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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원.소.는 디자인이다.

먼 옛날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세상 모든 것이 네 가지 물질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했다.
소위 4원소라 불리는 물, 불, 바람, 공기는 주위환경과 조건에 따라 다른 물질로 전이되며 여러 사물을 구성한다고 믿어졌으며, 이러한 생각은 중세에 전해져 한탕을 노리는 사람들을 연금술이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이끌었다.
이와 달리 동양에서는 좀더 인심을 써서 다섯 가지 물질을 이 세상의 토대로 보았다. 5행에 속하는 수, 금, 목, 화, 토가 그것으로 서양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들은 서로를 낳거나 물리치며 상생과 상극을 이룬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이는 침술을 비롯한 동양의학의 근간이 된다. 어쨌거나 세상의 다양한 사물들이 본질적인 몇 가지 물질로 구성되어 있다는 이러한 생각은 당시로서는 지극히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관찰에 입각한 사상이었다.

그렇다면 실제로 우리는 어떤 물질들에 둘러싸여 살고 있을까? 주변을 둘러보니 갖가지 물건들이 눈에 들어온다.
우선 이 글을 쓰고 있는 컴퓨터 모니터, 그 옆의 머그컵, 전화기, 파일철, 책상, 의자, 볼펜, 옷... 도저히 다 셀 수도 없다. 온통 물질 투성이다.
20세기를 ‘물질 과잉의 시대’라고들 하지만 21세기라고 딱히 우리가 다른 비전을 갖고 있지는 않아 보인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에서 보자면 우리 주변에 있는 것들은 대단히 한정된 ‘무엇’이다. 우선 그 중의 반은 플라스틱, 소위 합성수지라 불리는 모든 것들의 총칭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 같다.
요즘엔 솔직히 ‘무엇’으로 만들어져 있는지 확실하지 않은 것도 있으니 일단 ‘같다’라고 해두겠다. 암튼, 그 다음으론 유리, 천, 나무, 돌... 한결 마음이 가벼워진다. 그래봐야 우리는 손으로 셀 수 있는 정도의 몇 가지 물질에 둘러싸여 있는 것이다.

근대 이후 이러한 물질들에 형태와 이름을 부여해주는 것은 다름아닌 디자인의 역할이 되어버렸다.
같은 물질로 이루어진 물건이라도 디자인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와 교환가치를 부여받는 걸 보면 디자인을 하나의 원소를 다른 원소로 전환하는 현대판 연금술이라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러한 물질들이 디자인에게 호락호락 넘어가는 것은 아니다. 당당하게 자신의 요구를 관철하고, 자신의 물성을 고집하며, 때로는 반대로 디자인이 소재에게 살살 아부를 해야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소재들은 자기만의 시대적, 문화적 맥락을 껴안고 살아간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웹디자인이 소재로 하는 디지털 정보가 될 것이다.

최소한 19세기 초까지 과학자들은 알루미늄의 존재와 그 생성의 비밀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하필이면 1950년대에 가서야 알루미늄이 디자인 재료로서 각광받기 시작했을까?
옷을 만드는 재료인 면(cotton)은 산업혁명을 가져왔으며, 플라스틱은 20세기를 대변하는 하나의 물신(物神) 중의 하나이다.
아이들이 만드는 조립식은 그 자체로 플라스틱의 속성을 드러내며, 유리가 건축에 사용되기 시작하면서 건물은 자신의 성격개조에 들어갔다. 이 외에도 문화사적 관점에서 보자면 이 세상에 평범한 물질이란 없다.

디자인의 소재 중 20세기 동안 우리의 삶을 바꿔놓은 대표적인 소재 4가지를 정해 그 소재가 지닌 의미를 짚어보았다. 이들의 표정을 살피는 일은 생각보다 간단치 않다.
단순히 그 소재가 지닌 물성적 특질, 예를 들면 비중이나 강도, 녹는점 등을 아는 것은 별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소재가 디자이너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또 디자인을 뒷받침할 수 있으려면 소재의 속성과 더불어 그것이 지닌 감수성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유리가 투명하다는 사실만으로는 디자인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지만 그 투명함에서 내밀하고 비밀스런 유리의 표정을 느낄 수 있다면 하나의 디자인 언어가 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단순히 제품 디자인뿐만 아니라 건축, 패션, 더 나아가 미술이나 음악과 같은 다양한 시각에서, 즉 ‘디자인 어휘’로서 재료에 접근해보았다.

소재는 단순한 재료 이상이다. 소재는 그 물체의 본질을 표현하고 시대를 반영하며, 때론 디자인 자체를 규정하기도 한다. 더 정확히는 물질문명의 기반을 이루며, 그 물질문명의 중심에 현대 디자인이 서 있는 것이다.

그리고 당연히 제.5.원.소.는 디자인이다.

글_편집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