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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안으로서의 공공 디자인. 정독도서관 프로젝트.

작품의 설명은 언제나 작품을 만들어 낸 사람 쪽에서 모색되어 왔다. 롤랑 바르트, '저자의 죽음', <텍스트의 즐거움> 중.

롤랑 바르트는 고전적인 의미의 문학작품을 부정하는 일련의 글들 - '저자의 죽음', '작품에서 텍스트로'- 을 통해 유일하고 동일한 저자에 의해 통제되는 '작품'이 아닌 독자의 능동적인 '읽기' 행위를 통해 복수로 확장되어 가는 텍스트의 존재를 말한 바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렇게 물을 수 있을 것이다. 미술이나 디자인에 있어서도 이러한 주장은 가능할 것인가? 이 질문은 곧바로 어려움에 봉착하게 된다.
우선 작가의 쓰기와 독자의 읽기 행위는 모두 언어의 영역에서 이루어진다는 공통점이 있는데 비해, 미술가 혹은 디자이너의 작품제작과 관람객의 관람행위는 서로 다른 영역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하자면, 작가와 독자는 모두 같은 말을 통해 소통하는 주체임에 비해 미술가와 관람객, 디자이너와 소비자 사이에는 그 공통언어의 공간이 좀처럼 생성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미술은 영원히 작가의 영역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는가? 관객은 "자기 마음 속의 이야기를 털어놓는 저자"의 말을 일방적으로 경청하는 위치를 벗어날 수 없는 것일까? 그리하여 독자의 탄생에 버금가는 관객의 탄생을 기대하기란 영 어려운 일이 될 것인가?

2001년 4월, 서울의 오래된 동네 화동 2번지에 위치한 정독도서관 매점에서는 탁자와 의자를 다시 배치하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한 줄로 정렬되어 있던 탁자와 의자는 매점 공간 가득히 흩트려졌다가 다시 모아지고, 또 다시 흩어지고 있었다.
결국, 여러가지 시험 배치가 끝나고 이 시험 배치들에서 보여졌던 요소들을 종합해 매점 공간의 재배치가 완성되었다.
이름하여 <자리배치>. 정독도서관을 이용하는 유저user들에게 건넨 젊은 작가 박용석의 '제안'이었다.
어찌보면 단순하기 그지없는 이 사건을 들먹이는 것은 그 다음에 일어난 일 때문이다. 매점 이용객들은 이 낯선 제안에 잠시 당황했지만 곧 자기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이 새로운 배치에 반응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더 편리하고 유용한 방식으로 탁자와 의자의 위치를 또다시 변경함으로써 작가의 제안에 능동적인 대답을 건네온 것이다.

이것을 작품이 아닌 '제안'이라는 명칭으로 부르는 데에는 수사학적 겉멋 이상의 이유가 있다.
<자리배치>는 물리적 실체가 있는 작품이 아닌 이런 저런 시안만으로 이루어진, 말 그래도 제안이었다. 또한 관객, 이용객이 작가의 제안을 마음껏 변경할 가능성을 열어놓았다는 점에서도 <자리배치>는 작품으로 불리기에 어색함이 있었다.
롤랑 바르트의 설명처럼 작품의 설명은 언제나 작가에게서 찾아지기 마련이며, 만약 작품의 구조가 작가 이외의 누군가에 의해 변경된다면 그것은 더 이상 특정 작가의 작품으로 불리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이런 질문들을 던져보아야만 한다. <자리배치>에서 작가는 어디에 있는가? 이 제안에 있어 작가만의 원안original plan은 과연 존재하는가? 원안과 시안tentative plan의 구분점은 무엇인가?
그리고 이 질문들에 대답하는 것은 곧 미술에 있어, 그리고 디자인에 있어 관람객, 사용자의 위치와 역할은 무엇인가라는 또 다른 질문을 불러오게 된다.
사실, 디자인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미술에 있어서도 관객, 수용자의 위치란 보잘 것 없다. 아무리 작가들이 관객과의 소통을 원한다고 떠들어댄들, 대부분의 경우 그 소통은 작가 자신만의 독백으로 끝날 뿐 수용자의 목소리가 적극적으로 그 작품의 의미 형성에 도움이 되는 경우란 극히 보기 드물기 때문이다.
미술관이 아닌 공공장소에 설치되는 작품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클라이언트와 작가 사이에 수용자가 끼어들 틈이 존재하는가? 수용자의 공간인 공공장소에 클라이언트의 요구와 작가의 주장으로만 가득 찬 작품을 던져놓고 마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이 공공미술의 현실인 것이다.

오늘날 한국 공공미술의 태반을 차지하고 있는 대형 조각품들의 제작 원리는 지극히 단순하다.
자리 바꾸기와 크기 키우기. 즉, 미술관이나 조각공원에서 도시공간으로 자리를 바꾸고 그 공간에 걸맞게 크기를 키웠을 뿐, 공공영역에 대한 어떠한 성찰도 보여주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모자상과 도시공간 사이의 관련성은 무엇일까? 또, 형태를 알 수 없게 추상화된 조각품이 시민들에게 말하고 싶은 이야기란 도대체 무엇일까? 이런 경우 공공미술품은 수용자의 보행을 방해하는 물건에 지나지 않게 된다.

