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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보 五...五十四 漢兵 五十三呼장

허수아비 미소와 조롱을 넘어서라

쉽게 떠오르는 풍경부터 그려보자.
바람은 산들 불고 햇살은 푸근히 살에 와 닿고 누렇게 익은 벼이삭 무리는 들큰한 냄새를 풍기는 호남평야 너른 들, 황금빛 바다. 느리게 일렁이는 파도 가운데 부표처럼 떠 같이 흔들리는 사람. 사람? 이 아니라 막대기와 헌 옷가지, 지푸라기 따위로 사람처럼 꾸며 논 허수아비다.

가을 들판 여기저기에 서서 허수아비는 바람과 햇살을 한가로이 즐기는 듯하다. 바람에 허수아비가 흔들리면 참새는 그저 건성으로 피하는 시늉을 하고 말뿐. 해질녘, 벼를 쪼아 배를 채운 참새는 둥지로 돌아가기 전에 허수아비 어깨 위에 내려앉아 잠시 날개를 접고 쉰다. 평화롭다.
농부들이야 애가 타건 말건 아이들은 이런 풍경을 떠올리며 ‘허수아비’란 제목으로 동시를 짓는다. 또 도화지에 맘 좋게 웃고 있는 ‘허수아비’를 그린다. 어느 시인의 말마따나 ‘못난 놈끼리는 서로 얼굴만 봐도 즐겁다’더니 그래서일까? 나 또한 허수아비를 생각하면 으레 정겨운 미소부터 떠오른다. 그런데 난 농부이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또 하나, 말 그대로 새대가리인 참새들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허수아비이다 보니 “허수아비~!”하면 쉽게 떠오르는 말이 있다.
무용지물! 맡은 일에 제 몫을 다 하지 못하는 이들을 가리켜 “이거 완전히 허수아비 아냐?”라고 비웃는다. 또 ‘권력의 허수아비’라느니 ‘허수아비 사장’이라느니 하여 괴뢰나 꼭두각시의 뜻으로 쓰기도 한다.
가을 들판이라는 정취 어린 무대에서 주인공 노릇을 하던 허수아비도 이럴 때는 사람들 사이에서 조롱거리로 전락하고 만다. 허수아비는 미소와 조소가 겹쳐진 이중 캐릭터인 셈이다.

이보다 좀 특이한 경우도 있다. 허수아비가 들판에만 있는 게 아니라는 거다. 이럴 때 허수아비는 사람들 사이에 꽤 큰 긴장 관계를 불러일으킨다.
3, 40년 전쯤 허수아비는 도시 광장에서 김일성이나 무장 간첩이 되기 일쑤였다. 10여년 전에는 광주 시민을 학살한 전두환이 되어 각종 집회에 나서야 했고 가끔 미국 대통령이거나 악덕 재벌이 되기도 했다. 그 실체들의 이름표를 가슴에 달고 온갖 저주와 욕을 먹다가 급기야 불에 태워지는 극형을 받고 나서야 제 역할이 끝나곤 했다.
이와 비슷하게 제웅이라는 게 있다. 정월 대보름 전날 밤, 우리 선조들은 이 짚으로 만든 허수아비인 제웅을 길에 내다버리곤 했다. 집안에 있는 모든 액을 이 허수아비에 담아 집 밖으로 쫓는다는 의미다.
또 전통 무속 가운데에는 제웅을 ‘해꼬지할 사람’으로 삼아 갖은 몹쓸 짓을 하는 경우도 있다. 그렇게 하면 실제 그 사람이 똑같은 고통을 겪는다는 거다.

들판과 광장, 길섶과 무당집뿐 아니라 허수아비는 전쟁터에까지 나갔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해남 앞바다를 지키며 성루에 빙 둘러 허수아비를 세워 놓았단다. 멀리 바다에 떠있던 왜군들은 이 허수아비를 진짜 군사로 알고 감히 쳐들어오지 못했다는 이야기다.
멀리는 삼국시대로부터 가까이는 동학 혁명에 이르기까지 이 허수아비 군사는 역사 속에 적지 않게 등장한다. 이 특이한 경우의 허수아비들은 들판의 허수아비와는 좀 달라 보인다.
그러나 이 모두 ‘가짜 사람’이라는 점에서는 똑같다. 더구나 그 효용성 면에서도 오십보 백보다. 제웅이란 허수아비가 실제로 효험이 있다면 아마 21세기 최고 히트 상품의 반열에 오를 것이 틀림없다. 값만 괜찮다면 나부터도 한 10개쯤 살테니 말이다.
허수아비 군사는 이제 통할 수 없다. 그나마 허수아비 화형식은 집단적인 의사 표현이란 점에서 조금 효용성이 있어 보이지만 단지 그뿐, 제웅이 가지는 상징성과 별로 다를 게 없다.
이 특이한 허수아비들을 떠올리면 나도 모르게 실소가 베어나올 뿐이다. 이제 허수아비는 미소와 조소에 이어 실소까지 겹쳐지는 삼중 캐릭터가 되는 셈인가?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 가운데 진짜 허수아비는 딱 하나 있을 뿐이다. 어느 개그맨의 말투를 빌려보자. “허수아비가 왜 허수아비인줄 아나?”내가 아는 허수아비의 어원은 이렇다.

