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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
우리는 일상에서 여러 만남을 이어 나아간다. 가족과 만나고, 친구와 만난다. 때로는 사랑하는 이와의 데이트일 수도
있을 것이고, 아니면 업무와 관련된 건조한 만남일 수도 있다.
각각의 만남은 서로 다른 모양으로 존재하는데, 만남의
형상은 ‘만남의 대상이 누구인가’, 그리고 ‘그 대상은 나에게 어떤 존재인가’, 더 나아가 ‘만남의 지향점은 무엇인가’
등에 의해 결정된다.
서로 다른 대상은 특정한 마음가짐과 몸짓들을 우리에게 요구한다.
어른을 만났을 때, 우리는 먼저 몸을 잠시 숙이면서
인사를 한다. 우리의 원초적인 욕망과 의지, 그리고 몸이 그것을 희망하지 않더라도 우리가 학습한 상대에 대한 배려와
조심스러움을 담은 몸짓 언어를 통해 공경을 표한다.
만일 만남의 대상이 절친한 친구라면 우리의 몸은 보다 자연스럽고
편안한 움직임으로 반가움을 표시할 것이다. 우리는 서로 다른 만남에 대해 다르게 반응하면서 그 만남을 독특하고 고유한
것으로 만들어간다. 길거리에서 만난 애인이 내미는 손에 대해 우리가 반응하는 몸짓은 분명 걸인이 내미는 손에 대한
우리의 반응과 같지 않을 것이다.
만일 이러한 만남의 방식을 이탈했을 때, 가령 어른에 대한 반가움을 절친한 친구를
만났을 때와 같은 방식으로 하거나, 애인이 내미는 손에 대해 걸인을 대하는 방식으로 한다면, 우리는 모욕이나 분노와
같은 감정(그것은 분명 처벌이다)이 어떤 것인지를 몸소 경험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대상에 대한 우리의 몸짓이 하나의
체계 속에서 작용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도 잘 정리된 체계 속에서 말이다.
체계는 법칙에 의해서 작용하는 하나의 공간이다. 법칙은 느슨할 수도 있고 엄격하게 적용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체계 내에 존재하는 주체의 움직임과 사고는 체계의 자기장에 의해 통제된다는 것이다.
체계는 물론 우리의 만남에도 작용한다.
만남은 하나의 체계에서 이루어지는 여러 사건들 중 하나다. 우리의 감각기관이 만남을 감지하는 순간부터 체계 속의 해당
목록은 우리를 졸라대기도 하고 위협하기도 한다. 물론 그 졸라댐이나 위협은 함수관계로 얽힌 예정된 몸짓을 취하라는
명령이다.
체계의 작용방식과 그것이 희망하는 바람직한 만남의 형상은 서로 다른 모양의 버튼들로 표면이 장식된 전자제품의
작용방식과 유사하다.
각각의 버튼은 해당되는 기능과 연결되어 있다. 이 체계 속의 버튼들은 손끝의 체온만으로 프로그램된
기능을 충실하게 수행한다. Play 버튼을 자극하면 음악을 연주하고 Stop 버튼을 자극하면 음악이 멈춘다. Stop
버튼을 자극했을 때 음악이 멈추지 않거나 Play 버튼을 자극했는데도 음악이 연주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것을 ‘고장’이라는
평가와 함께 바람직하지 못한 것으로 이해한다.
일상에서 우리는 사람들과의 만남뿐만 아니라 그보다 훨씬 높은 빈도수와 양을 자랑하는 사물들과 함께 살아간다. 원인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우리는 사물들과 만난다고 생각하기보다는 그것들에 둘러싸여, 혹은 그것들에 묻혀 살아간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애써 부정하더라도 분명한 것은 사물들과의 만남 역시 하나의 만남이라는 사실이다. 사물들과 우리들은 사람들과의
만남과 같이 만나고 헤어진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만날 때 상대에 따라 우리의 몸짓을 달리하는 것처럼 일상에서 만나는
사물들은 나름의 고유한 태도와 행동방식들을 요구한다. 수저를 들고 밥을 먹는 우리의 몸짓은 분명 쟁기질을 하는 농부의
몸짓과 다르다. 연필이나 볼펜을 들고 글을 쓰는 행위는 또한 붓으로 글을 쓰는 것과 다른 태도를 요구할 뿐만 아니라
다른 몸짓을 요구한다.
하나의 사물은 우리의 몸을 다른 방식으로 유도한다. 이러한 서로 다른 행동 유도성이 한 체계
내에서 사물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중요한 내용인 것이다.
사물들 역시 체계 내에서 존재한다. 그 공간에서 수저는 수저 스스로 자신이 수저임을 증명하지 않는다. 오히려 컵과
연필, 그리고 밥상과 같은 수저 자신이 아닌 것들로 인해 수저임을 확인 받는다. 이것이 체계의 힘이다.
