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igndb Home > designdb 잡지 > 185호

디자이너 연대기 三

근대디자인의 기억. 박대순

이 땅에서 1세대로 산다는 것...

"1세대로 살기 어려웠어" 짧은 인터뷰를 마치고 연구실 밖으로 우리를 배웅해 주시며 선생님은 혼잣말인양 조용히 이 말을 내뱉었다.
왜 아니겠는가. 디자인이라는 용어조차 생소했던 해방 직후부터 가히 디자인 과잉시대라고 불릴만한 현재까지 한국 디자인 교육과 제도의 한 켠을 지키고 서있기란 그리 녹녹한 일은 아니었으리라.

박대순 선생의 이력은 제법 화려하다. 최초의 디자인학 박사학위 보유자에, 한국공예가협회와 한국디자이너협의회, 한국디자인학회의 창립멤버이며 한국 산업디자인 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한 대한민국상공미술전람회(현 대한민국산업디자인전)의 탄생에 산파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어디 이것이 영광스럽기만 했을까. 선생의 이 멋들어진 연대기는 1세대로서 경험했던, 아니 반드시 겪어내야만 했던 고통스러운 통과의례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땅의 근대 역사가 그러했듯, 한국 근대 디자인의 역사는 결코 거창하게 빛나는 그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그것을 보며 지루한 복마전을 떠올리게 된다.
디자인이란 용어조차 없던 시기, '미술 수출'이라는 이름으로 디자인은 곧 산업역군으로 여겨지던 시기, 제대로 된 커리큘럼과 교과서 한권 없던 시기, 일품공예와 디자인의 구분이 모호했던 시기.
우리가 박대순 선생의 이름을 접하게 되는 장소는 다름 아닌 바로 이 지점이다. 그리고 이 역사에 대한 그의 기억은 곧바로 한국 근대디자인 성립에 대한 세밀한 저장창고 그 자체라고 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이번 호 디자인디비에서는 그를 통해 한국 근대디자인의 기억을 되짚어보기로 했다.
변변한 디자인사 한 권 가지고 있지 않은 현실에서 반 백년 넘게 디자인 교육과 제도 성립의 일선에 서있었던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곧바로 귀중한 데이터베이스가 되리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이 인터뷰는 서울 잠실에 위치한 선생의 연구실에서 이루어졌다.
서울대 재학 당시의 교과서부터 일본 디자인 학회지까지, 그 조그만 방은 그야말로 디자인 아카이브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을 만큼 훌륭했다. 우리는 조금씩 흥분했으며, 그 흥분에 걸맞는 만족을 가지고 그 방을 빠져 나올 수 있었다.

"뒷짐지고 들어와서 등 두들겨주고 나가시면 그만이야"

우선 서울대학교 재학시절 얘기부터 여쭤볼께요. 1949년 서울대 예술대학 미술학부 도안과에 입학하셔서 1955년 응용미술학과로 졸업을 하셨죠? 전쟁 때문에 졸업이 늦어지신 건가요?
그렇지. 46년에 서울대에 도안과가 생기고 나는 49년에 입학했어. 원래는 53년에 졸업을 했어야 하는데. 6.25 사변이 터져 가지구 도망 댕겼지 뭐. 군대도 끌려갔다 오구.
거기서 빠져 나와서는 미군부대에서 초상화 그리면서 지냈어. 그리고서는 부산에 내려가서 독학을 했지.

46 년에 서울대에 디자인을 담당하는 도안과가 생긴 것은 의외라고 생각할 만큼 이르다고 생각되는데요.당시 디자인에 대한 의식이 있었나요?
그 얘길 하지. 이순석씨라고 계셔. 동경미술학교 도안과를 졸업(1931년)하신 우리나라 디자인계의 효시 중 한분이시지. 그 양반이 유일한 도안과 전임교수셨어. 그분의 주장으로 서울대학 미술학부 내에 도안과가 생기게 됐지.
그런데 그 양반은 디자인이란 개념은 없으시고 '도안'이란 그 개념을 가지고 계시던 분이야.
디자인을 하려면 대량 생산에 대한 개념이 있어야 하거든? 그런데 이순석 선생은 완전히 일품공예나 순수공예 쪽으로, 그러니까 디자인보다는 오히려 회화에 가까운 개념을 가지고 계셨던 분이야.

