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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드, 욕망의 과부하

일상의 표피에 숨겨진 욕망의 얼룩을 찾아서
스피드는 오늘날 우리 시대를 이해하고 설명하는 데 빠질 수 없는 키워드이다.
그것의 흔적은, 아니 그것의 존재는 초고속 인터넷이나 고속전철과 같은 테크놀러지와의 관계에서뿐만 아니라, 우리가 생활하는 일상 곳곳에서 발견된다. 그것이 존재하는 형상은 추위를 피해 웅크린 나약한 산짐승의 모습이 아니다.
그것은 너무도 당당하게 모든 일상의 행위들을 통제하고 우리의 사고를 지배한다. 그것은 일상의 실존적 개별주체들의 관계 방식과 사회의 움직임, 더 나아가 미래를 통제하려 한다.

스피드는 두 가지 형상을 지닌다. 그 하나가 구체적 물질로, 행위로, 현상으로 발현하는 형상이라고 한다면, 다른 하나는 그 내부를 구조화하는 무형의 형상이다.
그것은 마치 하나의 그릇이 외형과 내형을 지니는 것과 같다. 우리가 그것의 내형을 이해하려 한다면 우리는 그 내형을 지탱하는 힘들을 파악해야 할 것이다. 오늘날 스피드에 대한 열광을 만들어내는 유전자들의 상호작용과 멀미하는 몸을 기꺼이 그 경주에 맡기는 정신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스피드의 외형은 그 지점과 일정부분 함수 관계를 형성한다. 우리는 풍선과 같은 이미지를 가정한다. 내형과 외형이 일치하는 이데아의 형상을 꿈꾸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렇지 않다면, 어느 지점에서 표피의 뭉쳐진 두께를 발견한다면, 우리는 스피드의 표면을 이동하면서 그 두께를 측정하고 일정하지 않은 두께를 만들어내는 욕망들을 읽어내야 할 것이다.

스피드, 그 공간이동의 감수성
스피드의 내형을 구성하는 힘은 무엇인가?
스피드에 대한 광기가 형성되기 이전 상황으로부터 우리는 그것이 폭력적 태도를 취하는 어떤 것임을 확인하게 된다.
스피드의 씨앗인 기계적인 동력을 사용하기 이전의 마차나 배를 상상해 보라. 적어도 그것들의 움직임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가축의 움직임, 물과 바람의 흐름, 그리고 지표의 굴곡 같은 것이었다.
시골길에서 마차를 탔던 기억을 갖고 있는 이들이라면 그 마차의 움직임이 항상 소의 움직임과 지표면의 굴곡, 그리고 비와 바람이 만들어내는 환경에 의해 지배받았음을 알 것이다.
마차는 그 모든 환경을 긍정하고 그 흐름에 몸을 맡기고 그렇게 굴러간다. 길가에 놓여 소를 유혹하는 여물, 봄바람을 타고 오는 전원의 향기와 그것을 즐기고자 하는 마부의 한가로움, 그 마부와 이야기를 나누고자 손을 흔드는 이웃의 손짓, 이 모두가 마차의 움직임과 관계하는 부정할 수 없는 환경이다.
마차는 스스로가 아닌 땅의 형상을, 바람의 형상을, 마음의 형상, 그리고 삶의 형상을 타고 흘러간다.
그렇게 굴러가는 마차는 풍경 속으로 하나의 배경이 되어 배열된다.

그러나 그것이 기계적인 동력에 의해 대체되면서 그 동력은 스스로를 중심에 놓았다. 자동차의 출현은 새로운 운송수단의 출현이 아니라 새로운 질서의 출현이다. 우리 삶을 구성하는 것들의 형상과 그것들 상호의 지각방식과 교통방식이 새롭게 변형된 것이다. 자동차를 중심으로 배경이 바뀌는 풍경을 우리는 그리 길지 않은 기간동안 목격했다.