체계는 관계를
설명하고 행위를 조직하는 그물이다. 우리는 체계 내에서 수저를 들고 밥을 먹지만 글을 쓰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연필을
들고 밥을 먹지도 않는다.
체계 내에서 만남은 그 체계가 지시하는 방식대로 이루어진다. 마치 어른이나 친구들과의 만남에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몸짓이 미리 정해져 있는 것처럼 체계는 일상에서 사물과 만나는 방식 또한 규정하는 것이다.
하나의
체계 내에서 우리는 수저를 들고 밥을 먹고, 수저는 우리의 행동을 통해 비로소 수저가 된다.
만남, 무엇을 위한 것인가?
만일 만남이 체계에 의해 프로그램된 방식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즉 한 대상을 만났을 때 문화적으로 코드화된 방식으로만
만남이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세상은 참 건조할 것이다.
다행히도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만남에는 체계의 자기장이
작용하지만 그것이 만남의 형상을 결정하는 전부는 아니다.
상대에 대한 기억, 그 기억과 이미지를 형성하는 데 도움을
주는 또 많은 서로 다른 기억들, 그것을 처리하는 개별적인 서사장치, 서사장치가 이끄는 몽상들, 만남이 이루어지는
맥락, 그리고 변화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체계 자체의 움직임... 이 모든 것들이 만남을 만들어가는 힘이다.
만남에
있어 대상에 대한 우리의 몸짓은 기계적인 반응이 아니다. 우리의 몸짓은 우리 밖에 있는 대상과 우리 안에 있는 그
무엇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결정된다.
우리는 사물들과 무엇을 위해 만나는가? 우리의 관심은 만남의 지향점으로 모아진다. 그리 멀지 않은 역사 속에서 마샬
맥루언(Marshall Mcluhan)은 ‘확장의 매개’라는 지위를 사물에 부여하였다.
확장의 매개로서의 사물이라는
접근은 그 만남의 주체를 ‘확장하고자 하는 이’와 ‘확장을 도와주는 이’로 해석한다. 그들의 만남은 한쪽의 희생과
순종을 강요한다. 이러한 만남에서 사물의 미덕은 만남의 과정에 어떠한 마찰도 발생시키지 않는 무조건적 순종에 있다.
마찰은 확장하고자 하는 이를 방해하는 일종의 잡음이요 저항이다. 얼마나 많은 디자이너들이 그 마찰 없는 만남을 꿈꾸어왔는가?
그리고 지금도 꿈꾸고 있는가? 기능주의라는 이름을 취하든, 인터페이스 디자인이라는 그럴듯한 이름표를 달고 나오든 거기에는
단 하나의 욕망, 즉 마찰로부터 자유로운 만남이라는 공통의 의지가 서려있다. 목적, 혹은 정보와 우리 사이에 존재하는
사물이 잡음이라고 호명됨으로서 그것은 제거되어야할 그 무엇이 되고 만다.
잡음이라고 외치는 이들에게 윌리엄 깁슨(William
Gibson)의 소설 속의 인터페이스는 분명 진보된 만남의 방식이다. 몸에 플러그를 연결하는 그 공간에서 사물은 사라지고
우리는 사물이 되어간다. 매개의 존재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 받으면서도 매개를 부정하려는 디자인의 종착역은 과연
어디일까?
마찰은 확장의 의지와는 다른 방향의 질문들을 던진다. 때문에 그것은 일방적인 확장의 의지를 정지시키거나 더디게 만든다.
만일 누군가 이러한 상황에서 그 수다스러운 마찰력을 벗어나려 한다면 사물이 물어오는 성가신 질문을 주시해야 한다.
그것은 인내와 사고를 요구한다. 우리가 인내를 가지고 진지하게 그 물음들에 답하는 순간 만남은 명쾌하지 못하고 불투명해지며
질퍽해진다. 이곳에서 확장이 아닌 왜곡과 축소, 비빔과 같은, 그리 경쾌하지 않은 풍경들이 펼쳐진다.
우리는 사물과의 만남에서 완전함을 꿈꾼다.
태초에 아담과 하와를 유혹한 것도 바로 완전함에 대한 몽상이었다. 사물과의
만남 속에는 태초부터 이어져온 완전함에 대한 유전자가 꿈틀댄다.
이 풍경에서 인간은 외부로 자신을 끊임없이 확장하고자
하는 욕망의 주체이고, 사물은 그러한 욕망을 실현하는 충복이다. 이러한 설명방식은 매우 명쾌하다.
그러나 그 명쾌함은
만남을 둘러싼 중요한 다른 힘들의 존재를 삭제함으로서 획득된 것이라는 데 문제가 있다. 실험실에서 이루어지는 실험이
만들어내는 명쾌함보다 오히려 만들어내는 모자람이 거기에 있는 것이다.
