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 (數) 3.

그리드와 反그리드 : 막스 빌과 엘 리시츠키를 중심으로

루이스 캐럴이 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1865)는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앨리스는 언덕에서 하는 일도 없이 언니 옆에 앉아 있는 것이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언니가 읽고 있는 책을 한 두 번 슬쩍 들여다보았는데, 그건 그림도 대화도 전혀 없는 책이었다.
“그림도 대화도 없는 책을 뭐 하러 보지?”
그래서 속으로 (날씨가 더운 탓에 너무 졸리고 몽롱해서 끙끙대며) 곰곰 생각하고 있었다. 일어나서 데이지 꽃을 꺾어 목걸이를 만들면 재미있을까 없을까 하고. 그때, 갑자기 눈이 빨간 토끼 한 마리가 앨리스 옆을 달려갔다.
(루이스 캐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시공주니어, 2001)

언젠가 한 소모임에서 그래픽 디자인의 분야적 특성과 디자이너의 역할에 대해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참석자 중의 한 명인 윤우석 님이 갑자기 “그림도 대화도 없는 책을 뭐 하러 보지?”라는 말을 툭 던졌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시작부분에 나오는 앨리스의 첫 대사이기도 한 이 말은 책이라는 매체가 제공하는 그래픽적 공간과 그것을 분할하여 다양한 차원과 세계를 보여주는 그리드에 대해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앨리스가 흰 토끼를 따라 땅 속 나라를 여행하며 갖가지 모험을 하듯이 그래픽 디자이너들 역시 그리드라는 ‘흰 토끼'를 발견한 후 단조로운 2차원 평면에 지나지 않을 책의 지면을 여러가지 차원과 관계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흥미로운 세계로 재구성해낼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림도 대화도 없는 책’일지라도 그래픽 디자이너들의 실험과 시도에 따라 얼마든지 시각적 재미를 불러일으킬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은 우리가 책이라는 매체를 생각할 때 단지 이야기적 속성이나 일러스트레이션이나 삽화 등으로 이루어지는 미술적 속성 이 외에 그래픽 디자인만의 고유한 형식 언어에도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음을 말해준다.

옆의 도판은 엘 리시츠키의 책 [예술의 사조들] 중 타이포그래픽 장의 기하학적 구조를 보여준다. 리시츠키는 책의 지면을 검은 괘선을 통해 분할하면서 강한 개성을 부여하고자 했다. 타이틀 페이지는 수평축을 기본으로 세 개의 부분으로 나누었는데, 이것은 이 책의 본문에 사용된 독일어, 불어, 영어 등 세 개의 언어를 고려한 것이다. 본문에서는 이 세개의 언어가 수직 괘선에 의해 나누어져 재배치되었다.

위의 도판은 타이포그래픽 장에서 사용된 그리드 구조가 어떻게 활용되고 있는가 하는 점을 보여준다. 엘 리시츠키는 이 책을 디자인하면서 앞부분의 타이포그래픽 장들의 레이아웃을 결정하고 나서 이와 동일한 질서와 구조를 뒷부분의 포트폴리오 형식의 페이지들에도 적용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관련하여 한가지 더 흥미로운 사실은 이 책을 쓴 루이스 캐럴이 옥스퍼드 대학의 수학부 교수로서 논리학에도 재능을 보였으며 그림과 사진을 무척 좋아했다는 점이다.
어린 시절부터 말장난, 체스게임, 인형극 같은 것에 관심을 두고 형제들과 잡지를 만들기도 했던 캐럴은 그 자신이 의식을 했는지 안했는지와는 관계없이 책이라는 가상공간이 지닌 그래픽적 특성을 아주 잘 이해하고 있었던 작가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만약 ‘그리드’라는 것을 단지 책의 지면과 관계된 눈에 보이는 물리적 공간의 구획과 계획, 그리고 배치의 문제만이 아니라 이야기의 내용적 구성단위와 같이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실재하는 비물질적 시간의 흐름 같은 것을 엮어내는 일종의 의식의 기본 단위라고 확장을 해서 해석을 해본다면 말이다.

