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렌드 trend

2001년 오늘, 일상을 지배하는 것들

십진법적 사고에 익숙해서인지 우리는 시간의 흐름을 십년, 백년, 천년 이렇게 나누고, 그 때마다 전과 후를 정리하며 상징적인 의미를 끄집어낸다.
그런 이유로 20세기의 끝자락에서 법석을 떨며 예견했던 21세기의 스테레오타입,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 따위들.
하지만 20세기의 자락을 갓 넘어서인지 그런 징후들은 크게 드러나 보이지 않는다.
뭔가 그럴싸한 것을 상상했던 사람에게는 다소 실망스러우리 만큼 우리는 여전히 된장찌개에 밥 먹으며 학교도 가고 직장도 다닌다.
전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이런 모습들은 지극히 평범하다.그렇다. 일상은 그렇게 ‘평범한’ 모습으로 조금씩 진화한다. 그리고 우리의 일상은 현재의 우리의 모습을 가장 솔직하게 드러낸다.
그렇다면 과연 2001년 오늘, 일상을 지배하는 것들은 무엇인가? 그리고 역으로, 그것들은 우리에게, 혹은 타인에게 무슨 이야기를 해주는가? 이 지면에 그 답을 조심스럽게 풀어놓았다. 물론 그것은 정답이 아니며 기승전결도 없지만 간과되기 쉬운 내가 사는 시대에 대한 ‘문화읽기’이다.

운동화
영화 [워킹걸]의 첫 장면을 보면 맨해튼의 워킹우먼인 멜라니 그리피스가 나이키 운동화를 신고 ‘Let the River Run’이라는 음악을 배경으로 활기차게 출근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물론 회사에 도착해서는 예의 굽이 높은 정장 구두로 갈아 신지만. 이 철지난 영화와는 달리 요즘 운동화는 모습을 달리하여 금지구역도 없이 어디든 간다. 우주선, 비행기 기차, 자동차, 자전거가 데려 줄 수 없는 곳으로.
근무환경이 유동적으로 변하고 자연스럽고 편안한 캐주얼 의류가 사회적으로 허용되면서 불편함을 감수한 미(美)나 예의를 요구하는 상황은 드물어지고 있다. 이에 따라 애니메이션 캐릭터가 그려진 운동화에서부터 운동화의 기능성에 구두의 패션을 접목한 스니커즈(Sneakers, 살금살금 걷는 사람이란 뜻으로 밑창이 얇고 가벼운 운동화의 통칭) 스타일에 이르기까지, 운동화의 범위는 넓어지고 있다.
물론 운동화라고 모두 편한 것은 아니다. 모양새는 편안해 보이지만 신어보면 구두보다 더 불편한 운동화도 많다. 오히려 운동화는 기능으로서보다는 그 자체가 주는 상징성이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것일지 모른다.

테이크 아웃 푸드 take-out food
슬로우 푸드(slow food) 대회라는 것이 있다. 누가 더 달팽이처럼 느려터지게 음식을 만드느냐가 입상의 관건이다. 보다 천천히 보다 섬세한 공정으로 만들어야 하는 슬로우 푸드는, 한때 서양요리의 대명사나 젊은이의 세련된 음식으로 여겨지기도 했지만 지금은 탄수화물과 지방이 만난 열량덩어리로 인식 전환이 된 패스트 푸드의 안티. 하지만 매 식사마다 장인정신을 발휘하여 음식을 만들 수는 없는 노릇. 오히려 현실적인 제안이라면 편리함을 버리지 않고 영양과 맛을 취하는 타협적인 방식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각광받는 것이 테이크 아웃 푸드(take-out food). 비록 종이컵에 담아주지만 에스프레소 본연의 맛과 향을 그대로 살리고 있는 테이크 아웃 커피, 백화점 식품코너나 대형할인점에서의 반조리 식품이나 완전조리 식품들... 외식하는 것과 무슨 차이냐는 정통 가정식 고수자들이라면 ‘라면을 먹어도 역시 집에서’라는 말을 상기해보라. 테이크 아웃으로 사온 중국 요리에 쌀밥과 김치를 곁들여 수저를 놓으면 어설프게나마 가정식이 된다.

