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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 속을 조용히 걷고 있을 때 누가 나를 보지도 않고 부르지도 않지만 그 때 내 안에서 나의 걸음을 이끌어가며, 나의 생각을 돕고, 나를 반성하게도 하며, 분노하게도 하며, 나를 원망하게도 하는 가운데 몸 속에서 나를 보고 있는 진정한 ‘나’를 만나게 된다.
그래서 인간은 혼자만의 시간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기회에 자신의 소중함을 알게 되고, 자신이 원하던 길에서 얼마나 멀어져 있었는지도 깨닫고 자신의 형상을 보게 되고 정체성에 대하여 생각하게 된다.
시간은 모든 것을 파괴한다. 또는 ‘오늘은 어제의 오늘과는 다른 오늘이며 내일은 오늘과 다른 날이다’라는 말이 뜻하는 바와 같이 디자이너는 늘 새로운 오늘을 위하여 미래를 내다보며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이다.
이러한 디자이너들에게 가파르게 변하는 사건의 시간 속에서 바쁘게 살다 보면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나의 디자인이 시대성을 잃고 사건 속에 묻혀 ‘나’를 잊고 지내게 되는 것이 보통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미래에 대하여 스스로에게 기대하는 것이 있고, 성취하려는 목표가 있으므로 디자이너가 나의 디자인 정체성은 어디에 있으며, 어디로부터 오는가를 생각하게 된다면, 그에게 불안한 어떤 위기감이 먼저 느껴올 것이다.
그러나 다른 측면에서 생각해 본다면 더 높은 곳으로 뛰어 오를 수 있는 위치에 스스로 와 있거나, 아니면 그것을 생각할 만한 정신적 지위와 경험, 지혜를 갈망하는 리더십을 발휘할 위치에 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디자이너로서나, 디자인 교육을 담당하는 교수나, 나아가 기업의 경영자들 그리고 정책을 입안하고 수행하는 사람들이 먼저 갖추어야 할 덕목은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이는 자신의 정체성이 한국인의 정체성과 깊은 관계가 있는 위치에 와 있기 때문이다.
나의 디자인 속에 한국 디자인의 정체성이 있으며 한국의 디자인 속에 나의 디자인 정체성이 있다. 그러므로 내가 나의 정체성에 대하여 관심이 생기는 것은 이미 그가 생각하고, 판단하며, 행동하는 행위에 대한 ‘책임적 자아(自我)’를 느끼고 있다는 증거이다.
책임적 자아의 관심은 ‘옳음(the rightness)과 참(the goodness)’에 대한 관심이다. 내가 디자인해 온 것들, 가르쳐 온 것들, 경영자로서 디자인에 대하여 의사결정의 틀과 시각 그리고 정책들에서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해 왔으며 그것은 옳았으며 참이었는가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그렇다면 지금 나는 앞으로 무엇을 생각해야 하며,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며 디자인하며, 가르치며, 경영하며 정책을 수행해 나아갈 것인지를 진솔하게 생각하여야 할 때이다.
국민소득 ‘일만불’ 시대에서 찾아오는 선진 개발도상국가의 위기는 ‘이만불’의 시대로 순탄한 항해를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일만불’까지 도달하는 데 필요했던 서구 중심의 일방통행적 의식을 청산하지 않으면 ‘이만불’ 시대로의 항해에 풍랑이 일 것이 분명하므로 새로운 인식과 의식으로 전환하여야 하는데 이 의식이 바로 ‘나 - 우리(The I - The We)의 정체성’ 의식이다.
이 정체성의 원류(源流)는
첫째, ‘나 - 우리’의 기질과 성향이 지닌 본성 문화인류학적 혈통(the root)에 대하여 올바른 인식과 자부심을 회복하는 것이며,
둘째, ‘나 - 우리’의 역사와 문화의 전통과 정신적 지위를 깨닫는 것이며, 셋째, ‘나 - 우리’가 살아온 생활 세계의 방식과 규범을 존중하고 그 안에서 우리 자신의 인간가치와 미적가치를 실천감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사회적 혈통이 같은 ‘나 - 우리’의 관계를 연결하는 사회적 윤리의 고리를 찾는 것이다.
‘나 - 우리’는 지난 세기 동안 우리를 괴롭혀온 누더기 같은 현대사에서 누적된 콤프렉스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도록 서로 도와야 한다.
우리가 믿고 사용한 디자인 이론(theory), 우리가 나 자신도 모르게 젖어 우리 자신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관행(practice)들로부터 마음을 돌이켜야 한다.
이제 ‘나는 매우 중요한 사람이다’라고 생각하는 수많은 개체 ‘나’, ‘나’, ‘나’???들이 ‘우리’로 집합되어 사회적 역량으로 통합된 의식의 흐름으로 나타나야 한다. 그러므로 ‘개인(a person)’은 중요한 의식의 출발점이다. 오늘 우리 사회가 추구하는 디자인에 대한 사회적 목표 역시 건강한 디자이너, 디자인 교육을 담당하고 있는 건강한 교수, 정책과 기업을 이끄는 건강한 경영자들에 이르기까지 개인의 정신적 지위와 책임적 자아 의식은 새로운 미래를 이끌어 동북아의 중심시대를 주도하는 원동력이 될 것이다.
디자이너의 ‘값’은 자신이 결정한다. ‘값’을 위하여 비전을 넓히는 것도 자신의 몫이며, 디자이너로서의 역량을 키우는 것도 자신의 몫이다.
그러므로 세계(as multi-domestic market)로부터 ‘나 - 우리’에 의해 디자인된 모든 제품의 값 역시 우리 자신이 결정하는 것이며, 이에 대한 노력도 ‘나 - 우리’의 몫이다.
이제 정체성은 ‘나’를 위해, 우리’의 국가를 위해 그리고 이만불 시대의 새로운 항해를 위해 21세기 생존의 관건이 되는 명제(命題)인 것이다.
“나의 디자인 속에 우리의 디자인이 있으며, 우리의 디자인 속에 나의 디자인이 있다. 그리고 나의 문제 속에 우리의 문제가 우리의 문제 속에 나의 문제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으로부터 정체성은 시작된다.
나는 이 모든 문제의 출발점이 될 수도 있고, 해결하는 존재의 근거일 수도 있다. 나는 결코 작은 존재가 아니며 이러한 우리의 문제 앞에 서서 인식하는 한 그는 큰 자(A person)이다.
글_김영기(이화여자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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