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뢰
2002년 1월, 디자인 전문회사 212는 국내 로봇업계에서 상당한 인지도를 얻고 있는 유진로보틱스로부터 흥미로운 제안을 받는다.
유치원에서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교육용 로봇 페가서스(Pegasus).
세 살 아이 정도 크기인 이 로봇은 적외선 센서와 바퀴를 사용해 집 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유치원에서 초등학교에 다니는 유아를 대상으로 인터랙션이 가능한 교육 프로그램을 제공할 예정이었다.
주된 입출력 장치는 음성과 화상으로, 어린아이의 언어수준에 맞는 간단한 명령을 소화할 수 있으며 필요시 자체에 내장된 프로그램뿐만 아니라 원거리 화상교육을 제공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즉 가정에서 어린이가 선생님의 대답을 요하는 질문을 할 경우 LCD 화면을 통해 바로 교육센터로 연결시켜주는 것이다.
또 음성 인식으로 학습자를 찾을 뿐 아니라 장애물 인식, 문턱넘기도 가능하고 팔과 머리, 표정을 이용한 감정표현도 비교적 자유롭게 설계되었다.
몇몇 사례가 있긴 하지만 당시 이러한 교육용 로봇은 아직 개발 단계에 머물러 있던 분야로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다소 생소한 개념이었다.
당연히 교육용 로봇은 어때야 한다는 프로토타입 자체도 없는 상황이었으며 시장에서의 성공은 더더욱 미지수였다.
하지만 앞으로의 성장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페가서스 개발에 착수한 유진로보틱스는 어느 정도 기본적인 매커니즘이 완성된 2002년 1월, 본격적인 디자인을 212에 의뢰하기에 이른다.
증언
문제는 여러 곳에 산재해 있었다. 먼저 디자인을 맡은 212 측으로서도 장난감 수준을 벗어난 본격적인 로봇 디자인을 진행하기는 이번이 처음이었기 때문에 해당분야에 대한 참고자료나 경험이 부족했다.
더욱이 처음부터 제품개발에 참여한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뼈대가 잡힌 메커니즘에 디자인을 입히는 상황이다 보니 제약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 디자인에 참여한 한 디자이너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해당분야에 대한 깊이 있는 지식이나 정보가 부족해 초기부터 어려움이 많았던 프로젝트이다.
특히 메커니즘의 스팩이 정해져 있는 상태에서 팔의 관절부위나 구동범위 등의 요소가 디자인에 대한 제약으로 다가왔고, 전문용어와 생소한 센서 등의 위치가 고정된 상황에서 디자인을 풀어나가기가 쉽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가전이나 통신기기와 같은 타 전자제품군의 경우 작은 요소를 부각시켜 디테일을 살리는 방향으로 디자인을 풀어나갈 수 있는데 이 프로젝트는 다른 성격의 요소가 자리잡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모두에게 생소한 제품을 디자인할 때의 딜레마는 아무도 정답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경우 해답은 다른 곳에 있었다.
위에서 다소 모호하게 표현된 다른 성격의 요소. 이에 대한 정확한 판단을 내리고 있었던 김진화 디자인팀장의 당시 기록을 살펴보자.
"이번 프로젝트는 교육용 로봇이라는 새로운 캐릭터를 창출해야 하는 상당히 난해한 아이템으로 담당 디자이너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든 프로젝트였다.
이 같은 아이템을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을 가지고 재미있게 즐기며 체크하고 정리해야 하는데 주어진 시간이 너무 짧다 보니 스트레스도 많이 받고 디테일에 대한 아쉬움도 많이 남는다."
협상#1
앞에서 살펴본 증언에서 알 수 있듯 페가서스 프로젝트에 있어서의 디자인협상은 중요한 두 가지 측면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 중 하나는 이미 개발이 완료된 메커니즘을 토대로 이를 최대한 살릴 수 있는 디자인이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나머지는 하나의 캐릭터로서 교육용 로봇을 어떻게 아이덴티티화 시키는가에 대한 문제이다.
이 중 프로젝트의 성패를 가름하는 요소, 무엇보다도 당면한 과제는 교육용 로봇이란 새로운 캐릭터를 창출하는 것이었다.
협상의 과정은 대개 그러하듯 넓은 곳에서 좁은 곳으로 이행되었다. 먼저 212측은 제품의 컨셉으로 3F를 제안하였다.
3F란 Fun, Friendly, Fantasy로 어린이에게 친구처럼 다가갈 수 있는 로봇이어야 한다는 것이었고, 이를 이번 프로젝트의 중심으로 삼았다.
