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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문화권이 가지고 있는 공간에 대한 관념은 시간과 달리 좀 음흉한 구석이 있다. 우리는 지도 속에서 공간에 대한
정보와 그에 대한 인식만을 읽는 것이 아니라, 그 지도를 제작한 사람들의 자의식 또한 읽는다. 어딜 가나 지도의 역사는
종교적 광신, 정치적 선전, 그리고 경제적 탐욕에 의해 얼룩져 있다.
태국의 한 역사학자는 타이의 전통적인 고지도가 영국의 식민주의자들이 측량한 현대식 지도로 대체되는 과정에서 일어난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소개한다.
원래 샴(태국의 옛 이름)은 몇몇 지방 중심지들을 중앙의 왕이 위계적으로 통치하는 봉건국가로,
‘국경선’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그런데 서구인들이 들어와 근대적 지도를 만들기 시작하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근대적
지도 속의 국가는 그 경계선 없이는 정의될 수 없었으므로, 그때부터 샴의 지배층들은 국경선의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그 후 국경선의 확정을 위해 벌어진 수많은 전쟁과 음모가 지나간 다음에야 태국인들은 비로소 자기 나라의 땅
모양을 알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원래 공간적 실재의 반영인 지도가 거꾸로 실재를 규정한 희한한 예이다.
비슷한 시기의 조선은 어땠을까. 영조 때의 지도인 [대동총도]의 발문에 보면
[우리나라 지형은 북쪽이 높고 서쪽이 낮으며, 중앙이 좁고 아래가 넉넉하다. 백산(백두산)이 머리가 되고,
대령(大嶺, 백두대간)이 척추다.
사람이 머리를 옆으로 하고 등을 구부리고 서 있는 모습으로, 영남의 대마도와 호남의
탐라도(제주도)는 마치 두 다리와 같다.]
라고 아주 뚜렷하게 영토의 모양을 인식하고 있다. 이러한 영토인식의 배경에는 정치적 상황, 역사인식, 그리고 풍수지리
사상 등이 혼합되어 형성된 독특한 집단적 자의식이 녹아들어 있다.
한반도에서 19세기 이전에 그려져서 현재까지 남아있는 고지도들은 모두가 관찬지도, 즉 정부에서 펴낸 지도이다. 한반도는
인도차이나 반도와는 달리 매우 일찍부터 중앙집권국가가 발달했고, 따라서 일찍부터 지도를 유용한 통치수단으로 활용할
줄 알았다.
지도는 효율적으로 세금을 걷는 수단이자 군사적 전략 무기였지만, 또한 효과적인 국가 이데올로기의 표현수단이기도
했다. 따라서 지도에는 국체(國體)라고 할 수 있는 영토와 역사에 대한 인식, 즉 집단적 아이덴티티에 대한 인식이
깊이 반영될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은 정치적 상황에 따라 여러가지 방식으로 바뀌어 표현되었다. 북진정책이 아직 건재하던
세조 때에는 ‘우리나라의 폭원(幅員)이 만 리’라고 하는 양성지의 영토관에 영향을 받아 만주와 한반도를 함께 그린
지도들이 제작되기도 하였다.
그런가 하면 소중화주의가 위세를 떨치던 병자호란 직후의 시기에는, 명나라가 존재했던 과거형의
중국과 현재형의 조선을 합친 동아시아 지도가 많이 제작되었다. 백두산만을 희고 두드러지게 표현하는 것이나, 산을 개별적으로
그리지 않고 모든 산을 연결하여 표현하는 것은 “백두산이 머리가 되고 백두대간이 척추다”라는, 풍수지리에 기반한 영토
의식의 시각적인 반영이다.
이러한 역사적 자의식을 빼고 나면, 대개의 한국 고지도에는 우리가 ‘전통적인 것’에서 생각하는 그 어떤 신비적인 요소도
없다. 그것은 획정법(劃井法)과 백리척(百里尺)에 의해 그 당시 최고의 기술수준으로 작성된, 목적의식이 뚜렷한 실용적
지도들이며 오늘날의 우리가 봐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이다.
오히려 회화적으로 그려진 옛 지도들은 오늘날의 지도들보다도
훨씬 쉽고 직관적인 인터페이스를 가졌다. 그런데, 바로 이 ‘쉽고 직관적인 인터페이스’라는 것이 고지도와 현대 지도를
갈라놓는 근본적인 차이점이 되었다. 이 차이점은 특히 세계지도를 보면 분명히 드러난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가 경험하는 환경에 익숙하고 그것을 중심으로 살아간다. 옛날 사람들은 자기가 보고 경험하는 것에
충실하게 지도를 만들었다.
일단 눈에 보이는 대로 평평한 땅을 가정한 뒤, 경험적으로 익숙하고 자세히 아는 지역은
크고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멀고 잘 모르는 지역은 작게 묘사하면서 나름대로 상상력을 가미하였다.
(최근에 민족주의적인 색채로 다시 포장된 신경준의 산자분수령(産自分水領, 산은 물을 가르고 물은 산을 건터지 않는다)의 원칙 또한 이러한 경험주의적 묘사의 전통에서 나온 것이다.))
그것이 극동의 기독교
왕국에 대한 상상이든 서역의 일목국(一目國)에 대한 상상이든지 간에, 경위도가 채용된 본격적인 세계지도가 나오기 전까지는
서양이나 동양이나 지도의 모습은 한 끗발 차이였다.
하긴 조선인의 세계는 중국을 넘어서지 못했고 유럽인의 세계는 아랍을
넘어서지 못했던 판에 더 먼 지역에 대한 지식이 무슨 쓸모가 있었으랴. 17세기까지만 해도 조선 지식인의 관점에서
영국(英國)과 일목국(一目國) 간에는 아무런 실질적인 차이도 없었다.
