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eywordspecial : speed

슬로우- 슬로우- 퀵. 퀵.

흔히 한국의 고질병을 얘기할 때 빠지지 않는 것 중의 하나가 ‘빨리빨리’ 병이다. 이 병은 광고계에서도 불치의 병으로 통하고 있다.
기획단계에서 실행까지 TV광고는 보통 한 달, 신문광고의 경우는 약 2주 정도의 시간이 주어진다. 이것은 외국에 비교하면 약 1/2에 해당하는 아주 짧은 시간이다.
그런데 이 짧은 한 달도 계획대로 착착 진행되면 몸은 좀 바쁘더라도 정해진 날까지 무리 없이 끝낼 수 있는 것을 질질 끌다 막바지에 닥치면 예외 없이 빨리빨리 다그치는 클라이언트들의 오랜 습성이 늘 우리를 슬프게 한다.
그러다 보니 실행단계에서 항상 시간이 부족해 무리가 따르게 되고, 결과물에 대해서도 우리는 우리대로, 클라이언트는 클라이언트대로 마음에 들지 않아 가슴앓이를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광고회사를 포함한 클라이언트 일을 하는 디자인관련 회사에서도 이런 것이 늘 문제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런 시행착오가 반복될까?

아직도 우리에겐 ‘시간이 곧 돈이다’라는 개념이 없기 때문이다. 몇년 전 미국에 있는 광고회사에서 약 일년동안 근무한 적이 있었다.
거기에서는 매 프로젝트마다 타임 시트(Time Sheet)를 작성한다. 그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데 몇 명의 인원이 필요하고 그 인원이 소요한 시간은 총 몇 시간인가를 합산해 클라이언트에게 크리에이티브 워크(Creative Work) 비용으로 청구한다.
그리고 클라이언트는 비용에 대한 합리적인 데이터를 가지고 판단을 한다. 만일 비용이 과다 청구되면 광고회사의 실력에 문제가 있어 남들보다 더 시간이 걸린 것인지, 아니면 클라이언트 자체 내에 문제가 있어 시간이 걸린 것인지를 분명하게 가린다.
이러다 보니 광고회사는 게으름을 피울 여지가 없고, 클라이언트는 클라이언트대로 불필요한 작업이 생기지 않게 신경을 쓴다. 우리 나라처럼 시안을 가져가면 담당자가 특별한 이유도 없이 맘에 들지 않으니까 다시 해오라든지, 아니면 매번 갈 때마다 생각이 바뀌어 시안을 다시 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그리고 아주 사소한 것을 계속 수정시키는 일도 흔치 않다.
단, 특별한 경우 클라이언트의 사정상 밤샘작업을 하게 되면 반드시 초과비용을 지불한다. 모든 것을 비용으로 계산하다 보니 늑장 피우다가 빨리빨리 하게 되면 결국 그 비용은 클라이언트의 부담이 되고 담당자는 비용을 낭비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 다음 이유는 사전 계획이 철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고 박대통령 이후부터 우리 사회는 앞뒤 잴 것 없이 일단 행동으로 옮기는 스타일이 미덕으로 여겨져 왔다.
광고를 만들 때에도 클라이언트가 이 미덕을 발휘할 때가 많다. 일이 생기면 일단 광고회사부터 불러 아이디어를 요구한다. 최소한 어떤 목적으로 얼마만큼의 목표를 달성할 것인지 내부적으로 합의를 거치지도 않고 일을 던져준다.
그러다 보니 광고회사 나름대로 열심히 준비해서 아이디어를 가져 갔는데 클라이언트의 결정권자와 생각이 일치하지 않을 경우에는 일치할 때까지 다시 해야 하는 불행한 사태가 발생한다.
빨리 시작한다고 반드시 빨리 끝나라는 법은 없다. 그리고 일에는 반드시 순서가 있다. 그 순서를 어기면 일은 꼬이기 시작한다.
평소에는 이런 이치를 누구나 잘 알고 있으면서 막상 일이 생기면 까맣게 잊어버리는 것은 몸에 밴 잘못된 관성때문이 아닐까.

마지막으로 시간을 쪼개 쓰는 습관에 익숙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일을 하다 보면 보통 한 팀에 서너 건의 프로젝트가 함께 물려서 진행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 보니 아이디어 회의도 해야 하고 자료도 찾아야 하고, 게다가 행정업무도 봐야 한다. 이처럼 항상 바쁘게 돌아가는 시간을 잘 쪼개 써야 업무를 제시간에 마칠 수 있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못하다.
아이디어 회의를 반나절동안 했다면 그 시간의 반은 잡담인 경우, 자료를 찾는다고 인터넷을 뒤지면서 소비한 시간의 반은 엉뚱한 사이트에 들러서 놀다 나온 경우 등 이래저래 따지면 실제로 제대로 일한 시간은 아마도 몇 시간이 안될 것이다.
특히 밤 늦게까지 근무하는 것이 정례화되어 있어서 그런지 빨리 끝내고 퇴근하려는 생각보다 아예 느긋하게 일을 하는 경우가 많다. 미국에서 근무했던 외국회사는 일을 느긋하게 하고 싶어도 구조적으로 그럴 수가 없게 되어 있다. 우선 특별한 이유 없이 야근이 인정되지 않는다.
야근 수당도 없을 뿐더러 빈번한 야근은 그 사람의 능력부족으로 인식되며, 집안에 문제가 있어 집에 빨리 가지 않으려는 문제아로 오해 받기 십상이다.

한편 우리는 빨리빨리 문화를 반드시 고쳐야 할 한국병으로 알고 있지만 꼭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알고 보면 빨리빨리는 나쁜 것이 아니다. 광고에서도 ‘빠르다’는 컨셉은 매우 효과적이다.
소화제, 진통제, 초고속 인터넷, 패스트푸드, 스포츠카, 영어회화 3개월 완성, DHL, 초스피드 대출 등등 ‘빠르다’는 것은 그만큼 만족을 빨리 시켜준다는 것이니 얼마나 좋은가?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조급증에 의한 ‘빨리빨리 문화’이다. 그것 때문에 내용이 부실해지고 수정에 수정을 거치면서 오히려 아까운 시간만 낭비하게 되는 것이 문제가 아닐까? 빠른 것에 대해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것이 중국 사람들의 ‘만만디 정신’이다.
그들은 부모의 원수를 갚는 데 100년이란 세월은 결코 긴 세월이 아니라고 말할 정도로 여유를 부린다.
그만큼 중요한 일일수록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철저하게 준비해야 실패가 없다는 치밀한 정신을 배울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우리도 빨리빨리 문화가 무조건 나쁘니까 고쳐야 한다고 말할 것이 아니라 빠른 결과에 집착한 나머지 과정을 생략함으로써 부실을 초래하는 조급증을 고쳐야 할 것이다. 항상 사전 준비는 여유를 가지고 철저하게, 판단은 신중하게, 그리고 모든 것이 결정 났으면 행동은 신속하게.
이것이 진정 초스피드 시대에 걸맞는 행동양식이 아닌가 생각한다. 무슨 일이든지 마치 춤추듯 해보자.
슬로우(Slow)- 슬로우(Slow)- 퀵(Quick). 퀵(Quick).

글 | 조성룡 csrmr2@hanmail.net
금강기획 크리에이티브 본부장이며 이사로 재직 중이다. 런던국제광고제, 스위스광고제, 뉴욕 광고페스티벌 등에서 광고상을 수상했으며 대한민국산업디자인전람회 심사위원, 칸느 국제광고제 심사위원 등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