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 뮤지엄 Design Museum

미국 디자인 박물관 오늘 - 대형 디자인전시로 관객끌어모으기

언제부터인가 디자인 작품을 전시하고 관객을 끌어모으는 블록버스터 전시가 서구에서는 미술계와 일반 대중들의 관심을 모으기 시작했다.
고급 패션가에서나 볼 수 있는 조르지오 아르마니의 의상이나 생활 디자인 용품을 미술 작품들과 나란히 전시하는 등 평소에 미술관을 별세계로 생각하던 일반 대중들의 발길을 붙잡고 있는 것이다.
디자인 전시를 기획하고 디자인 제품을 소장하는 관행은 최근 유럽과 호주 등지에서도 활발한 전개를 보이고 있지만, 대규모의 대중적 흥행을 노려 디자인 전시를 기획하는 추세는 미국의 대도시에 위치한 대형 미술관들에서 유난히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때는 지금부터 그다지 오래되지 않은 1998년 여름, 필자는 당시 화재의 모터사이클 전시를 보러 솔로몬 구겐하임 미술관 앞에 갔다가 미술관 건물 바깥까지 늘어서 있는 입장객들의 행렬을 보고 당일 관람을 포기하고 돌아온 일이 있다.
구겐하임 미술관이 실로 오래간만에 경험하는 관객 대성시 광경이었다.

대형 디자인 전시들 경쟁적으로 기획
1980년대 이후로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은 재정난에 허덕이고 있었다. 20세기 모더니즘 추상계열 미술을 주로 소장한 미술관이라 일반인들이 난해하다고 여기며 발길을 돌리지 않았고, 그래서 입장료 수입과 후원금 동원 실적이 저조했던 때문이다.
관객을 끌어들일 기발한 전시기획이 필요했다.
구겐하임의 큐레이터들은 어느날 아이디어를 짜기 위해 회의실에 둘러 앉았다. 바로 그때, 한 큐레이터는 아무런 생각없이 “모터 사이클을 모아서 전시해 보면 어떨까?”라는 말을 툭 내던졌고, 토마스 크렌스 관장은 “바로 그거야!”하며 책상을 내리쳤다.
그 길로 독일 BMW사의 일부 재정 후원을 받아 [모터사이클 예술 The Art of the Motorcycle]전을 열었다. 이 전시회는 전시기간 3개월 동안 관람객 50만 명을 동원하여 65년 미술관 역사상 최고 관객수를 동원한 전시로 기록됐다.
이를 기점으로 1999년 이래 현재까지 미국 내 굵직굵직한 박물관과 미술관들은 대중들이 친숙하게 느끼는 디자인 제품을 주제로 한 전시를 경쟁적으로 기획 전시해 오고 있다.

일상의 디자인 제품들로 시선을 끈 예는 모터사이클 외에도 얼마든지 있다.
뉴욕 근대미술관은 [환경친화적 자동차] 전, 샌프란시스코 근대미술관은 [운동화 디자인 Design Afoot: Athletic Shoes 1995-2000]전, 보스톤 파인아트 미술관은 [위험한 곡선: 기타 디자인전 Dangerous Curves]을 연달아 전시에 부쳤다.
자동차, 운동화, 기타는 하나같이 대중 소비사회의 대표적인 문화적 아이콘들이다.
진지한 미술 애호가들을 다소 실망시킬지언정 평소 미술관을 찾지 않던 일반인들을 미술관으로 끌어들이는데 성공한 전시들임은 분명했다.