그리드 시스템(grid system)은 그래픽 공간을 수평, 수직 축으로 구획하여 활용하는 일종의 모듈(module) 구조라고 할 수 있다.
모듈 관계는 미술이나 디자인 분야뿐만이 아니라 자연환경이나 생물체의 구조 속에서도 발견되는데, 모듈은 전체를 구성하는 데 기초가 되는 조합 가능하고 반복될 수 있는 기본 단위나 치수를 일컫는다.
건축이나 가구 디자인에서는 모듈이라는 말을 주로 사용하는 반면 그래픽 디자인에서는 그리드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그리드 구조는 그래픽 디자이너가 자신의 작업 전반에 대한 시각적인 계획(visual program)을 세울 때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그래픽 디자인의 역사(A History of Graphic Design)>라는 책을 통해 우리에게도 널리 알려진 미국의 그래픽 디자인 역사가이자 이론가인 필립 B. 멕스(Philip B. Meggs)는 그의 또 다른 저서인 <타입과 이미지: 그래픽 디자인의 언어(Type & Image: The Language of Graphic Design)>라는 책에서 그리드 구조를 바탕으로 한 그래픽 공간의 구성에 대해 설명하며 엘 리시츠키와 막스 빌의 예를 들고 있다.

멕스는 러시아 구성주의자인 엘 리시츠키가 1925년에 출판한 <예술 사조들(The Isms of Art)>과 스위스 출신의 건축가이자 화가이기도 했던 막스 빌(Max Bill)이 1940년에 디자인한 <모던 스위스 건축(Modern Swiss Architecture)>을 비교하면서 모던 디자인 어법의 기초를 마련했다고 평가되는 이 두 개의 기념비적인 작품에서 그리드가 어떻게 사용되었는지에 대해 도판과 글을 통해 그 내용을 상세하게 설명하고 분석을 했다.
아래 본문과 사진 캡션에서 언급된 엘 리시츠키와 막스 빌의 그리드에 대한 분석 부분은 필립 B. 멕스의 책 <타입과 이미지: 그래픽 디자인의 언어>의 내용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것임을 밝힌다. (Philip B. Meggs, Type & Image: The Language of Graphic Design, Van Nostrand Reinhold, 1992)

위의 도판에서 보여지고 있는 왼쪽페이지의 마름모꼴의 작품은 그리드 두 단 정도의 폭을 가지고 있고 오른쪽페이지 상단의 작품 역시 비슷한 가로 폭을 가지고 있다. 이 두 작품간의 균형 있는 배치를 위하여 리시츠키는 마름모꼴의 작품이 오른쪽의 작품보다 높게 위치하도록 배려하였다. 리시츠키가 이렇게 한 이유는 만약 두 개의 그림이 같은 높이에서 시작할 경우 마름모꼴의 작품이 시각적으로 아래로 쳐져 보일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왼쪽페이지의 레이아웃에서 마름모꼴의 작품과 아래쪽의 조각 작품 간의 균형과 관계 역시 매우 세심하게 고려되었는데 리시츠키는 마름모꼴 그림 속의 수직으로 내려온 어두운 면의 형태와 조각 작품과의 관계를 신중하게 고려하여 작품을 배치하였다.	위의 도판에서 보이는 왼쪽페이지의 레이아웃에서 엘 리시츠키는 말레비치의 사진과 그의 두 작품을 배치시켰는데 그는 이들간의 균형과 조화를 위해 세심하게 각각의 크기와 위치를 조정하였다. 오른쪽페이지에서는 단 하나의 작품만을 보여주는 가장 전형적 페이지 구성의 예를 보여주었다. 리시츠키는 페이지 중앙에 한 작품을 배치하면서 옆에 있는 왼쪽페이지와의 관계를 신중하게 고려하였고 양 쪽 페이지의 두 개의 작품은 각각 두번째 수평축을 기준으로 하여 배치하였는데 이로써 양쪽 페이지간의 통일감 있는 레이아웃이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엘 리시츠키의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첫 장은 11페이지 분량의 타이포그래피 부분이고 두 번째 장은 1914년부터 1924년까지 있었던 유럽의 주요 미술 사조와 운동을 작품 포트폴리오 형식으로 구성한 것이다.
엘 리시츠키는 자신의 작업에 모듈 구조의 질서를 부여하기 위해 이 책의 레이아웃을 모눈종이 위에 했고 서체는 그와 그의 동료들이 과학과 기술의 시대를 대변하는 합리성을 표현하는데 가장 적합한 것이라고 여긴 산 세리프체를 사용했다.
작품을 중심으로 한 포트폴리오 부분을 디자인하면서 그는 예술 사조의 이름 옆에 두껍고 검은 괘선을 배치하였고 페이지 번호는 그리드의 맨 바깥쪽 상단 부분의 수직선과 일직선 상에 놓이도록 계획함으로써 독자들이 쉽게 페이지에 관한 정보를 얻을 수 있게 했다.
또한 그는 많은 사진 이미지들에 실루엣을 부여하기 위해 바탕을 제거함으로써 각각의 사진들이 오브제로서의 특성을 강하게 지니도록 했다.
그리고 제시된 작품의 번호를 매우 크게 처리함으로써 디자인의 구조를 공고하게 하고자 했고 흰 여백 역시 화면 구성에 중요한 요소로 파악하고 이를 적절하게 활용했다.