자동차의 출현은 자동차를 바꾼 것이 아니라 자동차가 다니는 길을 바꾸었다. 솟아오른 지점을 파내고, 패인 부분은 메우고, 휘어진 부분은 직선으로 폈다. 그것은 폭력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었다.
스피드는 환경의 장애를 하나의 방해물로 규정하고 끊임없이 삭제해 가는 곳에서 실현될 수 있다. 사이에 존재하는 것들을 비존재의 영역으로 보내고자 하는 폭력이 스피드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효율에 대한 긍정이 자리한다. 여기서의 효율은 목표 지점을 설정하고 현재와 연결되는 일직선의 동선을 찾으려는 감수성 바로 그것이다. 우회로는 있을 수 없다. 그것은 우리 시대가 가장 증오하는 움직임 중의 하나인 낭비이기 때문이다.
우회로를 찾으려는 모든 움직임은 거세되고 효율, 보다 정확히 말한다면 효율의 신화에 중독되어 생활한다. 직선 이외의 움직임을 용납하지 않으려는 그 오만함은 끊임없이 최단 거리를 찾아 나서려는 광기로 나타난다. 그리고 새로운 길의 등장은 바로 기존 길들의 폐기를 의미한다.
여기서 움직임은 심지어 거추장스러운 것이다. 세계 내적 존재이기에 누구도 벗어날 수 없는 이 장애를 모두들 벗어 던지고 싶어한다.
그리고는 영화 ‘스타트렉’이 우리에게 보여준 공간이동의 새로운 방식이 현실화되기를 기대한다. 누구도 가는 길을 즐기려하지 않는다.
오로지 목적지에 대한 관심뿐이다. 우리가 과정에서 얻을 수 있었던 여유로운 웃음과 속삭임, 그리고 기다림은 목적이 선취된 이미지 뒤로 사라졌다. 스피드의 감수성은 과정에 대한 무관심과 목적에 대한 집착으로 수렴한다.

스피드의 형상, 그리고 파워
밀란 쿤데라가 느림을 이야기할 때 그가 그리워한 것은 느린 흐름 속에서 즐길 수 있는 것들이었다.
분명 그 사이에는 무엇인가가 있다. 그러나 스피드는 그것을 압축시킨다. 그곳에서 우리는 멀미를 경험한다. 멀미는 지극히 현대적인 질병이다.
멀미를 한다는 것은 자신이 이미 스피드가 일반화된 현대의 맥락에서 삶을 살아가고 있음을 증명한다. 그러나 멀미는 동시에 스피드에 대해 몸이 표현하는 하나의 저항이다. 그 저항은 느림을 그리워한다.
그래서 멀미하는 몸은 스피드로 취해진 모든 것들, 짧은 시간동안 압축된 것들을 거부하고자 한다. 그 지점에서 우리는 스피드가 인간적인 것과 일정한 거리를 취하는 것임을 직감할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멀미를 그리워한다. 정확히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멀미가 가져다주는 환영에 대한 갈구다.
고통이 어느덧 즐거움의 대상이 되어버린 시대를 살고 있는 이 묘한 경험은 그 자체로 멀미나는 풍경이다. 멀미를 통해 몸의 균형을 유지하던 감각기관이 제 기능을 못하고 굳어질 때, 그 굳어져옴을 느끼는 또 다른 감각기관이 우리 몸에 내재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그 감각기관은 유전자를 타고 흘러온 것이 아니라 외부로부터 주입된 것이다.
그 감각기관은 우리로 하여금 스피드를 즐기라고 권유한다. 그것은 강한 유혹이다. 모든 현실적인 규칙들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에 손짓을 보내기 때문이다. 계급도, 어떠한 이데올로기도, 슬픔도, 아픔도 모두 속도의 긴장 아래서 해방될 수 있음을 끊임없이 말한다.
그 부름에 답함으로써 우리는 라이프니츠가 이야기하는 복수성의 공간을 경험하고 현실에서 벗어나 또 다른 현실을 경험한다. 폭력의 힘을 빌린 벗어남, 고통이 어느덧 즐거움이 되어버리는 경험, 그것이 바로 스피드의 시대를 사는 삶의 아이러니다.

그렇게 스피드에게는 힘이 있다. 모든 것을 자신을 중심으로 늘어세우는 힘, 그리고 모든 것을 자신의 형상으로 도배하는 힘, 그리고 일체의 개별적인 판단을 마비시키는 힘이 스피드에게는 있다. 스피드는 마찰력을 조롱하며 흘러간다.
그래서 그것은 ‘미끈한’이라는 형용사를 가장 가까이 한다. 우리 일상을 보라.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공간은 이미 스피드가 만들어내는 미끈함이 자리한다. 이 미끈함은 단순히 인공물의 외관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가정-거리-직장에서의 움직임들, 권력의 시선이 지나가는 경로와 욕망이 그의 적을 피해가는 길이 모두가 ‘미끈한’이라는 용어에 의해 포섭된다.

