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지면서 보세요."
‘아티스트북(Artist Book)’이라는 흔치 않은 장르의 전시를 하는 인사동의 화랑을 들어서자 아기자기하게 진열된,
때로는 걸려 있는 작은 책들을 만날 수 있었다.
“만지면서 보라구?”
갑자기 손에 든 짐들이 거북해지면서 두 손을 자유롭게 해제시켰다.
그리고 책 앞으로 바짝 다가갔다. 만지고...책장을
넘기고...실을 풀었다...묶었다...뒤집었다...실로 한 땀 한 땀 종이를 꿰맨 책들...손에 느껴지는 한지의 부드러운
촉감...여러 가지 형태...
그리고 책갈피마다 담겨 있는 소박하고 잔잔한 생활의 메시지들...
텍스트를 읽지 않고서도
그 형태만으로 메시지를 교감할 수 있는 다양한 책들은 그렇게 낯선 사람들에게 자그마한 목소리로 먼저 악수를 건네왔다.
“책은 보는 사람에 의해 열리고 닫히는 촉각적인 대상입니다. 보는 사람의 적극적인 개입이 없으면 만남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손으로 만지고 페이지를 넘기며 자유롭게 보는 속도를 조절하면서 상상의 시간을 끼워넣을 수도 있고, 책을
덮음으로써 그 속에서의 경험을 안전하고 비밀스럽게 보관할 수도 있는 일대일의 친밀한 커뮤니케이션을 기본으로 합니다.”
“이것도 책인가요?”
작가 차정인 씨가 가장 많이 받는 질문 중 하나다.
94년 가을에 아티스트북을 처음 접한 후, 첫번째 개인전을 열기까지
그는 아티스트북이라는 장르에 흠뻑 취하고 가능성을 실험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새록새록 펼쳐나가면서 아티스트 북에 대한
그만의 정의를 내리기도 한다.
“책은 다른 물건들과 마찬가지로 물리적인 형태가 개념적인 것들의 몸을 이루고 있는 대상입니다.
즉, 책은 보이지
않는 내용을 담고 있는 보이는 물건입니다. 지면에 2차원의 형태로 얹혀 있는 문자나 그림 뿐 아니라 만져지고 움직이는
구조가 동시에 메시지가 될 수 있다는 접근... 이것이 아티스트북의 출발점입니다.
책의 확장된 개념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아티스트북은 책을 만드는 주체가 누구인가에 따라 결정되기도 한다.
보통의
대량 인쇄되는 책들은 컨텐츠를 생산하는 작가와 편집자들에 의해 책의 전체적인 컨셉이나 꼴을 결정지은 다음 디자이너에게
작업을 의뢰하기 때문에 이미 한정된 사각의 틀 안에서 시작하는 셈이다.
그러나 아티스트북의 주체인 작가는 책의 형태로부터
출발하여 거기에 맞는 컨텐츠를 고르거나 작업할 수도 있고, 또한 자신이 구상하는 컨텐츠에 가장 적합한 형태를 찾아서
그 속성에 따라 다양한 소재(종이나 천, 비닐, 나무 등)가 주는 각각의 질감과 제본방식(다양한 수제본 방식으로 접거나
붙이거나 실로 꿰매거나 바인딩 등), 인쇄방법 등을 통하여 내용과 형식의 연속성과 움직임의 가능성을 총체적으로 기획할
수 있다.
이러한 작업 과정을 통해 완성된 아티스트북은 다양한 외형적인 형식을 통해 온몸 구석구석 주제 의식을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책과는 사뭇 느낌이 다르다.
‘책은 읽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만지고 느끼고 가지고
노는 유희의 오브제로서 재탄생되는 것이다. 특히 아티스트북의 형식이 다양하고 나날이 새로운 컨셉의 책이 탄생할 수
있는 것은 작업에 임하는 아티스트들의 배경이 다양하기 때문이다.
“제 경우에는 시각디자인을 전공하고 오랫동안 그림책에 일러스트레이션 작업을 했던 경험이 자연스럽게 책에 적용됩니다.
예를 들면 재료의 감각, 좌우 페이지, 텍스트와 이미지, 공간과 시간, 그리고 움직임, 제본방식 등 책의 여러가지
요소들을 담아내고자 하는 사고와의 관계 속에서 선택되고 조절되면서 조화를 이루게 됩니다.