엘 리시츠키는 세 가지 언어로 된 본문과 복잡한 시각재료들로 이루어진 <예술 사조들>을 디자인하면서 그리드의 구조와 수학적 개념을 적극적으로 사용하기는 했지만 이와 더불어 예술가 특유의 직관과 통찰력을 발휘하여 비교적 유연한 작업을 했다.
이에 반해 막스 빌은 건축가 출신답게 자신의 그래픽 디자인 작업에 절대적인 수학적 질서를 부여하고 이를 철저히 따르고자 했다. 그의 이러한 생각이 잘 드러난 디자인 결과물로는 1940년에 출판된 <모던 스위스 건축>이라는 책 시리즈가 있다.
이 책들을 디자인하면서 막스 빌은 사진과 타이포그래피를 확고한 그리드 시스템 속에 배치시킴으로써 책의 지면에 일관된 질서와 명료성을 부여하고자 했고 이러한 방식을 통해 디자이너의 화면 배치 의도가 아니라 책의 내용 자체가 더 잘 드러나도록 디자인을 했다.
이러한 시도를 통해 막스 빌은 그래픽 디자이너가 간단한 그리드 구조만으로도 얼마나 다양한 화면 구성을 해낼 수 있는지 보여주었다.
또한 그는 가장 엄격하게 적용된 그리드라고 할 지라도 그 적용에 있어서는 디자이너의 예리한 감각과 통찰력이 반드시 필요하며 그리드는 기본적인 틀을 제공할 뿐 각각의 요소의 크기와 위치, 다른 시각 요소들과의 관계 등을 결정하는 것은 디자이너 자신의 몫임을 분명하게 보여주고자 했다.

위의 도판은 엘 리시츠키가 포트폴리오 형식의 페이지들에서 그리드 구조를 어떻게 적용하고 있는지 잘 보여준다. 그는 그리드 구조를 기계적으로 적용하기보다는 각각의 요소와 내용에 따라 기본 골격은 유지하면서도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고자 했다. 그는 이미지들을 배치하면서 매우 세심하게 시각적인 조정들을 해나갔고, 균형 있고 역동적인 레이아웃을 위해 때때로 자신이 설정한 기본적인 그리드 구조를 스스로 깨뜨리기도 했다. 이 도판들은 포트폴리오의 2페이지와 3페이지인데 2페이지의 경우 영화제작자, 배우, 기타 장비들이 첫번째 단에 배치되었고 두번째 단과 세번째 단에는 필름의 조각들이 배치되었다. 3페이지를 디자인하면서 리시츠키는 첫번째 단의 기준선을 오른쪽으로 이동시켰는데 그것은 큰 그림과 작은 그림이 아래 위로 배치되면서 화면을 구성하게 되었기 때문에 그리드 구조 상의 기준선을 지킬 경우 시각적으로 좋지 않은 배치가 될 것이라 생각하고 전체 페이지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섬세하게 시각적인 조정을 한 것이다.