작가 박용석의 제안, <자리배치>에서는 이러한 모든 도식들이 의식적으로 거부되고 있다. 이 작품에 있어 작가의 오리지널한 원안이라는 것은 별 의미가 없어 보인다. 그것은 단지 최초에 제기된 의견일 뿐, 그 이후에 벌어지는 수용자에 의한 변형을 가로막거나 방해하지 않는 것이다.
작가는 이 작품에 있어 수용자와 함께 또 한명의 제안자일뿐, 작품의 의미를 형성하는 유일한 주체로서 등장하지 않고 있다.
작업의 의도가 무엇이었든, <자리배치>의 가장 적극적인 의미는 바로 작가의 제안과 수용자들의 적극적 개입이라는 장면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수용자들이 매점의 공간을 다른 식으로 인식하고 그 공간의 배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 자체가 이 작업의 의도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작가와의 인터뷰 참조)

같은 작가가 2000년부터 진행 중인 <녹색 드로잉> 작업 또한 마찬가지다. 이 작업을 위해 제작한 엽서에는 "옥상 물탱크에 그림을 그려드립니다"라는 문구와 함께 자신의 휴대전화번호가 적혀있다.
자신의 물탱크에 그림을 그리고 싶은 사람은 누구라도 이 전화번호로 연락을 할 수 있으며, 작가는 그들을 직접 방문해 이야기를 나눈다. 그들은 자신이 원하는 이미지를 직접 선택하고, 작가는 단지 그들의 이미지를 실현화하는 과정에 자신의 육체를 빌려주는 역할을 수행한다.
이 과정에서 그림을 그려달라고 요청한 사람들은 단순한 수용자를 넘어 클라이언트, 그리고 또 한 사람의 제안자로서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 작업에서 과연 작가는 누구일까? 이미지를 제안한 시민? 녹색 그림을 그려주고 있는 박용석? 전통적 의미에서 작가가 구상과 실현이 통일되어 있는 주체를 말하는 것이라면, <녹색 드로잉> 작업에 작가는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흔히 미술과 디자인은 클라이언트의 유무에 의해 그 영역이 나누어진다고들 말한다. 다시 말해 미술은 디자인에 비해 클라이언트의 입김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우며 작가 자신의 구상과 아이디어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다. 미술가들은 클라이언트들의 때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취향을 만족시켜야할 강박으로부터 자유롭다. 그리고 이런 특성이 미술을 상상력면에서 급진적이고, 정치적으로 진보적인 매체로 만들어온 것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수용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최종적으로 채택된 디자인을 접하게 되는 소비자나, 미술가의 개인적 고뇌에 의해 선택된 이미지를 관람하는 관객이나 그 중간과정으로부터 철저하게 배제되어 있기는 마찬가지다.
아무리 소비자의 기호를 중시하는 디자이너의 작품이거나, 정치적으로 올바른 미술작품이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관객으로부터 외면당하는 것을 당연한 명예로 생각하는 것이 모더니즘 미술의 뿌리깊은 전통이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미술가들의 '관객 무시하기'는 어쩌면 당연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미지 생산, 선택의 과정에서 그 천한 말석의 자리라도 차지하고 앉을 수 있는 수용자는 거의 없어 보인다.

디자인의 영역으로 눈을 돌리면 아마도 상황이 다르다고 말할지 모르겠다. 제품의 성패여부가 사용자들의 선택에 의해 결정되는 디자인제품의 경우 사용자에 대한 배려가 빠진다는 것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사용자들이 디자인 과정에, 그리고 자신을 위한 배려에 참여할 수 있는 지점은 어디일까? 단순히 소비자조사, 혹은 사용자 테스트에 의한 피드백 외에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단 한가지. 그 제품을 사거나 혹은 사지 않는 것이다.
즉, 그들에게 주어진 것은 가장 강력하지만 극단적일 수밖에 없는 수단, 구매여부란 선택권 밖에 없다. 미술과 마찬가지로 디자인에 있어 사용자에 대한 배려는 그저 주어지는 것일 뿐 직접 참여해서 얻어내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더욱이 공공디자인이란 영역으로 넘어오면 그나마 가지고 있던 선택권조차 사용자들은 얻어낼 길이 막막해진다. 아마도 우리나라에서 공공미술과 공공디자인이 닮은 꼴인 이유 중 하나도 이 것이 아닌지 생각해본다.

앞서 살펴 본 <자리배치>와 <녹색 드로잉>이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작가의 고독한 선택 대신 수용자의 명랑한 참여를 지지하고 있다는 점. 작가가 생산한 이미지를 강요하지 않고 수용자가 원하는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중재자 역할, 한 사람의 제안자 역할에 자신을 국한시키고 있다는 점.
그리고, 여기에서 우리는 더 이상 작품이 아닌 텍스트로서의 미술, 작가가 아닌 제안자로서의 미술가의 자리를 찾을 수 있는 것 아닐까?

 

글,인터뷰_김형진(객원기자) / 자료제공_박용석
 


프로젝트명_정독도서관 자리배치
클라이언트_정독도서관
디자인_박용석
기간_
2001.4.21 ~ 2001.4.25
사진_윤행석

 

전시기간 중 선보였던 다양한 자리배치.
처음에 사람들은무슨 공사를 하는 것으로 착각하기도 했다.


매점을 찾은 사용자들은처음엔 어리둥절해 했지만 곧 이 계획에 익숙해져 스스로 자신들에게 더욱 편리한 방식으로 자리배치를 바꾸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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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log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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