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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형의 언어, 서예가 정도준

소헌 정도준 선생은 지난 1999년 독일 수투트가르트 미술관 초대전 이후 국내 서예인으로는 이례적으로 유럽 등 해외에서 활발하게 서예작품을 발표해온 중견 작가이다.
그가 해외에서 극찬을 받는 모습은 한국의 판소리가 정작 해외에서 극찬 받고 있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외국인의 눈으로 보면 서예는 읽는 글씨보다 보는 그림에 포함된다. 그들이 우리의 글을 모르는 탓도 있겠지만, 작품을 감상함에 있어 선의 굵기, 먹의 농담, 글자의 공간배치를 통한 여백 등 서예의 본질인 조형성으로 작품에 접근하기 때문이다.
또 이것은 소헌이 전통을 고집하기 보다 현대적인 조형성을 작품에 반영해 이에 화답해 온 탓인지도 모른다.
한국 문자문화의 조형성을 한단계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는 그를 만났다.

요즈음 선생님 작품의 새로운 변화라고 하면, 종이의 변화라 할 수 있는데요, 그 변화 과정에는 어떤 일이 있었나요.
암울한 시대였던 80년 초 처음 해외여행을 가서 느낀 것이 예술에 흐르는 웅장함과 다양한 컬러였습니다.
만약 우리나라가 그들과 예술교류를 시작한다면, 과연 내가 무얼 준비해놓고 그들이 내 작품을 좋아하게끔 만들 수 있을까 고민을 많이 했었죠.
다양한 색에 익숙한 서양인이 보기에 흰색과 검정으로만 이루어지고 동양이 가진 여백의 미로 이루어진 작품을 본다면, 처음에는 신선함에 좋아할 테지만, 자꾸 보다 보면 기대감이 떨어져 싫증을 느낄 것이 뻔했습니다.
그래서 수단을 찾은 것이 여백을 선으로 채우는 것이 아니라 색감을 표현해서 다양함을 주는 것과 다양함이 묻어있는 종이의 제작으로 이어졌습니다

1999년 독일 수투트가르트대학 초대전을 시작으로 독일, 프랑스 유네스코 초대전도 하시고, 2005년까지 전시계획이 잡혀있으시다고 들었습니다. 주로 어떤 작품을 준비하십니까?
해외 전시에는 한자를 제외하고 한글로 된 작품만 가져갑니다. 아무래도 제가 한국사람이기 때문에 한자보다 한글을 보여주고 싶어서죠.
해외 전시를 할 때는 보통 여러 개의 방에서 전시를 하는데, 항상 비슷하게 있으면 지루해보여 다양한 소재를 도입했습니다.
화선지에 동양화 물감을 써서 색상지처럼 하기도 하고, 울산 반구대 암각화를 탁본한 종이에 글을 쓰기도 하며, 대나무를 얇게 켜서 그곳에 쓰기도 하고... v서양의 캔버스를 긁어서 거기에 먹으로 글을 쓸까도 했었는데, 괜시리 서양에서 전시한다고 그들에게 맞춰주는 것 같아 그만 두었습니다.

선생님의 글씨를 오륜체, 소헌체라고도 하던데요.
요새 간혹 오륜행실도의 어리숙하고 못난듯한 소박한 서체와 궁체를 합쳐 만든 제 글씨를 소헌의 오륜체, 소헌체 그러기도 하지만 아직 그것에 익숙해지고 싶지 않습니다.
무슨무슨 체라는 것은 후세가 작가를 기리며 불러주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또 지금 소헌체라도 불린다 해도 거기서 머물지 않고 그럴수록 5년, 10년 단위로 변해가는 모습을 보이는 진정한 소헌체를 만들고 싶기 때문입니다.

요새 들어 디자인에서도 캘리그래피를 이용한 상품제작이 늘어나고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예전 70년대에는 서예가 우리의 문화, 산업 등에서 큰 자리를 차지했었지만, 그 후 지금까지 근 20년을 세계화를 표방한 서양의 평면적인 것이 지배해 왔습니다.
자고로 사람이란 한가지를 오랫동안 바라보고 있는 것을 꺼리기 때문에, 이제 다시 서예가 디자인과 결합된 새로운 형식이 붐을 일으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한자나 서예 등의 운동감 넘치는 글자는 강렬한 무언가를 표현할 때 아주 효과적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캘리그래피를 이용한 디자인은 한 때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제 새로워진 또 다른 시대를 풍미할 때가 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요즘 시대에 서예인의 가져야 할 자세는 무엇일까요?
저는 글씨를 시작을 할 때 이것으로 생활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대부분의 예술가들이 그렇듯이 밥을 굶더라도 그저 제가 좋아서 했을 뿐이었던 거죠.
가지고 있는 끼를 발산하지 못해 못 견뎌서 글씨를 쓰는 거지, 돈이나 다른 것을 바라보고 했으면 이렇게 외길을 걸어가지 못했을 겁니다.
그렇게 보면 서예가 앞으로 나아갈 길은 서예인 각자의 책임일 수 있습니다.
전통을 살려나감과 동시에 동서양의 공감대를 일으키는 작업을 한다면, 비록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하더라도, 후세에 이름을 날릴 자신의 작품 하나는 내놓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껏 우리나라 서예인들은 작품은 많이 있지만, 그에 걸맞는 이론을 정립해서 발표하는 일에 소홀했다고 생각합니다.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은 동양에 관해 무지한 해외에 가서도 나와 작품을 표현할 수 있는 중요한 열쇠입니다.
쓰는 것에만 열중하는 일은 단지 흉내내기에 그쳐 진정한 내 것이 될 수 없고 창의력 발휘에도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모든 것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과거 역사와 조형의 변천을 알고 그에 맞는 적절한 조형미를 창출해야 한다는 점을 명심해 논문이나 학술대회 등에도 많은 참여가 이루어졌으면 좋겠습니다.

소헌(紹軒) 정도준(鄭道準)
1975년~ 국내 개인전, 그룹전, 특별전 다수
1982년 대한민국 미술대전 대통령상 수상
1999년 독일 국립 슈투트가르트 미술대학 명예 아카데미 회원
1999년 독일 국립 슈투트가르트 미술대학 초대전
2000년 독일 쟈브리겐 KIST EUROPE 특별전
2000년 건국대학교 명예 철학박사
2001년 프랑스 파리 UNESCO 특별전
2003년 벨기에 왕립 마리몽 박물관 초대전
2003년 이태리 피렌체 체탈도시립미술관 초대전

진행,글_임혜진(KIDP 정보컨텐츠팀)／사진_윤행석
 

소헌 정도준

소헌은 전통을 고집하기보다 서예의 조형성을 살릴 수 있는 새로운 시도를 많이 하고 있다.
전통적인 한지 대신 대나무를 엮어 '성산별곡' 의 일부를 쓴 작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