다음으로 기존의 팔을 아에 없애버린 것에서부터 Fun의 느낌을 강조한 것, Fantasy의 느낌을 강조한 것 등 메커니즘에 구애받지 않은 다소 자유로운 아이디어 스케치를 통해 넓은 범위에서 컨셉 검토에 들어갔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컨셉이 어느 정도 좁혀진 다음에는 기능을 고려하며 제출된 안을 구체화시켜 나갔다. 이 과정에서 디자인적 요구가 이미 명확히 나와있던 메커니즘과의 협상은(물론 어려움이 많았지만) '캐릭터만들기'에 비해 무리없이 진행될 수 있었다.
먼저 페가서스의 외관은 내부의 복잡한 구조를 커버함과 동시에 양산에 용이하도록 가능한 적은 Piece를 유지해야 했으며 팔과 목, 버튼 등이 도킹 시스템으로 이루어져 있는 점을 고려해 모듈화를 통한 탈착이 용이하도록 하였다.
센서나 LCD, 안테나 등의 부분에 있어서는 A/S가 용이하도록 디자인했으며 특히 팔의 경우 고장이 잦을 수 있는 부분이기 때문에 이에 대한 고려도 이루어졌다. 그 밖에 LCD 화면의 크기와 각도 등 고려해야 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또 한가지 무시할 수 없는 것은 이동 중 안전에 관한 것이었다. 여기에는 로봇의 안전과 로봇으로부터의 안전 두 가지가 있는데 특히 유아용 로봇이기 때문에 모든 모서리를 둥글게 처리하였으며 이동 시 무게중심을 잃지 않도록 밑부분을 넓게 해 안정감을 주었다.
협상#2
이와 달리 협상의 또 다른 측면, '캐릭터만들기'는 난항을 거듭하였는데 여기서 페가서스 프로젝트의 중요한 국면을 살펴볼 수 있다.
유진로보틱스는 디자인의뢰 당시 리서치를 통해 상당한 양의 기초자료를 제시하였으며 요구하는 캐릭터에 대해 어느 정도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머리 속에 가지고 있는 이미지와 실제 그것을 구현시키는 것은 다르기 마련이어서 디자인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상대적으로 친근한 느낌을 강조하다 보니 로봇이란 첨단 제품이 가진 하이테크적인 느낌이 부족하다며 우려를 표하는 사람도 있었고, 남자나 여자의 느낌보다 이를 모두 포괄하는 중성적인 캐릭터를 지향하다 보니 상대적으로 캐릭터 얼굴에서 느껴지는 표정의 다양함이 약해질지도 모른다는 의견도 있었다.
이러한 난항은 프로젝트가 끝나고 실제 제품이 나오기 전까지 계속 이어졌는데, 실제로 최종안이 결정되고 나서 직접 제작에 들어간 다음에도 한동안 머리 부분에 대한 디자인이 계속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212가 취한 방법은 소위 컨셉의 '중심잡기'였다.
아직 검증되지 않은 제품을 두고 딱 집어 정답이라고 할 수도 없는 판에 신중을 기하는 목소리가 높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여러 목소리에 휩쓸리다 보면 정작 프로젝트가 엉뚱한 곳으로 흘러가버릴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양한 의견은 수용하되 애초에 기본이 되는 컨셉은 대화와 설득을 통해 일관되게 유지하는 것. 이것이 페가서스 프로젝트에 있어 가장 중요한 관전 포인트가 되었다.
과제
실제 완성되어 나온 페가서스는 우려의 목소리와 달리 깔끔한 캐릭터를 선보이고 있다.
기존 메커니즘과의 조화는 물론 기능적으로 부족한 면을 충실히 보완해주고 있으며, 기본 컨셉에 맞는 친근한 이미지를 보이면서도 하이테크적인 느낌을 주는 세련된 라인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페가서스는 실제로 양산에 들어가지 못한 상태이다. 제품에 있어 개선해야 할 점도 남아있거니와 시장상황, 가격여건 등 아직 해결돼야 할 문제가 산적해 있기 때문이다.
험난한 개발 과정과 그에 못지않은 디자인 과정을 거쳤건만 아직 넘어야 할 산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현실.
디자인이 헤쳐나가야 할 가장 힘든 협상 대상 중 하나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정용 로봇이란 아직 초기 단계에 있는 디자인 분야에서 페가서스는 하나의 좋은 프로토타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글, 인터뷰_박활성기자 / 사진_윤행석 / 자료제공_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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