한편 근대적 지도는, 지구가 둥글고 한정된 공간이라는 경험적으로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가정에서부터 출발한다. 그런
다음 그 안에 경위선이라는 추상적인 선을 긋고, 그런 다음 대륙의 윤곽을 그리고 다시 그 안에 산, 바다, 국경선과
도시를 그려넣음으로써 완성된다.
전통적인 지도가 경험적으로 익숙한 주변의 공간으로부터 시작해서 바깥으로 차근차근 그려지는
것과는 정반대의 순서이다. 한 마디로 전통적 지도가 경험적이고 귀납적이라면, 현대적 지도는 합리적이고 연역적이다.
현대적 지도는 아무리 좁은 지역을 나타내고 있다고 하더라도 항상 그 지역이 속해 있는 더 넓고 큰 세계를 전제하고
있다. 그 더 넓고 큰 세계에 대해 실제로 지식을 가지고 있는지 아닌지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경위선이 격자모양으로
그어진 백지도 자체가, 그 격자 안에 어쨌든 ‘뭔가’가 존재하고 있으리라는 예측적 기능까지 대행해주기 때문이다.
서양
지리상의 발견의 역사는 직접 항해선단을 이끌고 바로 이 백지도를 조금씩 채워나가는 과정이었다. 아니, 그 반대로 그들이
항해선단을 끌고 먼 세계로 나가기 위해서 새로운 공간적 패러다임을 필요로 했다는 것이 실제로는 더 옳은 말일 것이다.
둥근 지구와 경위선은 이미 2천년 전에 그리스인들이 만들어 놓았던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미지의 세계로 떠날 수
있었던 용기 뒤에는 향신료와 황금에 대한 탐욕과 그런 것을 필요로 했던 사회적 상황이 존재했다. 즉 유럽인의 세계가
아랍을 넘어서야 했던 어떤 필요가 존재했던 것이다.
어쨌든 그것은 정말 엄청난 차이를 몰고 왔다. 이러한 사실이 전통적 지도의 경험적, 귀납적인 사유에 대한 현대적 지도의
합리적, 연역적 사유의 최종적 승리를 의미하는 것일까? 천만의 말씀이다. 앞서 말했듯이, 전자는 후자보다 더 ‘쉽고
직관적인 인터페이스’를 가졌다.
후자의 지도를 이해하려면 일정한 배경지식이 있어야 하지만, 전자는 누구나 한번 보고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만들어졌다. 익숙한 경험에 근거해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더 전이가 빠르고 효과적인 인터페이스를
가졌다고 할 수 있다.
한번도 지구의 모습을 본 적이 없었던 사람들에게 구체형의 세계지도를 이해하는 일이 얼마나 낯선
일이었을지 상상해보라. 그것은 기존의 경험과 학습이 새로운 인터페이스 학습을 억제하는 경우에 해당한다.
결과적으로 놓고 보면, 좁은 지역, 이를테면 우리 동네 지도를 그릴 때는 전자가 더 효과적이다.
반면 넓은 지역,
이를테면 세계지도를 그릴 때는 후자가 더 효과적이다. 전 지구를 한눈에 시각화하는 일은 우리의 제한된 경험 세계를
뛰어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연 현대의 세계지도는 공간을 있는 그대로 객관적으로 반영하고 있는 것일까?
적도 부근이 이상하게 왜곡되어 보이는 옆의 지도는 골-피터스(Gall-Peters)라는 투영법에 의한 것이다. 3차원의
구체를 2차원의 평면에 표현하기 위해 다양한 투영법이 개발되었는데, 그 중 가장 많이 쓰이는 방법이 항해지도에 자주
쓰이는 메르카토르 투영법이다.
이런데 이 방법은 고위도 지방으로 갈수록 면적이 넓어져서, 저위도 지방에 위치한 아프리카나
남아시아의 국가들은 고위도 지방의 북아메리카나 유럽에 비해 상대적으로 왜소해 보인다. 피터스라는 급진적 지리학자가
이점을 지적하며, 메르카토르 도법은 상대적으로 부유한 북반구의 편향된 시각이 반영된 지도라고 비판하며 새롭게 들고
나온 것이 바로 골-피터스 도법이다.
그런가 하면 최근에는 의도적으로 남북을 뒤바꾼 거꾸로 된 세계지도도 나와 있다.
과연 이런 지도들이 새로운 대안이
될 수 있는지는 각자의 판단에 달린 문제겠지만, 공간을 바라보는 시각이 얼마든지 다양하게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시각에 따라 작성된 지도가 우리의 공간인식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살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만은
사실이다.
글_편집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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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여지도]
채색사본.
1747년.
숭실대박물관 소장.
소중화주의의 영향을 받아 과거의 명나라와 현재의 한반도가 합쳐져 있다.
해동지도 중의 [대동총도].
채색사본.
18세기 중기.
서울대규장각 소장.
골-피터스 투영법에 의해 제작된 세계지도.
적도 부분이 묘하게 늘어나 잘못 제작된 것처럼 보인다.
우리가 흔히 보아온 메르카토르 투영법에 의해 만들어진 세계지도.
지구는 구체이기 때문에 표면의 면적, 각도, 거리, 방위 등을 오차 없이 그대로 평면에 전개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따라서 지도를 작성할 경우 각각의 목적에 맞는 투영법을 사용해 지도를 작성하게 되며 이에 따라 어떤 부분은 실제보다
늘어나기도 하고 어떤 부분은 반대로 축소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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