위의 도판에서 보여지고 있는 왼쪽페이지와 오른쪽페이지는 몬드리안 작품을 소개한 것이다. 왼쪽페이지의 52번 그림은 두 단 정도의 큰 크기인데 엘 리시츠키의 이 그림을 배치하면서도 역시 섬세한 시각적 조정 작업을 했다. 페이지 하단 부분에 위치한 인물의 팔이 그리드에 바짝 닿아 있는 반면 위쪽의 그림은 오른쪽으로 조금 들어와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펼친 페이지의 디자인에서 52, 53, 54 등의 번호들은 화면의 이미지들이 시각적으로 유기적인 연결관계를 갖게 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20세기 그래픽 디자인의 모험을 이끌어온 그리드라고 하는 ‘흰 토끼’를 둘러싼 모더니스트와 포스트모더니스트들 간의 논쟁은 현대 물리학에서 이야기되는 파동-입자 이중성의 역설을 떠올리게 한다.
고전 물리학에서는 도저히 양립할 수 없다고 여겨지던 것이 양자 물리학에서는 상보성이라는 이름으로 공존하게 된 것이다.
1927년에 상보성의 원리를 발견한 보어는
"한 물체가 파동으로 행동하는 것과 입자로 행동하는 것은 양립할 수 없지만, 그 물체의 성질을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다 필요하다. 이 새로운 상황을 '상보성'이라고 이름을 붙이자. 그리고 어떤 물체가 입자로 행동하느냐 파동으로 행동하느냐는 그것을 바라보는 장비가 무엇이냐에 따라 달라진다."
라고 말했다.
보어가 말한 '상보성'의 개념을 그래픽 디자인에 접목 시켜보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막스 빌이나 엘 리시츠키와 같은 디자이너들에 의해 구축된 모던 디자인의 그리드 형식을 따르든 아니면 에미그레나 데이빗 카슨 등과 같이 포스트모던한 시도를 하는 디자이너들의 반 그리드적 어법을 따르든 그것은 이제 더 이상 굿 디자인을 성취하기 위해 절대적으로 따라야 하는 어떤 원리나 원칙, 규범이 아니라 디자이너에게 주어진 다양한 형태의 디자인 과제들이 내포하고 있는 디자인적 문제 상황이나 그 특성, 그리고 조건에 따라 선택되어질 수 있는 일종의 디자인 어휘이자 방법론상의 문제라는 것이다.

위의 도판은 막스 빌이 <모던 스위스 건축>이라는 2절 크기의 시리즈물을 디자인하면서 사용한 그리드이다. 첫번째 그리드는 사진을 두 단으로 배치하기 위한 것이었다. 왼쪽의 단은 8유니트(unit) 크기의 세 개의 그림을 배치하기 위한 것이었고 두번째 단은 높이가 8유니트이고 폭이 12유니트인 세 개의 그림을 배치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그리드는 정사각형의 포맷과 35mm 카메라 사진의 포맷을 동시에 고려한 것이었고 사진들간의 여백은 가로는 2유니트씩, 세로는 1유니트씩으로 이루어졌다. 두번째 그리드는 왼쪽 그리드의 반사 이미지로 이것은 사진 작품을 보여주는 페이지 뒤의 텍스트 페이지로 사용되기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넓은 단이 왼쪽으로 배치된 것이다.

이 도판은 세 언어로 된 간행물의 타이포그래픽 페이지인데 이 레이아웃의 경우 특히 독일어 사용자들을 위해 배려된 것이다. 독일어 본문은 조금 큰 글씨로 좌측의 넓은 단에 위치하고 있고 영어와 불어 본문은 우측의 좁은 단에 작은 글씨체로 디자인되었다. 막스 빌은 이 책자를 디자인하면서 텍스트 페이지이건 사진 중심의 페이지이건 간에 수평적으로는 모든 페이지가 동일한 선상에서 시작하게 하려고 배려했다.

엘 리시츠키나 막스 빌 등 20세기 초(중반에 활동을 했던 디자이너들의 실험적인 작업들을 통해 완성된 그리드 시스템과 그에 바탕을 둔 모던 디자인의 형식원리는, 하지만 20세기 후반에 들어 비판과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미국의 대표적인 그래픽 디자인 전문 잡지인 <프린트Print>지의 1996년 5/6월 호에는 엘렌 샤피로와 마시모 비넬리의 인터뷰가 실렸는데 이 기사의 제목은 “더 이상 전쟁이 없기를!”이라는 것이었다.
당시 미국 디자인계에는 모던 디자인의 전통을 일종의 도그마로서 규정하고 ‘그리드의 감옥’이라고 비판하면서 그리드를 해체하고 포스트모던 이론에 기초한 디자인 시도들을 해나가려는 젊은 세대 디자이너들과 이들의 작업을 ‘쓰레기’, ‘문화로부터의 이탈’, ‘새로운 미학의 카오스’ 등으로 부르며 새롭게 등장한 흐름을 거부하고자 하는 기성세대 디자이너들 간의 긴장이 한창 고조되어 있었다.