아로마용품 aroma therapy
스트레스의 강도와 지속성에 따라 이를 해소하는 방법도 가지각색. 술, 담배는 물론 온종일 비디오게임에 몰두해 보라. 순간적인 해소는 될지언정 종국엔 더 심한 허탈감과 피로에 싸이게 된다. 그래서 지속적이고 후유증 없는 스트레스 해소법이 필요하다. 휴식과 안정을 도모할 수 있는, 이른바 아로마 세라피(aroma therapy)도 그중 하나다.
각종 식물의 꽃, 줄기, 열매, 수액 등에서 추출한 고농축 에센스가 지닌 효과를 이용한 향기요법으로, 램프로 열을 가해 오일을 휘발시키는 공기발산법이 정식이다. 선이나 명상같은 다른 정신요법에 비해 시간이나 노력을 크게 투자하지 않고 손쉽게 접근할 수 있기에 많은 사람들이 선호한다. 기분 좋게 향수를 뿌리거나 화장실에 포푸리 바구니를 놓아두는 것도 일종의 아로마 요법으로 볼 수 있다.
천연의 식물로부터 만들어진 아로마용품들은 인간이 첨단의 인공물 속에 둘러싸여 있어도 역시 자연으로부터 왔음을 가장 원시적이면서 말초적인 후각을 통해 상기시킨다. 경제적인 삶의 향상을 배경으로 그 질적 측면에 대한 관심은 새삼 ‘몸’을 발견했다. 육체적인 몸은 물론 정신적인 몸을.

피 디 에이 pda
정보. 이 말처럼 현대인의 화두가 되는 말이 또 있을까?
최근 몇 년 사이 각종 언론과 매체에서 가장 빈번하게 사용된 말이 아닐까 싶다. 물론 지식가공 분야에 종사하는 업종이 많아지면서 ‘정보’는 더욱 중요한 재화의 가치가 되었다.
하지만 정보는 밥벌이만 좌지우지 하는 것은 아니다. 보다 재미있게 놀며, 더 알차게 쇼핑하며, 보다 더 충실하게 여가를 보내는 데 있어서도 중요하다.
정보의 생명은 첫째 정확, 둘째 속도이건만 속도가 워낙 빨라진 시대라 오늘의 정보가 내일은 가짜가 될 경우는 얼마든지 있다. 그래서 데스크탑 컴퓨터를 떠나 어디에 있어도 정보를 잡고 싶다. 손바닥에 들어갈 정도의 작은 크기의 PDA(Personal Digital Assistance, 개인용 휴대 정보 단말기)는 개인정보나 일정관리 뿐 아니라 PC 통신, 인터넷 접속, 게임 기능을 수행한다.
이 개인용 디지털 비서는 내가 언제 어디에 있건 ‘정보’를 모아준다. 정보가 날고 뛰어 봐야 내 손바닥 안. PC와 달리 ‘바로 지금’의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 이 녀석은 항상 나와 함께 있다.

시스템가구 system furniture
집안의 주위를 둘러본다. 컴퓨터, 텔레비전, 오디오, 전화, 믹서기, 다리미...그리고 널려진 잡동사니와 함께 전원에 연결된 복잡한 전선들. 마치 가전제품과 생활용품 쇼룸을 방불케 한다. 현대를 살아가려면 여러 물건들과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 그러나 ‘현대인의 필수품’이란 선전문구가 붙는 물건 치고 진짜 필수품은 별로 없는 듯하다. 하기야 필수란 각자가 느기는 상대적인 것이니까.
집안의 물건들이 신분이나 지위를 말했던 시대에는 가장 눈에 띠는 곳에 냉장고 따위를 놓는 집도 있었지만, 요즘은 물건들을 보이지 않게 하는 기능에 더 충실해졌다. 계속 늘어만 가는 상대적인 필수품들을 현명하게 끼고 살 수 있는 대안, 그게 바로 시스템 가구이다.
물론 시스템 가구는 원하는 공간연출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선 개성의 표출이라는 측면이 있지만, 점점 도구가 많이 필요한 현대인의 주거생활에서 수납이 중요한 개념이 되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합리적인 공간으로서 주거에 대한 의미 강조, 거기에 나름의 취향에 따라 일정한 디자인 라인을 가질 수 있으니 일석이조.