‘옛날 어느 마을에 허수라는 아들을 둔 가난한 농사꾼 아비가 있었다. 어느 날 허수가 집을 나가 오랫동안 들어오지 않더란다. 아비는 아들 허수를 찾아 이 골 저 골을 애타게 헤매고 다녔다고 한다. 그러다가 어느 마을에 들어섰는데 저 멀리 들판에서 논일을 하고 있는 사람이 아들같아 보이더란다.
온 힘을 다해 그리로 뛰어가다 거의 논둑에 다다라서 보니 진짜 허수인지라 반가움에 겨워 “허수야~!”라고 외마디 소리를 지른 뒤 그만 그 자리에 푹 고꾸라져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 순간 참새 떼들이 놀라 다 날아갔다는 거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허수네 아비를 본따 짚으로 인형을 만들고 허수아비라 이름 지어 논가에 세워놓았고 참새들은 그때 너무 놀란 나머지 그 인형만 보면 멀리 내뺐다고 한다.’ 어디 유머 게시판에서 퍼온 이야기로 오해하지 마시라. 실제 민간에서 전해 내려오는 옛이야기다.
난 이 이야기를 빌어 진짜 허수아비는 딱 하나라고 주장한다. 바로 가을 들판에 서있는 허수아비다.

시대마다 모습은 달랐겠지만 어느 시대건 허수아비는 그 시대 농부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으리라. 농부가 쓰는 모자와 농부가 입는 저고리를 쓰고 걸치고 농부처럼 표정을 짓고 있었을 것이다.
가을 들판에 정취를 얹혀놓기 위해 그냥 서있는 게 허수아비가 아니고 벼이삭이 영글은 가을 들판을 참새 떼로부터 지키기 위해 농부를 대신해 서있는 게 진짜 허수아비란 말이다. ‘가짜 사람’이건 말건 간에 ‘일하는 사람’, 이것이 바로 허수아비라는 캐릭터의 참모습이다.
유감스러운 건 나름대로 진화(?)한 약은 참새들 때문에 허수아비가 조롱거리로 밀려나 이제 눈에 잘 띄지 않는다는 것, 또 이글 맨 앞에 떠벌려 놓은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허수아비를 풍경으로 감상할 뿐, 논이라는 일터나 농민이 하는 ‘일’과 함께 덧붙여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 역시 이 글을 쓰는 계기로 생각을 새로 가다듬고 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허수아비와 평민 캐릭터’란 글 주제를 건네 받고도 한동안 내내 싱겁게 미소 짓고있는 허수아비만 떠올랐다.
허수아비가 귀족이 아닌 건 분명한데 평민이라니 평민? 그렇게 생각을 가다듬다 보니 허수아비란 바로 농민에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한민국의 역사는 고작 반세기를 겨우 넘겼다.
농사를 짓기 시작한 수 천년 역사이래 농민은 노예였고 상놈이었고 가렴주구에 시달리는 백성이었고 똥지겟꾼이었을 뿐이다. 이 세월 동안 농민과 함께 일터에 서있던 허수아비를 보고 정겨운 미소만 떠올렸다니 차라리 슬픔을 느꼈어야 할 일이 아닌가.
지금도 농민의 형편이 그리 좋지 않다는 사실을 잘 안다. 그러나 말 그대로 대한민국은 민주 국가, 백성이 주인인 나라이다. 허수아비가 평민의 캐릭터로 제 몫을 하려면 우선 턱없는 가을 정취로부터, 싱거운 미소로부터 허수아비를 떼어놓아야 할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말뿐이 아니라 제대로 대한민국에서 주인으로 살기 위해 때로는 온당치 못한 현실에 맞서 싸우고 고통을 견디며 국토에 생명을 불어넣고 있는 농민들의 피와 땀이 그 자리에 새로 씌워져야 할 것이다.

아직 허수아비는 평민의 캐릭터였던 적이 없었다고 본다. 부잣집 거실에서 탁자구실을 하고 있는 소 여물통처럼 기껏 사람들에게 옛 정취나 안겨주거나 아니면 생명 없는 꼭두각시로 조롱 받고 있을 진데 이를 보고 어찌 나라의 주인인 평민의 모습이라 할 수 있겠는가.
미소와 조롱을 넘어서, 평민의 몫을 제대로 챙기고 평민의 힘을 제대로 누리기를 간절히 희망하는, 지금 살아있는 허수의 아비들인 농민의 모습을, 많은 이들이 ‘허수아비’를 보고 느낄 수 있을 때, 그 때 비로소 허수아비는 평민의 캐릭터로 새롭게 태어날 수 있으리라.

끝으로 사족 하나 덧붙인다.
서기 2052년 가을, 바람은 산들 불고 햇살은 푸근히 살에 와 닿는 호남평야 너른 들, 황금빛 바다. 반듯이 나뉜 논들 둘레엔 철책이 쳐있고 낯익은 대기업 로고들이 듬성듬성 눈에 띄는데, 논 둑길을 따라 어슬렁거리는 사람. 사람?...이 아니라 전자 감응장치와 톱니바퀴 관절로 만들어진 사이보그 허수아비다.
가을 들판 여기 저기에 서서 사이보그 허수아비는 한가로이 바람과 햇살을 즐기는 듯하다. 그러다 참새, 박새, 꿩이 날아들고 두더쥐가 나타나 어른거리면 입력된 프로그램에 따라 가차없이 레이저 빔을 발사한다.

이잉~(레이져 빔 날아가는 소리)! 퍽(참새 터지는 소리)!!! 치지지익~~(참새 타는 소리)! 홀홀~ 얼치기 만화가의 실없는 공상이다. 그냥 웃자고 해 본 소리다

 

사진_이일섭
글_이은홍, 만화가

 


허수아비.
기보5...허수아비...54 漢兵 53 呼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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