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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시대의 사무실

| 노동의 외형과 내용, 얼마나 변화했나
오늘날 직장이 있는 대다수 일반인들에게 노동 공간은 대개 사무용 책상과 의자, 컴퓨터, 주변 동료들이 함께 북적대는 사무실인 경우가 많다.
뉴욕 월스트리트의 대형 주식투자회사나 서울 한복판의 조그마한 소프트웨어 사무실이나 풍경은 크게 다를 것이 없다.
산업의 발달에 따라 노동의 외형은 변해왔을지언정, 정해진 시간에 출근하여 점심시간 1시간 가량을 제외한 평균 8시간을 사무실 노동 공간에서 보내는 정신 노동자들, 상업이나 육체 노동자들이 투여하는 노동의 내용(content)은 예나 지금이나 별반 달라진 것이 없다.

디자인이 노동환경을 개선할 수 있다고 하는 계몽적 선언이 처음 등장한 시기는 모더니즘이 대두하기 시작한 20세기 초엽.
‘표준화’와 ‘기능주의’라는 모더니즘의 두 핵심 키워드는 디자인의 획일화와 창조적 제한성을 우려한 당시 일부 디자이너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960년대까지 계속되었다.
특히 오피스, 혹은 노동공간에 대한 디자이너들의 관심이 쏠리기 시작한 때는 기업 아이덴티티(CI, Corporate Identity) 디자인이 다국적 기업들의 비즈니스 전략의 중요한 요소로 대두하기 시작한 제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라 할 수 있다.
기업 아이덴티티 디자인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사무실 환경은 기업 이미지와 걸맞는 효율적이고 쾌적한 노동 공간으로 개조되기 시작했고 사무용품 및 인테리어 디자인에도 관심이 쏠리기 시작했다.

이탈리아의 올리베티(Olivetti)의 세련된 아이덴티티 디자인과 사무용품들은 제2차 대전부터 급성장하기 시작한 미국의 IBM이 고유의 단순, 간결하고 기능적인 기업 이미지와 제품 디자인 철학을 구축하는데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
‘액션 오피스(Action Office)’ 시스템으로 잘 알려져 있는 허먼 밀러(Hermann Miller) 사의 로버트 프롭스트(Robert Propst) 사무실 디자인은 60년대부터 오늘날까지 현대적인 사무실 공간의 전형으로 자리잡아왔다.
기능적이고 단순한 형태의 책상과 서랍 및 책꽂이 공간, 팩스,전화기,타이프라이터 등 각종 통신기기가 급격히 증가한 현대의 역동적 사무환경에 맞는 구조와 동선을 고려했다고 평가된다.

1960 -70년대에는 특히 스칸디나비아 디자이너들을 중심으로 인체공학적 디자인이 오피스 디자인에 적잖은 기여를 했다.
헨리 드레이프스(Henry Dreyfuss)와 닐스 디프리엔트(Niels Diffrient)는 무엇이 노동하는 인체에 편안한가를 과학적으로 제시한 대표적인 디자이너들이다.
그 덕분에 지난 30여 년간 사무용 가구 디자인업계와 생산업계는 앉아서 편안한 의자를 고안하는 것 외에도 다리받침대, 머리받침대, 신소재, 안정감을 주는 조명효과를 지속적으로 개발하여 인간의 정신적, 신체적 안정에 기여하려 애썼다.

|| 누가 감히 미래를 제시할 것인가
오늘날 도회지에 사는 대다수의 현대인들이 하루 8시간 이상씩 일하며 보내는 장소는 일반 오피스 공간. 하지만 상당수의 현대인들은 정해진 책상과 사무실을 두고 자동차, 비행기, 호텔, 공항 등 사무실 외 공간에서 일을 처리해야 하는 이른바 현대판 유목인들인 경우가 많다.
이동전화기로 연락을 주고받고 휴대용 팜탑이나 랩탑을 이용해 업무를 처리하는 이들은 그래서 그 누구보다 통신기술에 크게 의존하는하이테크족들기도 하다.
하지만 국가나 지역마다 서로 다른 통신 시스템, 모뎀 연결성, 텔레비전 수신 시스템, 한정된 배터리 사용시간 등 시간과 기술적 환경에 결정적인 영향을 받아야 하는 떠돌이 일꾼들에게 휴대와 사용이 편한 전자장비를 안겨주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이 분야에 관심 있는 디자이너들은 공공 공간에 인터넷 컴퓨터 설치라는 기초적인 아이디어를 비롯해서 자동차와 기차 실내 인테리어의 혁신, 공항과 기차역을 편하고 효율적으로 오갈 수 있는 대안적인 교통 디자인 시스템과 혁신적인 휴게소 설계 디자인으로 아이디어를 확장해 보여주기도 한다.

이미 1999년 프라다 스포츠(Prada Sport)가 추동 콜렉션의 일부로 선보인 바 있는 하이테크 나일론 의상디자인과 프랑스 텔레콤의 휴대용 컴퓨터가 부착된 ‘커뮤니케이션 스카프’나 ‘휴대용 접는 컴퓨터 키보드’ 등은 미래주의적 이미지를 쫓는 젊은이들을 겨냥한 업체들의 마케팅 전략이 엿보이는 제품들이다.

