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 1. 쓰기와 누르기

한글 타이포그라피와 도구의 역사.

타이포그라피의 역사는 필기구의 역사인가?
한글 활자의 최초 모습을 보여주는 <훈민정음>의 곧고 두터운 글자체와 당신의 컴퓨터 속에 저장되어 있는 트루타입 폰트들을 비교해보라.
이 차이들이 말해주는 것은 무엇일까? 이 질문에 대해 "시대의 변화에 따른 조형적 미감의 차이"라고 답하는 것은 맞긴 하되, 너무나 엉성한 대답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그 조형적 미감의 차이를 가져오게 한 것은 과연 무엇일까?
여기에는 많은 정답들이 차례로 줄을 서게 될 것이다. 시각문화의 차이, 한글 자형 자체의 변화, 책이라는 형태의 변화, 세로쓰기에서 가로쓰기로의 변화 등등.
그리고 우리는 여기에 글씨를 쓰는 도구, 즉 필기구의 변화를 더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이유, 필기구의 역사가 타이포그라피의 역사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일견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로 들린다.
붓과 컴퓨터는 감히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다른 미디어이고, 이 둘을 통해 완성된 글자체 또한 그만큼 다른 논리의 공간 속에 놓여있기 때문에, 이들을 통해 산출된 글씨의 모양이 같을 리 없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붓을 통해 쓴 '디자인'이라는 글씨와 컴퓨터를 통해 조합된 '디자인'이라는 단어는 비록 같은 소리와 같은 뜻으로 읽힐지는 몰라도, 그 사이에는 먹물과 스크린의 인광물질만큼이나 다른 조형 논리가 숨어있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타이포그라피의 역사에 필기구의 역사가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인가, 하는 질문에는 선뜻 대답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필기구의 변화는 확실히 타이포그라피 형태에 돌이킬 수 없는 영향을 주긴 하지만, 붓과 컴퓨터 사이에 놓인 차이만큼 활자체 또한 변해왔다고 확언하는 것은 분명 과장된 부분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컴퓨터에서 붓을 유추해낼 수는 없지만, <훈민정음>의 자형(字型)에서 현재의 한글 글꼴 형태의 희미한 그림자 정도는 읽어낼 수 있다.
'한국 타이포그라피 사건사'의 첫번째 사건으로 필기구의 변화를 드는 것은 한글의 현재적 모습을 보여주는 한글 타이포그라피, 그리고 한글을 구현하는 데 필수적인 미디어 역할을 수행해온 필기구. 이것들이 맺어온 역사적 관계를 살펴봄으로써 타이포그라피를 변화시키는 한 가지 유효한 힘을 확인할 수 있으리란 기대 때문이다.

한글, 붓이라는 물질에 적응하다.
초기 한글 자형의 변화를 살펴본다는 것은, 곧 그 형태가 붓이라는 도구와 어떤 대화를 나누었는지를 파악하는 것과 같다.
한글은 지극히 정신적인 논리에 의해 창안된 정신문화의 일부분이었지만, 그것은 또한 붓으로 종이 위에 쓰여지고, 활자를 통해 인쇄되어 읽혀야만 하는 물질문명의 일부였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한학자이자, 역사학자였던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 선생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 바 있다.

훈민정음을 비롯하야 월인천강지곡을 날로한 석보상절 같은 배 가장 두렷하니 문자 예롭고 장중하야 태를 아니 보이고 규구로만 쓰은 전차로 저 은주고전과 같아 부르고 빤 획이 없고 삐치고 어슷하는 모양을 만드지 아니 하얏더니 나려 오며 여러 손을 지나 비로서 필법이 생기어 정자 흘림 두체 되니 비컨대 진한 이래 예서와 해초있게 된 것과 같다. 주1)