그래서인지 차정인 씨의 책에는 묘한 매력이 있다.
어렸을 적 뛰어놀던 놀이에 대한 기억, 일상에 지치고 바쁜 나날들
속에서 부부간에 느끼는 소박한 생각, 그리고 왕자와 공주가 나오는 동화책의 내용까지...잃어버린 기억의 파편들이 다시
퍼즐 맞추기를 시도한다.
“아주 사소한 사물이나 기억을 실마리로 작업을 시작합니다. 때로는 실조각이나 똑딱단추로부터 우정이나 남녀간의 만남
등의 이야기가 풀리기도 하고, 화장실에서의 기억이나 여성에 대한 사회적인 시각, 편견 등이 책의 모티프가 되기도 합니다.
책을 매체로 주변과 일상에 대해 이해하고 해석함으로써 사람 사는 모습들을 다양하게 펼쳐보이고 싶었습니다.”
공감하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못하는 사람도 때론 있을 수 있겠지만, 차정인 씨는 책을 통해 가치관이나 문화적 차이
등 사람간의 차이를 인정하게 되는 그런 소박한 얘기들을 나누고 싶어 한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그의 작업을 보면서
친근하게 느끼고 자신의 이야기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 같다. 때로는 ‘삶의 질곡’이 작품에 도움이 된다는 차정인 씨는
두 아이의 엄마이며 대학의 강사이자, 일러스트레이터, 북디자이너로서 다중의 삶을 꾸려나가고 있다.
그러한 생활을 통해
느끼는 여러가지 문제의식과 생각들이 어느새 작업노트에 빼곡히 기록되고, 몇 해가 지나 다시 녹녹한 삶의 이야기로 풀어낼
때쯤이면 자그마한 책들은 또 다른 모습으로 사람들을 향해 다시 한 번 악수를 청하리라 기대한다.
작가가 말하는 작품 이야기
1_ 여성
마치 양파 껍질을 벗기듯 姓, 妙, 婚, 姻, 姙, 好 奸 娼 여자의 부(部)를 품고 있는 한자들을 모아보니
기가 막히다. 자의적인 해석이라 하더라도, 이 글자들의 영향은 무시할 수가 없다.
왜 누가 이런 글자를 만들고 유효기간은
언제까지인가?
2_ 잡힐까?
매일 아침 신문을 펼치면 보기 싫은 뉴스들이 가득 차 있다. 매일 이렇게 잡아들이고 부패방지법도 만든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이제 없어질 때도 되었는데 잡으려고는 한 것일까? 이런 생각을 책으로 만들어본다.
3_ 한조각의 실
어릴 적 기억과 장난기, 그리고 빈번한 우연을 기억하면서 이 책을 만들었다.
4_ 아티스트 북, 또는 북 아트라는 이름으로 만든 책들...
단순한 마음으로 세상을 살면서 스스로 묻고, 생각의 끄트머리를 붙들고 씨름했던 ‘그냥 하는 이야기들’이 담담하게 묻어난다.
작고 소박하지만 참 묘한 매력을 가진 이 ‘책’이라는 통로로 내 이야기와 생각과 마음을 흘려보낸다.
5_ 일상=그네타기
매일은 다르다고 생각하면서도 어느새 비슷한 일상을 한 주 단위로 반복한다. 그 안에 겁나기도 하고 즐겁기도 하고 그저
습관처럼 흔들리기도 하면서 그네를 타는 느낌이다. 여러 사람이 해준 응답으로 각각 그네 모양의 책을 만들어보았다.
6_ 작업노트
생각은 항상 자유롭다. 잡아놓지 않으면 날아가버린다. 그래서 항상 기록을 한다.
눈에 잡힌 것들, 생각을 자극한 것들, 손에 느낌을 준 것들은 그래서 내 노트에 잡힌다. 나중에 이것들은 여러 과정을
거쳐서 내 작업 속으로 들어온다.
차정인은 이화여대 생활미술과와 대학원에서 시각디자인을 전공하고 일러스트레이터,대학강사로 일했다.
1998년에 영국
캠퍼 웰 컬리지에서 북아트 대학원을 졸업했다. 현재 일러스트레이터,북디자이너로 활동하면서 한국예술종합학교에 강의를
나가고 있다.
글_양난영 편집장
|
designdb Home > designdb 잡지 > 175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