아바타 캐릭터 avatar character
“나의 이름을 부를 때 나는 꽃이 되었다”. 정체성에 대한 인간의 욕구는 현실에서 뿐 아니라 가상세계에서도 여전한 듯하다. 오직 이름(아이디)만으로 꽃이 된다? 가상공간은 아바타를 띄워야 꽃이 될 수 있는 곳이 되었다.
아바타(avatar)는 가상세계에서의 인간적 교류가 현실의 그것 이상으로 확대되면서 필요하게 된 자신을 대표하는 가상 육체. 채팅시 사이버 캐릭터를 하나쯤 사용하는 것은 10대들에겐 이젠 낯선 것도 아니다.
처음에 이 캐릭터들은 반바지와 T셔츠 차림이었지만 요즘엔 자신의 아바타를 꾸미기 위해 옷과 장신구를 사고, 이를 구해주는 아바타 엠디라는 신종 직업도 생겨났다. ‘잘 차려 입은’ 캐릭터일수록 채팅 파트너들이 몰리기 때문이다.
아바타는 시각과 개성 강조의 시대적 특성이 가상세계에서 현현한 것이다. 가짜현실 속에서 사람들은 현실에서 충족될 수 없는 자신에 대한 모습이나 이미지를 단순히 머리 속 공상으로만 그치지 않는다. 또 다른 자아인 아바타를 통해 지킬박사와 하이드처럼 다중인격자와 같은 생활도 가능한 것이다. 다른 인생을 산다는 것, 그러면서도 그 속에 자신의 정체성을 부여할 수 있다는 일종의 자기표현의 욕구로서 아바타인 것이다.

디지털카메라 digital camera
기본적으로 일반 카메라와 디지털 카메라의 차이란 저장방식에 있다. 피사체를 조준하고 셔터를 누르는 기계적인 과정은 같지만 전자는 현상과 인화라는 화학적 절차에 의해, 후자는 데이터의 수치화로 이미지를 저장한다. 그러나 이 간단한 저장상의 기술의 차이가 기능에서 엄청난 차이를 몰고 왔다.
특히 복사가 진행될수록 원본의 이미지와 멀어지는 카메라와 달리 디지털 카메라는 원본과 복사본의 질적 차이가 없는 수많은 쌍둥이들을 만들어낸다. 그러기에 필름이란 개념도 필요 없다. 그림파일로 저장되어 컴퓨터와 연결, 손쉽게 여러 곳에 마음대로 전송할 수 있으며, 반영구적으로 사진을 읽고, 지우는 조작마저 가능하다.
바로 이 때문에 디지털 카메라가 등장할 당시 일반 소비자들은 놀라움으로, 기존의 카메라 관련 업체나 전문 직업인들은 우려로 반응했다. 디지털 카메라의 복제력, 전송력, 호환성, 경제성은 전통 카메라 산업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을 듯했다.
그러나 지금은 적대적으로 보는 시선보다는 공존의 눈길이 우세하다. 카메라가 디지털 카메라에게 넘겨준 활동 영역은 일부, 예컨대 저널이나 자료용으로, 또한 친지에게 보내는 인사장이나 우정을 나누는 스티커 사진 등에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디지털 카메라는 ‘0’과 ‘1’이라는 가장 미니멀한 방식으로 우리의 삶을 저장하며 편집한다.

글 _ 김의경 객원기자
 

운동화

테이크 아웃 푸드

아로마용품

PDA

시스템가구

avatar character

digital camer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