즉, 조선시대 한글 자형의 역사를 점차 "필법"이 생겨나간 역사, 그러니까 붓이라는 재료에 적응해가는 과정으로 파악한 것이다.
그리고 이런 평가는 조선시대 한글 서체와 활자꼴을 연구하는 학자들 사이에 공통된 것이다. 주2)
그만큼, 당시 한글의 형태는 붓이라는 도구와 떨어뜨려놓고 생각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조금 더 구체적으로 들여다보자. 창제 초기의 한글꼴은 어떤 방식으로 붓에 적응해 간 것일까?
잘 알려져 있는 바, 창제 초기의 한글 자형은 <훈민정음>이나 <동국정운>에서 보이는 것처럼 엄격한 기하학적 형태를 띠고 있었다.
세리프가 전혀 가미되지 않은 수평, 수직선, 원, 그리고 점들. 학자들은 이런 고졸한 모양에 대해 중국 한자의 전서체(篆書體)의 영향이라고 설명하고, 전서체가 "제왕의 권위와 위엄을 상징하기 알맞은 서체"라는 이유를 덧붙인다. 주3)
그러나 이것은 앞뒤가 전도된 설명이기 쉽다. 한글의 창제원리에 걸맞게 쓰다보니 기하학적인 전서체의 형태와 유사해진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유야 어떻든, 결과적으로 창제 초기의 한글꼴은 강약과 굵기를 자유자재로 조절할 수 있는 부드러운 붓의 성질과는 걸맞지 않은 형태를 가지고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

그러나 이러한 한글 자형이 붓의 성질에 맞게 변형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반포 후 4년 뒤에 간행된 <용비어천가>, <월인천강지곡> 등에서는 초출자와 재출자의 점이 획으로 변화하였으며, 세조 때 간행된 <월인석보>에서는 아래 아(·)마저 하나의 획처럼 길어지면서 한글에서 원점의 형태는 모두 사라지게 되었다. 기하학적 원점이 붓의 속성에 걸맞게 획으로 변화한 것이다.
이어 성종대에 간행된 <분류두공부시언해>에서는 해서의 필법과 유사하게 변해갔으며, 숙종대에 이르러서는 오늘날까지 한글 서체의 대표적 형태로 인정받고 있는 '궁체'로까지 발전해 갔다. 주4)
즉, 반포이후 200여년 남짓의 기간은 한글이 붓이라는 미디어를 만나, 이에 적응해간 역사였던 것이다.

펜은 붓을 밀어내고 한글과 대화할 수 있었을까?
이 나라가 근대의 문턱을 넘어서는 순간, 붓은 자신의 헤게모니를 펜이라는 철의 도구에게 넘겨주어야만 했다. 즉, 근대가 개막하면서 한글은 더 이상 붓으로만 쓰여 지지 않았으며, 자연스럽게 한글 활자체와 붓과의 직접적 연관성도 사라지게 되었다.
우리는 당시 가졌던 펜의 새로운 헤게모니를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일제시대 제일의 문장가 중 한명으로 인정받았던 이태준은 「필묵」이라는 수필을 통해 "지금 이 글을 쓰는 것도 만년필이다. 앞으로도 만년필의 신세를 죽을 때까지 질지 모르나, '만년필'이란 그 이름은 아무리 불러도 정들지 않는다" 라며 붓을 밀어내고 자신의 손에 쥐어진 새로운 도구에 대해 민감한 위화감을 표시한 바 있다. 주5)
이렇듯, 당대의 지식인들은 붓이 아닌 펜을 쥔 인물로 그려지곤 했다. 1932년 잡지 『동광』에 실렸던 현진건의 캐리커쳐가 노골적으로 보여주듯이 말이다.

그렇다면, 붓의 자리를 차지한 펜은 한글꼴에 대해 과연 붓만큼의 영향력을 가질 수 있었을까? 펜이라는 물질은 자신만의 속성을 한글꼴의 형태에 깊이 각인시킬 수 있었을까?
이에 대한 세밀한 연구가 필요하겠지만, 근대의 펜은 붓이 형성해놓은 한글꼴의 기본 형태를 크게 변화시키지 못했다고 말할 수 있을 듯 하다.
한글 활자체 변천의 역사에 대해 연구한 故 김진평 교수는 새활자 시대(1864-1949)로 분류되는 이 시기의 대표적 활자들, 즉 최지혁체, 한성체, 성서체, 박경서체 등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기본적으로 붓글씨의 성격을 강하게 지니고 있다고 서술하고 있다. 주6)
붓은 필자들의 손에서는 떠났지만 인쇄된 종이 위에서는 아직 자신의 그림자를 거두지 않은 것이다.
단, 1933년 동아일보의 본문활자체로 채택된 이원모체가 강한 직선의 형태를 가지며 붓글씨와는 다른 형태미를 보여주었지만, 이는 펜의 직접적인 영향에 의해서 라기보다는 오히려 중국 한자의 명조체 표현을 차용한 것이었다.