‘모더니스트 대 포스트모더니스트’, ‘그리드 대 반(反)그리드’ 논쟁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시기의 논쟁을 주도했던 것은 크랜브룩 아카데미와 에미그레 잡지를 중심으로 활동을 했던 디자이너들과 데이빗 카슨 등의 젊은 디자이너들이었다.
그리고 당시에 그들이 제기했던 문제는 궁극적으로는 과연 '굿 디자인'이란 무엇이고 또 이를 측정하는 기준과 잣대는 무엇인가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그리드를 반드시 사용해야만 굿 디자인이라는 식의 경직되고 편협한 사고와 매너리즘에 빠져 상투적이고 지루한 디자인 표현방식만을 답습해온 기성 디자이너들에 대한 일종의 이의 제기였지 모던 디자인이 개발해온 디자인 어휘 자체에 대한 일방적인 거부는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누군가 ‘정치는 생물이다’라는 말을 했다고 하는데 디자인 역시 끊임없이 변화하고 생성되고 움직이는 생명체라고 할 수 있다.
시간의 흐름 속에 생생하게 살아 숨쉬는 디자인의 존재를 우리가 포착해서 알아 볼 수 있는 방법은 마치 한 장을 스냅 사진을 찍듯 한 찰나를 정지시켜 주의 깊게 살펴보는 방법 밖에는 없다.
상대론적 우주론과 양자론 등 20세기 물리학의 최선두에서 활동을 해온 프린스턴 대학의 물리학 명예 교수인 존 휠러(John Wheeler)는 "우리는 광자(光子)들이 여행을 하고 있는 동안에 광자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물을 권리가 없습니다.
어떤 소립자도 기록되기 전까지는 현상이 아닙니다"라고 말했다고 하는데 문득 디자인이 끊임없이 여행하고 있는 광자라면 디자인 연구자는 그 움직임과 흐름을 기록하여 현상으로 드러내어 보여주는 사람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막스 빌의 그리드를 이용하면 한 페이지에 1장부터 6장까지의 사진을 배치할 수 있다. 사진 아래쪽의 2 유니트씩의 여백은 사진 설명을 위한 것이다. 바탕으로 2유니트 정도 떨어져서 페이지 하단에 그어진 선 안에는 건물의 이름과 건축가의 이름을 배치하였다. 각 페이지들은 그리드에 맞추어 6개의 사진, 4개의 사진, 2개의 사진, 3새의 사진 등이 배치된 경우들을 보여준다. 하나의 사진을 크게 배치한 경우 막스 빌은 왼쪽 하단 부분을 비워둠으로써 전체적인 지면이 답답하지 않고 안정감이 있어 보이도록 했다. 그리고 사진을 배치할 때 크기만이 아니라 사진 안의 형태들에도 주목을 했다. 예를들어 교회 건물의 첨탑들이 있는 사진의 경우 그 첨탑의 모양과 크기, 위치 등을 고려하여 사진을 배치하였다. 세 개의 사진이 들어간 페이지 디자인의 경우 하단의 두 개의 사진이 옆 페이지와 비교해 볼 때 2유니트 정도 위쪽에 배치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맨 위의 사진 역시 가로 폭은 정해진 그리드를 따르고 있지만 세로 높이는 그리드의 기준선과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막스 빌이 이렇게 디자인을 한 것은 각각의 사진의 특성과 전체 화면 구성의 균형을 맞추기 위한 것이었는데 그렇다고 해서 이 페이지의 구성이 수학적인 질서를 파괴한 채 마음대로 배치된 것은 아니었다. 위의 사진부터 차례로 그 유니트 구조를 살펴보면 12 : 6 : 8 : 4 의 수학적 질서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 페이지에서 빌은 그리드의 수직축은 그대로 지킨 반면 수평축은 2유니트씩 변형시켰고 그 결과 이 페이지는 전체적인 책자의 프로그램과 부합하는 수학적 질서를 유지하면서도 각 사진의 특성을 잘 살려낸 화면 구조를 갖게 되었다.

글_강현주(인하대학교 미술교육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