이순석 선생 이외에 어떤 분들이 교육을 담당하고 계셨나요?
그 분 말고 도안과에 전임교수는 없었고 나머지는 강사였어. 김정한씨라고 무대장치가 하시는 분이 계셨고, 고 모라는 분이 도학을 가르치셨고, 백태원씨라고 나전칠기 하는 분이 가르치기도 했어. 이분은 정식 학교를 나온 건 아니고 이북에서 나전칠기 견습소에서 배운 분이었어. 쉽게 얘기하면 학문적 배경이 확실한 분이 얼마 안 계셨던 거야.
그리고 서울대 미학과 창설하신 박의현 선생이 미학을 가르치셨고, 소묘는 조각과에 계신 김종영 선생에게 배웠지.
서양미술사는 알다시피 장면씨 동생이었던 장발 선생에게 배웠고.
당시 미술학부 정원이 한 학년에 40명이었는데 1학년은 기초과정으로 전부 같이 배웠거든. 그중 도안과는 6~7명 정도 됐고. 도안과라고 해도 미술의 기본적인 과목은 다 배웠던 셈이지.

당시 교육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진행되었나요?
이론적 배경이 없으니까 우리는 그냥 따라 하는 거야.
선생님 그림 따라 하고, 선배 그림 따라 하고. 그러면 이순석 선생이 가끔가다 들어와. 뒷짐지고 들어와서는 "어 너 잘하네. 잘하네"하고 등 두들겨주고 나가시면 그만이야.
또 그리고 있으면 이번엔 장발 선생이 들어와서는 "이게 뭐냐. 다시 그려"하고 나가신단 말이야. 그래서 바꿔놓으면 이순석 선생이 다시 들어와서 "야, 이거 왜 바꿨어"라고 해. 그런 식의 혼란스런 시기를 보냈어.
애들이 기본 실력은 있으니까 그림들은 잘 그리는데, 아무 비전도 없고 그랬지.
일주일에 한번씩 과제가 나오는데 그저 복도에다가 붙여 놨어. 금주의 화제는 '십장생도를 이용한 담배갑', 이런 식으로. 그러면 또 우리가 독학하는 거야. 그렇게 배웠어 우리는.

"미친 새끼라고 욕 많이 먹었어"

졸업 후 1960년부터 1968년까지 경기공업전문학교의 공예과장으로 재직하셨잖아요. 디자인 피교육자에서 교육자로 위치를 바꾸신 셈인데 이때의 경험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내가 막상 경기공업전문학교를 맡고 보니 "아,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이 더 드는 거야. 이게 뭐 도제교육뿐이 더 되냔 말이야.
그때 야나기 무네요시 선집을 읽게 됐어. 놀래 자빠졌지. 봐, 야나기가 이 책들을 쓴 것은 명치시대야. 그런데 이미 이 사람은 조형예술이니 공예니 디자인이니 하는 개념을 다 잡고 있었어.
19세기 윌리엄 모리스의 디자인 운동은 물론이고 말이야. 이 사람은 오늘날의 디자인을 '자본적 공예' 이렇게 부른 거지.
그런데 우리는 이 사람 구분에 따르자면, '일품공예', '민족적 공예', '귀족 공예'만 배운 거야. '아, 왜 지금껏 이 단순한 걸 몰랐나'하는 생각이 들더군.

그게 언제 구입하신 책이세요?
64년. 이게 55년에 나온 건데, 내가 64년에 샀지.

이론의 중요성을 깨달으셨다는 말씀인데요, 당시 디자인계의 이론교육이 그렇게까지 열악했나요?
말도 마. 내가 일본에서 다른 책을 더 사가지고 와서 "이론을 가르쳐야겠다"라고 하니까 다른 대학 교수들이 욕을 많이 했어.
"미친 새끼, 그림이나 가르치면 됐지. 공예 하는 놈이 뭐 같잖게 이론을 해"라고 말이야. 그러니 얼마나 속 터져.
일본은 이미 몇 십년 전부터 하고 있었는데 말이야. 할 수 있나. 혼자 독학을 했지.