현대의 계획도시는 미끈한 동선들에 의해 구조화되어 있다. 건물들의 배열과 도로들은 현대의 움직임에 대한 이상이 물질로 구체화된 형상이다.
온갖 욕망이 끊임없이 분출되고 흘러갈 수 있는 공간 또한 바로 그곳이다. 이 속에서 우리는 미끈함이라는 이미지를 경험한다. 미끈한 도로, 미끈한 건물, 미끈한 시선, 심지어 우리는 사람들에게서도 미끈함을 기대한다.
미끈함은 움직임을 방해하는 어떠한 장애도 용서하지 않으려는 감수성이다. 현실을 이상적인 진공의 공간으로 만들고자 하는 감수성, 우리는 이 감수성의 공간에서 마찰을 제거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한다.

아파트, 우리가 살아가는 이 공간은 그 미끈함이 보다 구체화된 표본이다.
아파트라는 공간에서 거실과 안방, 화장실과 부엌, 그리고 또 다른 방들이 점하고 있는 공간의 크기와 배치를 떠올린다면, 그리고 그것들 사이의 관계를 떠올린다면 우리의 말랑말랑한 가설이 보다 굳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미끈한 움직임과 미끈한 시선으로 미끈한 것들이 가득한 공간을 우리는 살아간다.
미끈한 TV, 미끈한 컴퓨터, 미끈한 책상, 미끈한 자동차, 미끈한 청소기, 미끈한 냉장고…

스피드는 신神, 시간은 악마惡魔
미끈함들은 시간을 정복하려는 충족될 수 없는 욕망을 이야기한다. 시간과의 이 싸움은 싸움을 위한 싸움이 되었다.
한정된 시간 동안 얼마나 더 많은 양을 성취할 수 있는가라는 이 전쟁은 모든 것의 판단 기준으로 자리잡았다. 좋고 나쁨의 판단도, 능력이 있고 없음의 판단도, 행복과 불행의 판단도 이 기준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속도가 얼마나 빠른가를 묻는 것은 어떤 것의 질을 묻는 완곡한 표현이다.
그래서 우리는 자동차 매장에서는 물론이고 컴퓨터를 구입하는 장소에서도, 이동통신 단말기 판매장 앞에서도, 음식점에서도, 세탁소에서도 우선 속도를 묻는다.

‘스피드는 신이고 시간은 악마다’라는 히다치(Hitachi) 사의 이 슬로건보다 더 우리 시대의 감수성을 정확히 드러내는 어구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오늘날 스피드라는 신에게 경배를 드린다. 그 경배는 시간이라는 악마를 정복함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스피드에 광분하는 모든 이들은 ‘스피드는 신이고 시간은 악마다’라는 주문을 외우면서 생활한다.
그들의 시선은 더 이상 응시를 경험할 수 있을 만큼 여유롭지도, 안정되지도 못하다. 그들의 시선은 떨고 있고, 모든 것들을 흘낏 봄으로써 만난다. 초점이 맞지 않은 사진의 이미지를 뒤로하고 ‘빠르게 더 빠르게’를 실천한다.

그러나 우리는 왜 존 싸카라(Jhon Thackara)가 이 슬로건에 ‘어리석은(Fatuous)’이라는 점수를 주었는지를 되새겨야 할 것이다.
스피드를 향한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가 스피드를 낼 때 우리의 사고는 그 역을 사고할 수 있는 가능성에서 더욱 더 멀어진다. 스피드는 우리를 해방시키는 신이 아니라, 죽음이라는 목표를 향해가는 질주임을.

글 | 오창섭 changsup@youngdong.ac.kr
서울대학교와 동대학원에서 디자인을 공부했으며 디자인 문화와 실험적 디자인에 대한 화두를 이끌어가고 있다. 저서로 ‘디자인과 키치(토마토 1997)’와 ‘이것은 의자가 아니다(홍디자인 2001)’가 있으며 현재 영동대학교 디자인학부에서 디자인을 가르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