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가 지배하는 시대
우리는 지금 수의 시대, 아니 모든 것이 수량화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모든 사물을 수량, 수치로 표현하는 것은 물론, 이제는 오히려 수가 사람을 관리하고 평가하는 시대가 되었다.
아마 컴퓨터의 발달로 복잡한 수를 계산하기 쉬워졌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겠지만 최근에는 수량경제학이나, 계량정치학 등 양적 척도로 인간사회를 분석하려는 시도도 다양한 분야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일종의 수량 이상주의, 수량 합리주의가 팽배하여 무엇이던 수로 전환하면 그것으로 납득해버리는 시대가 되고 만 것이다. 각 방송국의 시청률 경쟁은 말 할 필요도 없고, 북한의 핵 보유에 따른 동아시아의 경제 전망까지 수치 평가에 의해 정치적으로 이용된다
이처럼 인간이 수에 강하게 지배당한 시대는 지금까지 없을 것이다.
그런데 과연 이런 과정을 통해 수는 신뢰성을 획득할 만큼 객관화되고 합리화되었는가 하면 전혀 그렇지 못하다.
하루가 멀다 하고 신문에 오르내리는 수십, 수백 억이라는 돈의 단위가 우리를 수치불감증에 빠뜨려버려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어떤 수치들은 봐도 피부에 와닿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를테면 담배에 표시된 니코틴 함량수치나, 포테이토칩에 표기된 염분 함량 등은 명확한 수치로 나타나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런 수치까지 비교해 가면서 물건을 구입하지는 않는다.
이렇게 산업사회가 복잡하게 발달함에 따라서 수의 세계는 보다 세밀하고, 보다 빠르고, 보다 커져가고 있지만 그것은 단지 복잡한 단위일 뿐 체감적 수치가 아니라는 것이다. 아니 오히려 수치를 체감하지 못하게 하려는 자본의 전략이 숨어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또한 합리화를 추구하는 현대 사회에서 오히려 불합리의 극치인 주술적 의미가 수와 함께 강조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수험생들의 100일주, 발렌타인 데이의 변종으로 생겨난 화이트 데이, 블랙 데이, 심지어 빼빼로 데이까지 이런 주술적 수치는 묘한 군중심리를 자극하는 자본의 논리로 변환되기 쉽다.
주민등록번호, 은행 계좌번호, 전화번호, 여권번호, 의료보험번호, 자동차번호, 각종 비밀번호, 기념일, 혈압, 복권번호 등 우리는 얼마나 많고 복잡한 수를 기억해야 하는 것일까.
그 많은 수들에 한편으로 지배받으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로는 얼마나 많은 기대를 걸며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디자인을 지탱하고 있는 수
일반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복사나 출력용지인 A4는 210X297, A3는 그 2배인 297X420, 포스터 디자인을 의뢰받았다면 A1은 594X841, B2는 515X728...
북 디자인을 해야 한다면 국배판은 227X303, 46배판은 188x258... 가구디자인에 기본인 사무용 책상 높이는 730...
이렇게 디자인 현장은 다양한 수를 토대로 하고 있다.
이 토대 위에 그리드, 비례, 균형, 긴장 등 복잡하고 다양한 수학적 판단이 중층적 구조를 이루면서 디자인을 지탱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훌륭한 디자인과 건축, 음악의 공통점은 매우 아름다운 수의 조합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디자이너나 디자인을 공부하는 학생들은 수에 대해 히스테리 반응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
“나는 워낙 수에 대한 개념이 없어서...”, “사실 나는 수학하기 싫어서 디자인 선택했는데...”
이런 말을 스스럼없이 하는데 이는 스스로가 디자인에 대한 개념이 없는 사람임을 떠벌리고 다니는 것과 다름없다. 이렇게 디자인이 수와 깊은 관계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이유는 디자인 교육이 지나치게 감각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요즘 디자인에는 ‘가치관’은 사라지고 ‘가치감’만이 팽배해 디자인 현장은 감각이라는 한줄기 긴장감만으로 위태롭게 지탱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디자인에서 무시되는 수
모든 것이 수로 시작해서 수로 끝나는 것이 디자인 프로세스지만 수치가 무시되는 경우도 다반사다.