야나기 무네요시 이외에 또 자극 받은 책들이 있나요?
많지. 그 중에서도 꼽자면 한스 빙글러(Hans M. Wingler)의 <바우하우스Bauhaus>(1962)겠지.
그 책에는 바우하우스의 설립목표부터 교육과정까지 다 나와 있었어. 바로 내가 찾던 거지. 아, 책이 너무 좋더라구.
그런데 독일어하고 영어하고 막 섞여있어서 읽기가 어려웠어. 그래서 일어 번역본을 구해다가 대조해가며 읽었지.
'아, 이게 디자인 교육의 기본틀이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어. 지금도 디자인 교육은 거기서 많이 벗어나지 않아.

선생님이 경기공전에 계실 때도 학과 이름은 여전히 공예였잖아요? 디자인이 아니고. 그 차이가 분명히 있었을 것 같은데...
60년대 까지만 해도 의장, 도안, 공예 뭐 이랬지. 하도라고도 했고.
70년도에 들어서면서 '디자인'이란 용어를 쓰기 시작했는데 박정희가 외래어를 잘 못 쓰게 했잖아. 그런데 우리가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디자인이란 개념과 의장, 공예하고는 맞아 떨어지질 않는 거야.
그래서 내가 정부에 질의서를 냈어. "디자인은 무슨 용어로 바꿔 써야 하나"하고 말이야.
그때 상공부에 박철이란 사람이 상공부 디자인계장으로 있었는데. 그랬더니만 "디자인은 그냥 디자인으로 써라"라고 답이 왔어. 그래서 공식적으로 디자인이란 용어를 쓰게 됐지.

"뭐, 이런게 수출이 되겠어, 라고 하더군"

66년부터 열린 '대한민국상공미술전람회'가 생기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하셨다고 들었는데요.
66년인가, 서울여자대학이 지금 프레스 센터 자리에서 졸업전시회를 했어.
그때는 4층 건물이었는데 1층에 전시장이 있었거든. 거의가 공예 작품이었지. 염색작품 같은 거 말이야. 오후 3시가 오픈이었는데 그 전에 키가 큰 사람하고 까무잡잡한 사람이 들어와서는 "뭐 이런 게 수출이 되겠어"하고 비난을 하더라구.
기분이 나빠서 "3시에 오프닝이니까 그때 다시 오슈"라고 했지.
그런데 한 시간쯤 있다가 또 와가지고 모라고 해. 그래서 "당신 뭔데 남의 전람회 와서 콩나라 팥나라 하는 거야" 그랬지.
알고 보니 청와대 경제수석하던 오원철하고 나중에 동력자원부 장관했던 유곽종이었어. 당시는 상공부 국장, 과장이었지.
그래서 지하실 다방으로 내려갔지. 서울여대 남상규 교수하고 말이야.
그때 우리가 아쉬운 소리를 했어. "공예나 디자인계 등용문이 국전밖에 없다. 당신 말마따나 수출을 하려면 상공부가 디자인에 관심을 좀 가지고 국가적인 전시회라도 하나 만들어야 할 것 아니냐"하고 말이야. 그게 발단이었어.

그래서 이름이 '대한민국상공미술전람회'가 된 거였군요.
그건 또 복잡해. 그래서 한 20명이 모여서 자문위원회를 만들었어.
이순석 선생, 이우성, 나, 이신자, 민철홍, 한도룡, 조영제 뭐 이렇게들 모였지. 지금 교보문고 자리에 있던 상공부에서 회의를 하는데 명칭문제가 나왔어.
내가 먼저 "이건 산업에 대한 전시니까 '산업미술연구'라고 하고, '상업미술','공업미술','공예미술'로 해서 3분야로 나누자"라고 제안했지.
그랬더니 이순석 선생이 불만스러워 하시더군. 산업미술이라는 용어가 마음에 안 드신거야. 그러자 상공부 차관하던 이철승씨가 중재를 했어. 상공부가 하니까 '상공미술전람회'라고 하자고 말이야.
결국엔 79년인가 내 주장대로 '산업미술전람회'로 바뀌었지. 그 뒤로 '산업디자인전'으로 다시 바뀌고. 시대의 흐름에 따라 명칭이 바뀌어 간 거야.