일상에서 우리가 누군가를 만나는 것을 하나의 이유로 설명하는 것은 어렵다. 단순히 정보를 서로 주고받기 위한 만남이
물론 있을 수 있다.
계산기를 두드리는 나의 손끝이 그 계산기와 만나는 방식이 바로 이러한 만남일 것이다.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한 만남도 있을 수 있다. 오래된 친구를 만나 안부를 묻고 옛 추억을 더듬어 가는 만남이 그러한
만남이다. 호주머니 속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는 나의 손길은 존재를 확인하는 만남에 가깝다. 농담으로 배꼽을 잡는 유쾌한
경험을 위한 만남도 있을 수 있을 것이고, 선문답이 오고가는 만남도 가능할 것이다.
때로는 이유 없이 만남 그 자체를
즐기기 위한 만남도 우리는 일상에서 만들어낸다. 그러나 우리는 이유 있는 만남만을 사고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도 정해진
방식으로... 풍부한 만남을 위해 우리는 이유로부터 자유로운 만남을 자유로이 사유해야 하지 않을까?
만남을 바꾸는 우리, 우리를 바꾸는 만남
인내와 사고는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여러 속성들 중 하나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것은 어느 순간부터 만남의 과정에서
우리가 피하려고 하는 것들 중의 하나가 되어버렸다.
우리를 바라보는 사물들 앞에서 우리가 취하는 움직임은 인내와는
거리가 있는 것이다. 이 시대에 우리의 가장 절친한 친구인 모니터와의 만남을 떠올려보자.
특히 컴퓨터와 연결된 모니터와의 만남에서 우리는 특히 조급해 한다.
화면 속 커서의 호흡은 맥박을 숨막힐 정도로 증폭시킨다.
기울어진 화살표와 언제든지 누를 준비가 되어있는 손 모양의 아이콘은 손이 움직이는 것보다 더욱 빠른 속도로, 그래서
마우스를 잡은 우리 손이 움직이는 것보다 더욱 많은 거리를 쉴새 없이 돌아다닌다.
화면에 비친 텍스트와 이미지는 눈앞에
펼쳐진 세상과는 또 다른 세상으로 열린 하나의 창이다. 그 작은 손이 어느 하나의 창을 열었을 때, 우리의 관심은
오직 빠른 응답이다.
우리는 오래 기다리지 않는다. 하나의 창을 여는 순간 그 창이 우리를 기다리게 한다면, 우리는
창이 열렸을 때의 만남을 준비하고 몽상과 함께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유혹하는 또 다른 창들을 떠올리고 그 유혹에
기꺼이 넘어간다. 우리는 우리가 누른 창이 열리기도 전에 열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또 다른 창을 열고자 손가락을 움직인다.
우리를 재촉하는 것은 오히려 우리다. 그 곳에서 만남은 스침이 되어간다.
디지털 기술이 우리를 새로운 유토피아로 안내할 것이라는 낙관주의가 우리의 인식 속으로 스며들고 있다. 그러나 일상에서
우리가 디지털 미디어들을 만나는 방식은 모니터와 버튼, 그리고 마우스로 제한되어있다.
현재까지 이러한 미디어들과 만나기
위해서는 우리의 풍부한 움직임을 마우스와 키보드가 희망하는 방식으로 제한하고 환원해야 한다.
슬픔도 기쁨도, 아쉬움도
모두 마우스와 키보드의 움직임으로 환원되고, 우리의 몸짓도 마우스와 버튼으로 환원된다. 오락실의 풍경을 혹은 컴퓨터
게임에 몰입한 나를 떠올려보라. 게임 속 근육질 남자의 움직임은 버튼들의 조합으로 대체된다. 그의 발을 들어올릴 때에도,
그의 주먹을 사용할 때에도, 쓰러진 그의 몸을 일으켜 세울 때에도 우리는 버튼을 누르는 행위만을 할 수 있을 뿐이다.
이러한 만남이야말로 기 드보르(Guy Debord)가 경계한 ‘삶의 스펙터클화’가 아닐까? 우리를 삶의 참여자가 아닌
구경꾼으로 만드는 그런 움직임, 삶이 주인공이 아니라 배경으로 밀려나는 그런 상황 말이다.
그 속에서 우리는 현실감을
상실한다. 걸프전 참전 전투기 조종사들이 토로한 ‘전자오락 같다’는 느낌이야말로 바로 그러한 상실의 결과일 것이다.
그 속에서 우리는 ‘호모 버트니쿠스’, 혹은 ‘호모 마우시우스’가 되어간다. 모든 것을 컴퓨터 게임으로 환원하고 마우스나
버튼을 통해 세상을 살아가는 그런 존재.
글_오창섭,영동대학교 디자인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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