이에 뒤질새라 미국 국립 스미소니언 소속 장식미술 박물관인 쿠퍼-휴잇 내셔널 디자인 박물관은 2000년 여름 미국 현대 디자인의 현주소를 진단한다는 취지를 내걸고 [디자인 문화 지금 Design Culture Now]이라는 미국 최초의 디자인 트리엔날레 행사를 개최하여 미국 언론과 미술계에 ‘디자인이 문화’라는 대명제를 다시 한 번 강조했다.
작년부터 올해에 걸쳐서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도 장식미술 창고를 뒤져 시대별로 조망해 본 전시 두 편 [아메리칸 모던 American Modern, 1925-40: Design for a New Age]전과 [한 세기의 디자인 A Century of Design]이라는 4부작 디자인 전시를 급편성해 그들 창고에 쌓아둔 20세기 디자인 소장품들을 과시하는 데 발빠른 움직임을 보였다.
뉴욕 브룩클린 미술관도 한결 작은 규모로 대중성 짙은 [힙합 내이션 Hip Hop Nation] 전을 열어 젊은층 관객들의 욕구를 다소간 만족시켜 주었고, 뉴욕 재팬 소사이어티(Japan Society)는 고 존 레논의 미망인이자 전위 아티스트인 오노 요코(Ono Yoko)의 대중적 명성을 내건 회고전을 열었다.
과거 식당이나 백화점, 극장으로 소비되곤 하던 가족들과 젊은이들의 호주머니 속 유흥비는 이제 미술관과 박물관 입장료로 지출되는 새로운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디자인의 예술화 미술관의 디즈니화
시사주간지 [타임]이 2000년도 3월 20일자 커버스토리로 보도한 ‘미국의 디자인 열풍 The Redesigning of America’ 기사는 미국 대중들이 디자인 명품과 디자이너 제품에 대한 인식이 전에 없이 높아가고 있다는 내용을 다뤘다.
과거 10년 가까이 지속된 미국의 경제 부흥 덕택에 양보다는 질을 우선으로 하는 시각문화가 확산된 때문이라는 게 그 이유이다.
그 때문인지 몇 년 전부터 고급 디자인 매장에서 디자이너 가구나 고전 디자인 명품을 사모으고, 알레시나 필립 스탁의 주방용품과 액세서리로 장식하는 것을 취미로 삼는 유행에 민감한 소비자들이 눈에 띄게 늘어났다.

한편 값비싼 디자인 제품을 구입할 수 없는 소비자들도 수퍼마켓이나 대형 할인매장, 인테리어 매장 등에서 문구류에서 쓰레기통에 이르기까지 제법 트렌디한 디자인 상품을 보다 저렴한 가격에 구입할 수 있게 되었다.
분명 디자인에 대한 관심이 소비자들의 빈부를 막론하고 고조된 것임에는 틀림없다. 기업들도 기능 위주의 제품 차별화에는 한계가 있다고 자각한 이래 디자인을 해결책으로 활용하기 시작한지 오래다.
특히 애플 컴퓨터의 i-시리즈의 성공은, 품질이 아닌 디자인으로 막다른 골목에 접어든 한 기업을 회생시킨 디자인 역사상 지극히 드문 기록으로 오래 기억될 것이다.
‘디자인의 대중화’ 현상은 미술관에서만이 아니라 기업과 소비자들의 일상생활에서 저변화되고 있는 것이다.

디자인 콜렉션의 기준
그렇다고 디자인 대중화의 원인을 경제적인 풍요라는 요소로 국한시키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디자인의 대중화는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미술관들의 역할도 크게 작용한다. 20세기를 한정해 볼 때, 미국의 소수 갤러리들과 박물관 및 미술관들을 중심으로 미적 가치와 수준이 높다고 여겨지는 디자이너의 작품이나 대량생산된 디자인 제품들을 본격적으로 수집, 전시, 장려하는 활동은 1920년대부터 시작되었다.

현재까지 디자인 소장 및 전시활동과 관련한 연구가 가장 많이 이루어진 곳은 뉴욕 근대미술관으로 알려져 있다.
유럽 근대 회화와 조각 이외의 다른 장르를 콜렉션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신념의 소유자 알프레드 바(뉴욕근대미술관 초대 관장)의 소장철학에 따라 이미 30년대 초부터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그로피우스, 르 코르뷔지에, 미스 반 데어 로에, 노이트라로 대표되는 유럽의 모더니즘 건축과 디자인 미학을 위주로 한 콜렉션을 시작했다.