65 년에 '한국공예가협회'를, 72년에 '한국디자이너협의회(KDC)'를 창립하셨는데요. 이 시기는 가히 디자인계 조직결성의 시기라고 할 만큼 많은 조직이 난립했습니다. 이때 이야기를 듣고 싶네요.
그때 한홍택씨가 '조선산업미술가협회'를 계승해서 '대한산업미술가협회'를 만들었어.
그랬더니 이순석 선생이 "우리도 뭔가 만들자"해서 59년인가, 60년인가 '응용미술가협회'가 만들어진 거야. 그런데 그게 다 홍대, 서울대판이거든? 나머지는 다 찬밥인거라. 열 받더라구.
그런데 당시 '세계공예가협의회World Craft Council'라는게 있었어. 그래서 거기 가입을 하면서 '한국공예가협회'를 만들었지. 말하자면 좀 덜 구박 받으려고 만든 거야.

"한국디자이너협의회'도 비슷한 성격이었나요?
그렇지. 그걸 72년에 만드니까 사람들이 나보고 그래. 야당 골수분자에 중공군 수령이라고.
그게 서울대 졸업생중 서울대 근처에 못간 사람들 다 모여, 뭐 이런 성격이었거든. 홍익대는 빠지고 한양대, 건대, 동덕, 덕성여대 다 들어왔지.
그랬더니 그해에 조영제, 김교만이가 모여서 '한국시각디자인협의회(KSVD)'를 만들고, 민철홍이는 '한국인더스트리얼디자인협회(KSID)'를 만들더라구.
이 셋이서 니가 주류니 내가 주류니 이랬지. 우스운 말로 누가 KS냐하고 싸운 거야. 다들 애들이었지. 그때는.

"아, 선배님 넋두리 하시네요"

디자인 조직, 제도면에서 60, 70년대는 그야말로 공중전의 시기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 싶네요. 그렇다면 당시 학문적, 이론적 활동은 어땠나요?
알다시피 78년에 '한국디자인학회'를 만들었어. 그때 내가 몰매 많이 맞았지.
권순형하고 몇몇 사람들을 만났는데 처음엔 좋았거든. 그런데 막상 시작하려니 안되는거라. 논문을 쓰고 글을 쓰려니 큰일 난거야. 뒷짐지고 다니면서 콧수염이나 뽑으며 놀았으니 공부가 될 리가 없었어.
그래도 우겨우겨 만들었지. 그랬더니 이화여대 계시던 백태호 선배가 '현대디자인학회'라고 만들었어. 그렇게 학회는 두개가 만들어졌는데 도대체 누가 글 ?쓰냔 말이야.
그래도 '한국디자인학회'는 꾸준히 학회지를 냈어. '현대디자인학회'는 그에 비하면 활동이 적었지.
그랬더니 87년인가 그 쪽 멤버들이 두 조직을 통합하자며 찾아왔어. 안상수, 김명섭 이런 사람들이 말이야. 그때 삼겹살에 소주 한 40병은 마셨을꺼야. 그런데 얘기가 잘 안됐어.
나중에, 그러니까 94년에 내가 정년을 하면서 결국 통합했지. 2기 디자인학회 시대가 열린거야.

