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미디어, 수와 인간의 새로운 중개자

수, 집단의 의식을 비추는 거울

“‘많은 고릴라’, ‘17마리의 고릴라’, ‘약 20마리 정도의 고릴라’ 등의 표현 중 어떤 한 가지를 골라 이야기할 때, 그 밑바탕에는 우리의 관심, 이해관계가 깔려 있다. 말하자면, 우리의 관심과 이해관계가 우리가 세상을 향해 메시지를 발신하기 위해 선택하는 수로 표현되는 것이다.”
(< The Secret Lives of Numbers >, 서문 중에서)

골란 레빈(Golan Levin)을 포함한 몇 명의 아티스트들은 1997년부터 주기적으로 수의 인기도에 대한 새로운 데이터를 수집하기 시작해, 1998년 2월 인터넷 사용자들의 수에 대한 관심과 기호를 보여주는 일종의 ‘인터랙티브 이미지’를 런칭시켰다.
뉴 라디오 & 퍼포밍 아트(New Radio and Performing Arts) 사의 의뢰에 의해 웹사이트 Turbulence.org에 게재될 목적으로 진행된 이 프로젝트는 0에서 1,000,000까지의 정수에 대해 자동 검색을 행하고 각 수를 포함하고 있는 웹 페이지의 수를 계산해 그 데이터를 분석한 것.
역사적 사건이 일어난 날짜, 어떤 지역을 떠올리게 하는 전화번호나 우편번호, 제품의 모델명, TV 채널 등에 이르기까지 수와 관련된 모든 데이터가 분석 대상에 포함된다.

웹 페이지에 언급된 수를 통해 수의 인기도를 분석한 간단한 막대그래프를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인터랙티브 비주얼의 형태로 구현된 이 데이터는 사용자의 의도에 따라 다양한 탐색 방식을 가능하게 해, 수와 사회의 관계를 탐색하는 여행을 한층 흥미로운 것으로 만들어준다.
막대그래프를 스크롤하며 그래프의 전체적인 ‘형태’를 가늠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줌 인, 줌 아웃, 그래프의 영역 설정도 간단히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프로젝트는 단순히 세상에 대한 수의 지배력을 확인하는 데 그치지 않고, 우리 문화의 수리, 인지적 구조까지 발견하게 해 준다.

여기에서 우선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1에서부터 수의 인기도가 점점 떨어지고 있다는 것.
1에서 10까지의 작은 수들은 우리가 제일 먼저 배우는 수이고 가장 이해하기 쉽고 가장 사용하기 쉬운 수로, ‘접근성’이 용이하다는 점에서 인기가 높은 것으로 드러났다.
또한, 10을 단위로 인기도가 증가하는 데이터의 주기성은 우리가 생물학적으로 10을 기본으로 한 수의 체계에 기반하고 있음을 반영한다(손가락, 발가락은 각각 10개이다).

212, 486, 911, 1040, 1492, 1776, 68040, 90210과 같은 수가 다른 수보다 높은 인기도를 기록한 것은 이들 수가 전화번호(지역번호)이거나 세금의 형태, 컴퓨터 칩, 유명한 날짜, 텔레비전 프로그램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12345나 8888과 같은 수는 기억하기 쉽다는 이유로 빈도수가 높게 나타났으며, 80486, 68040 등에 대한 높은 관심도는 테크놀로지에 대한 관심뿐만 아니라 당시 그 테크놀로지의 사회적 위상에 대한 것도 말해준다.

레빈은 수에 대한 관심도 안에 우리 자신의 모습이 어떻게 반추되어 있는가를 질문하며, 1990에서 2002 사이의 수의 인기도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것은 이 시기, 웹의 성장 때문만이 아니라 일종의 시간적인 나르시시즘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이는 우리가 ‘현재’에 가장 관심이 많고 과거의 역사적 사건이 지니는 중요성과는 무관하게 ‘과거’에는 관심이 없음을 보여주는 반증이라는 것이다.
더욱이, 1990년대 이전의 역사적 시간들은 현재에서 멀리 떨어질수록 사람들의 관심사에서 멀어지는 것으로 나타나는데, 이러한 현상은 우리 기억의 생명을 측정할 수 있는지에 대한 가능성 혹은 역사적인 사건이 어떻게 우리 현재의 삶을 형성해왔는가에 대해 우리가 관심을 가지는 정도를 말해준다.

말하자면, 1600과 2002 사이의 곡선에서 우리는 우리 문화가 가지고 있는 ‘망각율(rate of forgetting)’이 어떤 이미지로 그려질 수 있는지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요컨대, 이들은 여기에서 집단의 의식이 수의 형태로 나타난 것이라고 본다. 이 프로젝트는 인터랙티브 비주얼의 형태로 이른바 ‘공공성’을 분석하고 있는 것이다.

글_김진경

www.turbulence.org/
Works/nums/

The Secret Lives of Numbers.
- 컨셉, 디렉션, 인터페이스 디자인 & 프로그래밍: Golan Levin.
- 인터페이스, 인포메이션 디자인: Martin Wattenberg.
- 데이터베이스 & CGI 프로그래밍(2002) : Jonathan Feinberg.
- CGI 프로그래밍(1997) : David Becker.
- 통계 컨설팅 : David Elashoff.
- 에세이, 리서치 : Shelly Wyneco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