마우스를 천천히 움직이면 지시 팔레트의 X와 Y, 두 축에는 소수점 아래 3자리까지 현란하게 수가 변하는 것이 보인다. 방안대지에 직접 손으로 선을 긋고, 사진식자를 붙이던 경험을 가진 세대라면 처음 컴퓨터의 이 마술적 변화에 짜릿한 전율마저 느꼈겠지만 이제 이런 수치의 변화는 더 이상 깜짝 쇼도 아닌 무시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행간과 자간을 계산해 미리 서체를 지정할 필요도 없고, 사진이나 그림의 크기도 자유자재로 조절할 수 있고, 심지어 컬러마저도 마음대로 전환이 가능하게 되었으니 모니터에 떠다니고 있는 그 많은 수들은 단지 복잡한 단위일 뿐 디자인 작업을 원활하게 도와주는 체감적 수치가 아니다.
그래서 마치 담배의 니코틴이나 포테이토칩의 염분처럼 무시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이런 무시가 상습적으로 반복되면 폐암이나 고혈압이 발생할 수도 있다.
최근 컴퓨터의 처리 능력이 기하급수적으로 향상됨에 따라 필요 이상으로 데이터를 무겁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이런 경향은 초보자일수록 심하게 나타나는데 데이터를 가볍게 해서 실패하는 것보다 무겁게 하는 것이 안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러나 지나친 것은 언제나 화를 불러오기 마련으로 필요 이상의 무거운 데이터는 예기치 않았던 출력 과정에서 에러를 발생시키게 된다. 컴퓨터의 처리 능력은 비대해졌지만 그것을 받아줘야 하는 프린터는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것은 바로 염분 수치를 상습적으로 무시하다가 그만 고혈압을 일으킨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런 산수 수준은 그나마 해결하기 쉽겠지만 본격적인 수학에 해당하는 비례, 균형, 긴장 등의 문제마저도 오로지 감각에만 의존한다면 그 디자인 결과는 뻔한 일이니, 하물며 클라이언트와 디자이너와 사용자의 삼각함수까지 계산하라는 것은 너무나 무리한 요구가 될 것이다.
수를 왜곡하는 디자인
수를 시각화하는 디자인 과정에서는 때로 심한 왜곡이 일어나기도 한다. 정확한 수치를 근거로 하는 지도나 다이아그램 등의 정보디자인 분야가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네덜란드의 수학자이자 지리학자였던 메르카토르는 1569년 둥근 공모양의 지도를 원통형으로 펴서 극지방으로 갈수록 면적이 넓어지는 지도를 개발하였다.
이 메르카토르 도법은 원래 항해용으로 배의 진행방향을 지도 위에 일직선으로 표시할 수 있게 개발된 것이기 때문에 육지 면적이 왜곡되는 것은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나 일반인들에게까지 이 지도가 보급되면서 마치 그린란드가 남아메리카대륙보다 크다는 착각에 빠지게 만들었다. 또한 이런 도법의 특징을 오히려 정치적으로 이용하여 자기 나라가 더 커 보이거나 지정학적으로 유리한 입장에 있는 것처럼 왜곡하기도 하였다.
편안한 항해를 위해 일생을 노력한 메르카토르의 위대한 발명이 정치적으로 왜곡되어 활용된 것이다. 이런 의도적인 왜곡은 지금도 디자인 작업에 자주 이용된다.
예를 들어 한 기업의 성장이나 퇴보를 표현하고자 할 때 그래프의 가로축과 세로축 비율을 어떻게 조절하느냐에 따라 성장을 과장할 수도 있고, 퇴보를 축소할 수도 있다. 수의 단위를 시각화하는 과정에서 교묘한 트릭을 구사하는 것이다.
이처럼 가장 정확한 데이터를 근거로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정보디자인에 자본이나 정치적 논리가 적용되면 그 왜곡의 정도는 오히려 심해진다.