펜은 왜 활자의 영역에서 붓을 제압하지 못했을까? 500넌 가까이 한글과 대화해온 붓에 비해 100여년 남짓한 펜의 역사가 너무 짧았기 때문일까?
아니, 창제 직후 그 형태가 붓에 급속히 동화되온 한글꼴의 역사를 생각한다면 시간이라는 변수는 그다지 결정적이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활자라는 물질 자체가 지닌 형태적 보수성, 그러니까 그것의 재료인 동이나 납만큼이나 단단하게 고정되어 쉽게 변화하지 않는 글꼴의 보수성에 그 원인이 있는 것일까?
아니면 한글 자체의 자형이 펜보다는 붓에 더 가깝기 때문인 것일까?

오히려 이 시기에 새로운 활자의 가능성을 열어준 것은 1920년 재미교포 이원익에 의해 개발된 5벌식 한글 타자기였다.
이것은 미국 스미스사의 영문 타자기에 한글 활자를 갈아 붙여 제작된 것으로써, 가로로 찍어 세로로 읽는 특이한 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어 1930년에는 선교사 언더우드가 2벌식 타자기를, 같은 해 송기주는 4벌식 타자기를 개발하게 되었다.
타자기는 그 자체의 간격에 의해 독특한 형태의 한글꼴을 만들어주었고, 이러한 의도하지 않은 새로운 활자체는 이후 네모꼴의 한글 기본형을 넘어서는 탈네모틀 한글 타이포그라피의 기본을 형성하는 데 큰 역할을 하게 되었다.
또한, 타자기의 발명은 활자를 치는 행위와 동시에 그것이 시각적으로 구현되는 새로움을 지니고 있기도 했는데, 이는 필연적으로 활자와 그것을 부리는 주체 사이의 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디지털 글쓰기와 한글의 비물질화.
마지막으로 우리는 디지털 글쓰기, 즉 컴퓨터를 매개로 한 글쓰기는 한글의 형태에 어떤 유의미한 변화를 가져오고 있을까에 대해 물어야 한다.
흔히 디지털 글쓰기는 글을 쓰는 주체에 돌이킬 수 없는 변화를 가져오게 한 동력으로 인정되곤 한다.
즉, "종이에 손수 쓰거나 타이프라이터가 두드린 불활성의 잉크 흔적은 바꾸거나 지우기가 쉽지" 않아 글쓰기 자체가 저자의 사고만큼 유연하지 못한 반면, "컴퓨터 글쓰기는 생각을 글자로 표현하면서도 다시 그것의 수정, 삭제를 가능하게" 하기 때문에 "공간적으로 가변적이며, 시간적으로 동시적이란 의미에서 정신의 내용이나 구어와 아주 유사한" 방식을 띄게 된다는 것이다.
<그라마톨로지>를 쓴 데리다와 같은 철학자는 컴퓨터 글씨기가 가져온 이러한 변화에 대해 데카르트적 주체가 해체되어 가는 과정이라고 서술한 바도 있다. 주7)

그렇다면, 글을 쓰는 주체에 그토록 결정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디지털 글쓰기는 활자체에도 그에 버금가는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 것인가? 지금도 현재 진행형으로 변화 중인 이 과정에 대해 확언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컴퓨터라는 미디어의 특성에 대한 일반적 서술과 함께, 이것이 지금껏 가져온 변화에 대해 알아보는 정도에 그치기로 하겠다.