그동안 디자인계에 이론적 지형을 만드시느라 애쓰셨는데요. 번역작업도 많이 하셨고요. 디자인에 있어 이론의 역할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우선 알아야 할 것이, 디자이너는 스페셜리스트가 아니고 제네럴리스트여야 한다는 거야.
예를 들어 제품디자인을 하려면 그 재료에 기본적 지식은 알고 있어야 하거든. 이게 열가소성이 있고, 열경화성이 있고, 이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지. 이런 기본적 지식조차 없으면 디자인은 성립하지 않아. 이런 거 모르고 그냥 그림만 그려대고 싶으면 아티스트 하면 돼.
더 근본적으로는 무엇이 디자인이냐, 이것을 구분하고 제대로 된 디자인을 하려면 이론 없이는 안된단 말이야.
우리가 해방직후 공예와 디자인을 구분 못한 것도 다 이론이 부재했기 때문 아니겠어? 러스킨이나 모리스도 모르면서 디자인을 한다는 것은 우스운 일이라고.
남들은 인지심리, 지각심리 이용해서 디자인하고 있는데 우리는 아무 생각 없이 그림만 그려대고 있었단 말이야.
아니 시골놈한테 가서 "너 이런 건물 인테리어 디자인 하라" 그러면 그 사람 벽지밖에 더 바르겠어. 공부를 안 했으니.
이런 얘길 어디 가서 발표했더니 한 후배가 그래. "선배님, 넋두리 하시네요" 그래, 넋두리지. 그래도 필요한 걸 어쩌겠어.

선생님께서 생각하시는 좋은 디자인이란 어떤 것인지 듣고 싶습니다.
1950년대 세계디자인대회 할 때 나온 얘기가 있어. 잘 팔리는 나쁜 디자인도 나쁜 거고, 안 팔리는 좋은 디자인도 나쁜 거라고. 요새 그런 거 많아.
교수들이 "야, 이거 작품 좋네. 대상이다!" 그런데 제품 만들어 놓으면 안 팔려. 나쁜 디자인이지.
잘 팔리는 좋은 디자인이 비로소 좋은 디자인이라는 거야.

마지막으로 한국 디자인 이론계에 대해 나름의 평가를 해주실 수 있을까요.
7년인가 98년에 과기대에서 '한일 디자인 심포지엄'이 열렸어.
그때 125편 정도 논문이 쏟아졌는데 일본 쪽에서 70몇 편, 우리 쪽에서 50편쯤 썼지. 내용을 읽어보니 일본 쪽 글이 훨씬 나아. 그렇다고 실망만 하고 있을 수 있나.
일본도 1956년 디자인학회 생길 때에는 한심했다구. 막말로 지금 대학 1학년 글보다도 못했어.
좀 전에 말한 디자인학회 회원이 지금 몇 명인지 알아? 2천명이 넘어. 지금까지 나온 논문집도 큰 상자로 두개 분량이 되고.
아직 턱없이 부족하지만 이제 나아지지 않겠어? 나는 그렇게 믿고 싶어.

 

인터뷰,글_김형진,양효경 / 사진_박정훈
 

 


디자인.아카이브.
서울대 재학당시의 교과서부터 일본디자인학회지까지.
박대순 선생의 조그만 방은 그야말로 디자인 아카이브라 불려도 손색이 없었다.
직접 책을 펼쳐 언급한 부분을 단번에 짚어내는 그의 손길에는 오랫동안 지녀온 디자인교육에 대한 그의 열정이 숨어 있었다.

 


도제 교육에서 디자인 교육으로.
변변한 디자인이론서 하나 없던, 아니 디자인에 이론이 필요하다는 자각조차 드물던 시절.
선생은 일본어와 영어 원서들을 힘겹게 구입해 독학하다시피 공부하였다.
그런 그의 노력이 없었다면 한국디자인 교육과 이론 정립이 얼마나 더 늦어졌을지 모른다.

 

박대순
1955_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응용미술과 졸업.
1970_ 한양대학교 대학원 응용미술과 석사.
1988_ 한양대학교 대학원 응용미술과 박사.
1960~68_ 경기공업전문학교 공예과장.
1966~85_ 대한민국상공미술전(현 대한민국산업디자인전) 집행위원, 심사위원장.
1968~86_ 한양대 사범대학 교수.
1978~94_ 디자인학회장.
1983~88_ 서울올림픽 조직위원회 디자인 전문위원.
1985~89_ GD마크 심사위원장.
1986~94_ 한양대산업미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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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igndb 2003년 5 6월호 (185호) 첫페이지로 가기
prologue
그대 디자이너여, 지금 누구와 협상에 임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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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logue
Beyond the Negotiation
디자이너 연대기 3
근대 디자인의 기억 - 박대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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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 스케치하는 디자이너, 이돈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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