획 하나하나에 힘을 주느냐 빼느냐를 잘 결정해야 돼. 그게 생명이야. 그래야 잘 읽히고 보기도 좋지.
선생님도 컴퓨터용 서체 개발에 참여하셨지만, 이제 한글은 쓰는 것이 아니라, 찍어내는 어떤 것으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서체 개발에 더 이상 손조각을 하지 않아도 되는 시대이기도 하구요. 새로운 한글 환경에서 서체를 개발하고 있는 후배들에게 한 말씀 해주신다면.
내가 왜정 때 소학교를 나왔는데, 그때는 연필글씨, 펜글씨들을 참 멋있게들 잘 썼어.
아무리 컴퓨터를 이용해서 서체를 개발한다고 해도 원도는 직접 그려야 하지 않겠어? 원도가 실체화된 것이 서체라고.
손을 잘 놀리는게 중요해요. 요즘엔 손으로 자모를 깎는 일은 없지만, 일본의 서체 역사를 봐도 직접 원도를 그리고, 손조각으로 자모를 파던 사람들이 결국 좋은 서체를 개발한단 말이야.
마지막으로 한글 서체에 대한 바람이 있으시다면.
일단 한글 서체에 투자가 많이 이루어졌으면 좋겠어.
서체 한 벌을 제대로 만들려면 비용이 만만치 않거든. 먹고 살아야 서체도 만들고 그러는거 아니겠어? 그리고 요즘엔 죄다 들 제목용 글씨만 만드는데 본문용 글씨가 좀 개발돼야 해.
탈네모꼴도 좋지만 그것은 아직 본문에는 적합하지 않으니까. 나 개인적으로도 아직 욕심이 있지.
한글 서체를 많이 개발했다고는 하지만 거의가 다 가공 수준에서 멈춘 것 같아.
비록 잘 못생긴 글자라 해도 힘찬 것, 정다웁게 보이고 자연미가 엿보이는 그런 글꼴을 만들어보고 싶어. 비록 실용화되지 못할지라도 말이야.
[주]
1_전기 주조에 의해 원형의 모형을 떠서 만든 활자 자모, 전주자모(電鑄字母)라도고 한다. 최초의 한글 전태자모는 1880년에 간행된 <한불자뎐>에 쓰였던 최지혁체이다.
2_활자 자모 또는 펀치(punch) 자모를 직접 금속 재료에 조각하는 기계. 1885년에 개발되었으며 우리나라에는 1954년 국정교과서 개발 당시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3_박경서체의 모태가 된 것이 백학성체라는 선생님의 증언은 아직 공인된 사실은 아니며 현재 남아있는 자료와 증언이 부족해 확인이 어렵다. 백학성씨는 조선 후기의 활자 조각가로 시기가 앞서는 것은 확실하나 그의 글꼴과 박경서체와의 관계는 더 많은 연구를 요한다.
4_故 최정호 선생과 삼화인쇄소 건에 대한 이 증언은 현재 확인이 불가능한 상태이다.
글,인터뷰_김형진,양효경 / 사진_박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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