뉴욕근대미술관은 설립 3년 후인 1932년, 건축과 산업 미술부를 “근대 미술 연구와 그 결과를 생산과 공공 생활에 응용하도록 장려하고 발전시킨다”는 사명 아래 신설하였다.
초대 큐레이터 필립 존슨은 [기계 예술 Machine Art](1934년)과 [모마 개관 10주년 기념 회고전](1939년)을 기획하면서 유럽과 북구 스칸디나비아 기능주의와 엄격한 기하학적 모더니즘 위주의 디자인 콜렉션 전통을 구축했다. 이후 40년대와 50년대에도 에드거 카우프만 큐레이터 지휘로 바우하우스적 미학을 지속하는 가운데 60년대부터 이탈리아의 디자인을 미국에 소개시켰다.
이후 에밀리오 암바즈와 현재의 파올라 안토넬리 큐레이터로 이어지면서 현대 이탈리아 디자인은 모마 디자인 콜렉션에 적잖은 규모를 차지하게 되었다. 80년대에는 영국의 팝문화와 이탈리아의 스튜디오 알키미아, 멤피스 그룹의 실험적 양식을 콜렉션에 포함시켰다.

뉴욕 센트럴 파크 동쪽에 위치해 있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은 고대부터 현재까지의 인류의 고고학적 유물과 예술품이 두루 소장된 백과사전적 박물관에 속한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 디자인 콜렉션이라는 명칭으로 별도의 부서를 두고 체계화한 상태는 아니지만, 지금도 전시를 계속하고 있는 4부작 전시 [한 세계의 디자인전]을 보면 시기별, 작가별, 양식별로 핵심 디자인 작품들이 소장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특히 미국 장식미술부에서는 전 세계 전 시기를 거쳐 제작된 장식미술, 건축, 디자인 제품 등을 관리하고 있다.

디자인 전시회는 계속된다
LA에 위치한 게티 미술관은 [중부 유럽의 위대한 도시의 형성 Shaping the Great City: Modern Architecture in Central Europe, 1890-1937]전을 올 봄에 전시했다.
미국 국회와 독일의 비트라 디자인 미술관이 협동 기획한 [찰스와 레이 임즈 디자인 Work of Charles and Ray Eames: A Legacy of Invention]전도 작년 6월부터 오는 9월까지 미국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미술관을 비롯해 전 미국을 순회전시하며, 구겐하임의 [조르지오 아르마니 Giorgio Armani] 패션디자인 전시회, 5월부터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전시에 들어간 [재클린 케네디 백악관 시절 패션 Jacqueline Kennedy: the White House Years]전 등이 한창 전시를 계속하고 있다.

구겐하임은 올 여름 새로 문을 열 구겐하임 라스베가스 미술관에 [모터사이클 예술]전을 다시 한 번 열어 관객 동원을 꾀하고 있고, 아트 인스티튜트 오브 시카고 미술관은 [21세기 교통디자인 All Aboard! Architecture, Design, and Rail Travel for the 21st Century]전을 올 12월 열 예정이라고 한다.
여타 다른 디자인 분야보다 긴 전시 역사를 지니는 그래픽 디자인도 재차 미술관들의 조명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필라델피아 미술관은 전설적인 그래픽 디자이너 밀튼 글레이저(Milton Glaser)의 그래픽 미술을, 플로리다 울프소니언 미술관은 독일 세기 전환기 타이포그래피와 포스터 디자이너들의 작품을 모은 전시 [인쇄, 위력, 설득 Print, Power, and Persuasion: Graphic Design in Germany 1890-1945]전을 올해 초 열어 4월 말에 마감했다.

글_박진아 (본지해외통신원)
 

샌프란시스코 근대미술관. [운동화 디자인 Design Afoot: Athletic Shoes 1995-2000]전



아트 인스티튜트 오브 시카고 미술관 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