신체에 내재된 수의 개념
인간이 수를 발견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그 신체적 특징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인간은 다른 영장류와 달리 엄지와 나머지 네 손가락이 분절되어 서로 마주볼 수 있다.
이렇게 분절되어 마주보는 손가락은 자연스럽게 엄지손가락이 나머지 네 손가락과 그 마디를 셀 수 있는 구조로 4와 12라는 기본 개념이 생겨났다고 한다.
1년을 4계절, 12개월로 구분하거나 시간 등에 12진법이 적용될 수 있던 배경이 바로 우리 신체에 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10진법 또한 열 손가락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한다.
이렇게 탄생한 손가락 계산(calcul digital)은 매우 정밀하게 발전하여 16세기 중국에서는 열 손가락을 이용하여 10억이 넘는 숫자를 계산할 수 있었다고 한다.
또한 고대 인도에서는 엄청나게 큰 수나 무한이라는 것이 일상생활에서 다반사로 사용되었다. 인도의 시간 단위는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것들이 많다. 예를 들어 엄지손가락을 튕겨 소리를 내는 짧은 순간은 65찰라이며, 이를 계산하면 1찰라는 1/75초에 해당한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최대의 시간 단위는 카르파이다.
힌두교의 일반적인 계산법에 의하면 1카르파(겁 劫)는 43억 2,000만 년에 해당된다.
이것은 브라흐마(梵天)의 1/2일로 브라흐마의 동틀 무렵 세상이 창조되어 해질 무렵 멸망한다는 이야기다. 이는 우주 탄생과 소멸의 과정을 겨우 하루 해에 비유한 것으로 수치로 전환된 시간의 유한성과 무한성이 사실은 동전의 양면처럼 공존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우스를 움직이면 현란하게 변환되는 수치들, 이렇게 컴퓨터에 위탁해버린 우리의 디자인 능력이 사실은 우리 몸과 우주의 질서가 서로 호흡하면서 만들어낸 관계라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위대한 수 0
위대한 수 0을 발명한 것이 인도라는 것은 잘 알려져 있지만 이 0이라는 숫자의 발명이 주판에 의한 것이라는 점은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던 것 같다. 주판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분분하지만 인도에서는 매우 오래 전부터 주판을 사용했다고 한다.
주판의 가장 큰 특징은 비운 자리를 없애버리지 않고 남겨 놓는다는 것이다. 바로 그 비워진 자리가 0으로 표기된 것이다. 비움(空)은 없음(無)이 아니라 오히려 무한한 가능성을 의미한다.
<반야심경>의 중심사상을 이루고 있는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이라는 말처럼 색(色)이란 물질적인 것으로 색이란 결국 공(空)에 불과한 것이니 그 물질적인 대상에 언제까지나 집착할 필요가 없고, 또한 그 공(空)은 언제나 다시 색(色)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철학적인 배경으로 만들어진 0, 그리고 이를 이용한 10진법의 표기나 계산법은 이슬람을 거쳐 서구로 전파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이를 아라비아 숫자라고 부르게 되었지만 이 모든 것은 인도에서 유래된 것이고 지금도 아라비아에서는 인도 숫자라고 부르고 있다고 한다.
위대한 수 0은 계산의 혁명을 가져다주었고 결국 0과 1의 2진법으로 구성되는 디지털의 개념도 이런 철학적 배경이 없었다면 만들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0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0=∞인 것이다.
디자인의 세계도 수와 마찬가지로 언제나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복잡하게 변환되는 디지털 수치의 단위에 억눌릴 것이 아니라 수의 특징을 이해하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디자인 프로세스에 적용함으로써 크리에이티브의 가능성을 무한대로 펼쳐 보도록 하자.
그러기 위해서는 디자인 현장을 지탱하는 수에 대해 잘 인식하고 있어야겠지만 너무 가시적인 수치에 집착하기보다는 이를 뛰어넘어 자유로워질 수 있는 상상력이 필요할 것이다.
글_김경균(정보공학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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