우선, 고려해야 할 것은 컴퓨터라는 도구는 붓이나 펜과 수평적으로 비교할 수 있는 필기구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붓이나 펜은 모두 글을 쓰기 위해 고안된 것임에 비해, 컴퓨터의 기원은 글쓰기와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 그것은 수리도구로 고안됐으며, 지금의 워드프로세서 프로그램은 단지 그것의 한 응용된 형태에 불과할 뿐이다.
컴퓨터가 글쓰기의 기원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은 활자의 형태와 관련할 때 지극히 중요한 요소가 된다. 붓이나 펜은 모두 자신의 재료에 걸맞는 글꼴을 자연스럽게 배태할 수 있는 반면, 컴퓨터는 글꼴을 제어할 수 있는 어떠한 물질적 성질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붓이나 펜과는 달리 컴퓨터에 의해 형성된 글자는 임의 접근 기억장치인 램에 포함된 아스키 코드의 허구적 재현물에 지나지 않게 된다. 이제 글꼴은 자신의 물질적 기반으로부터 떨어져 나가게 된 것이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타이포그라피는 이제 필기도구의 물질적의 특성에 상관없는, 완전히 자유로운 지평에 들어서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자유는 아직 그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다.
많은 컴퓨터 전용 트루타입 서체들이 개발되었지만 그것들은 아직 붓글씨의 잔영을 완전히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다. 디지털의 논리는 아직 붓의 부드러움을 제압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다만 그 가능성들을 흘끔흘끔 엿볼 수 있을 뿐이다.
오히려 현재까지 디지털 글쓰기가 활자의 영역에 가져온 가장 커다란 변화는 하루에도 수십 개씩 새로 고안되었다 사라지는 이모티콘의 등장이라고 볼 수 있을지 모른다.
이모티콘은 음성의 기록이라는 글씨의 정의를 넘어, 기호들 자체를 감정 표현의 효과적인 도구로 전용한 가장 혁신적 예의 하나이다. 그것들은 음성에 구애되지 않고, 오로지 기억장치에 입력되어 있는 기호들의 형태 자체에만 제한 받는다.
글꼴은 이제 음성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자신의 기원을 망각하는 페티쉬적 생명력을 지니게 된 것일까? 한글 타이포그라피는 이제 물질적 제약과 음성적 제약, 양자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축복된 영역으로 들어서고 있는 것일까?

타이포그라피라는 물질.
타이포그라피와 필기도구 사이의 관계를 묻는다는 것은, 타이포그라피를 어느 공간에 위치시킬 것인가 하는 질문에 대답하는 것과 같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답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타이포그라피를 필기도구와 함께 물질문명의 공간에 위치시키는 것도 그 중 한가지로 꼽힐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필기구의 물질성에 제한받으며 성장하는 미디어로서 말이다. 심지어, 그 필기구의 물질성이 의심받을 때 활자는 그 비물질성에 화답하는 형태로 우리에게 돌아오게 되듯이.

다시 한번 이야기하지만, 타이포그라피는 물질이다. 그리고 글꼴이 어떠한 형태를 가지게 되는가는 이 물질이 어떤 물질들과 만나고 대화할 수 있는가에, 그리고 글을 부리는 우리가 이 물질의 역능을 어떻게 꽃피워줄 수 있을까에 달려있다.
암튼, 물질은 진화한다. 그것이 원숭이가 될지, 코끼리가 될지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

글_김형진(객원기자) , 사진_윤행석
 

붓이 한글에 강약과 리듬을 선사했다면,
자판은 한글에 물질로부터의 자유를 선사했다.
하지만 그 자유가 한글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

주
1. 김충현,
<우리 글씨 쓰는 법>,
동산출판사,
1983,
pp. 20-21.에서 재인용.

2. 창제 당시의 한글 인쇄용 서체, 즉 활자꼴은 특별히 판본체(版本體)라고 불려지기도 한다.
이것은 창제 당시의 한글꼴의 형태를 짐작할 수 있는 유물이 오로지 인쇄물로만 현존할 뿐, 직접 붓으로 쓴 것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판본체에 대한 정의, 역사를 위해서는
박병천,
<조선초기 한글 판본체 연구>,
일지사,
2000.을 참고.

3. 또한, 전서체는 한자의 초기 서체였으므로 한글의 초기 서체 또한 전서체로 쓰여진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말한다.
박병천,
<조선초기 한글 판본체 연구>,
pp. 50-51.과 1994년 예술의 전당 서예관에서 펴낸 <조선시대 한글서예>에 수록된 윤양희의 논문을 참고.

4. 이러한 한글 서체, 활자체의 변화에 대해서는 위에 인용한 윤양희의 논문을 참고.
궁체로의 변화에 대해서는 같은 책에 수록된 김세호의 논문을 참고.

5. 이태준,
<무서록>,
범우사,
1993, p. 88.

6. 김진평,
'한글 활자체 변천의 사적 연구',
<고 김진평 교수 추모 논문집>,
1999,
pp. 134-143.을 참조.

7. 마크 포스터,
'데리다와 전자 글쓰기',
<뉴미디어의 철학>,
민음사,
1994,
pp.190-211.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