미래의 노동 공간은 어떤 환경 속에서 어떤 디자인 솔루션을 요구할까?
지난 2월 8일부터 4월 22일까지 뉴욕 근대 미술관(Museum of Modern Art New York, 이하 모마)에서 열린 [일의 영역 Workspheres]전은 이러한 질문을 제기하고 나아가 해답까지 제시한다.
노동과 관련된 모마 자체의 일부 콜렉션과 함께 미술관이 선정한 6개의 디자인팀이 이번 전시를 위해 특별히 제작한 작품들과 컨셉 프로젝트들이 선보였다.
‘공식적인 오피스(Official Office)’ ‘떠돌이 오피스(Nomadic Office)’, 그리고 ‘가정 오피스(Domestic Office)’라는 세 가지 주제로 오피스의 구조와 직업 유형의 미래를 예측한다는 취지에서 전시된 것이다.

||| ‘일의 영역’전을 통해본 미래의 사무실
로텍 건축사(LOT/EK Architecture) 팀이 제시한 [인스피로 테이너스 Inspiro-tainers]는 화물 비행기용 컨테이너(LD3)를 오피스 공간으로 개조한 멀티미디어 박스이다.
제프 러이셸(Jeff Reuschel) 외 여덟 팀이 참여한 [마인드 스페이스 Mind’ Space]는 “사고와 지식은 일하는 사람의 인지적 본질과 가치관을 대변한다”고 하는 그다지 쉽지 않은 슬로건을 내걸고 미래 노동 공간의 인터랙티비티, 인간의 정보 습득 및 학습 능력, 기억력과 주의력과 같은 개념들을 드로잉과 스케치로 보여주었다.

스페인 출신이면서 베를린에서 활동하고 있는 마르티 귀세(Marti Guixe)는 [H!BYE]라는 영양 씨앗을 통해 미래의 노동환경에서 창출될 새로운 음식문화 디자인 컨셉을 선보였다.
마르티 귀세에 따르면 유목적인 노동형태가 증가하게 될 미래의 노동환경에서 사람들은 한 곳에 머무르지 못하고 움직여야 하는 플래시-타임 상황에서 일하게 된다고 한다. 타이틀 [하이바이]가 의미하는 것도 일로 인해 항상 여행하는 일시적인 인간의 접촉관계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녀는 [하이바이] 영양 씨앗으로 개인의 문화적, 신체적 요구에 맞는 음식과 영양분을 제공할 수 있다는 제안을 해본다.

헬라 용게리우스(Hella Jongerius)는 주목받는 네덜란드 출신의 인테리어 디자이너. ‘침대 속에서 비즈니스를’이라는 명제에 맞게 침대는 네덜란드의 아우핑(Auping) 침대, 발쪽에는 IBM 컴퓨터 스크린, ‘스마트 필로우(Smart Pillow)’로 불리는 베게는 키보드, 마우스, 내장 스피커를 두루 사용할 수 있게 설계되었을 뿐만 아니라 소프트젤 신소재를 사용한 덕택에 사용자 마음대로 변형을 가할 수도 있다고 한다.
하이테크에 매료된 신세대들이 좋아할 만한 컨셉이지만 일을 휴식의 공간으로 끌어들이는 이 아이디어에는 소름이 돋지 않을 수 없다.

MIT의 존 마에다(John Maeda) 팀이 제시한 [분위기 Atmosphere]는 대형 스크린상으로 각종 정보와 시간을 사용자 마음대로 조작하고 활용할 수 있도록 한 커뮤니케이션 툴이다. 언뜻 보기에도 환상적인 인터페이스를 과시하는 제품이지만 이들 제품이 일상화된 미래의 노동공간을 통합적으로 상상하기란 그렇게 쉽지 않다.

결국 관객들의 눈에 띄는 것들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노동의 공간 혹은 오피스에 자리한 책상과 의자, 그리고 사무용품 같이 친숙한 제품들이기 때문이다.
현실을 미루어 볼 때, 미래의 노동 공간에 전자 과학기술을 활용한 장비와 첨단기기들이 속속 등장하리란 가정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지만 미래의 노동이 어떤 내용적 변화를 맞을까에 대한 언급을 찾아보기 어려운 전시임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디자인이 혁신적인 노동공간 창조에 기여하기 위해서는 노동의 내용을 제대로 파악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글 _ 박진아 (본지 해외 통신원)
사진 / Michael Moran
 

1_ 마르티 귀세(Marti Guixe), [하이 바이 H!BYE] 영양 씨앗. 미래의 노동환경에서 창출될 새로운 음식문화를 위한 디자인 컨셉, 2000년.


2_ 히로아키 키타노(Hiroaki Kitano). 소니(Sony)가 개발한 애완견 아이보(AIBO), 2001년.


3_ 헬라 용게리우스(Hella Jongerius), [마이 소프트 오피스 My Soft Office]를 위한 컨셉 디자인 중 [위클리 디너], 2000년.



4.5_ 헬라 용게리우스, [마이 소프트 오피스 My Soft Office]를 위한 컨셉 디자인 중 [침대에서 비즈니스를]

6.7_ 제니 피네우스(Jennie Pineus), [헤드 코쿤 Headcocoon], 2000년. 거리에서 작업을 해야 하는 유목인들이 혼잡한 거리 환경으로 부터 자기만의 공간을 찾아보려는 몸부림


8_ 로텍건축사(LOT/EK Architecture)에서 제시한 [인스피로 테이너 Inspiro-tainers], 2001년. 화물 비행기용 컨테이너(LD3)를 오피스 공간으로 개조한 멀티미디어 박스이자 엔터테인먼트 공간


9_ 디자인 예술과 인지과학을 접목시킨 [마인드 스페이스 Mind’ Space] 전시를 위한 과학적 프로젝트, 제프 루셀(Jeff Reuschel) 외 6인 참여. 200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