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nd element : plastic

뮤턴트 에어리언, 플라스틱으로 디자인하기

“ 유럽 지역의 요새를 날고 있는 행성간 로켓은 주로 내열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져 있다. 이 재료는 매우 가볍고 견고해서 운석과 충돌해도 까딱없을 정도다. 태평양 연안 연방에는 그런 종류의 소재가 전혀 없었다. 아직도 목재같은 천연섬유가 사용되고 있고, 도처에 널린 것이 무쇳덩어리다. 그 생각을 하자 타고미는 몸이 움츠러들었다...
은”
- 필립 K. 딕, [높은 성의 사나이](1962) 중에서

플라스틱, 대체의 역사
60년대 플라스틱에 대한 기술적 환상은 영화 [토탈 리콜]이나 [블레이드 러너]에 영감을 주기도 했던 SF작가 필립 K. 딕의 작품에도 잘 드러나 있다.
SF소설의 수작으로 꼽히는 1962년작 [높은 성의 사나이(The Man in the High Castle)]에서 플라스틱은 독일 제국이 자랑하는 첨단 과학기술을 상징하는 물질로 그려지고 있다.
소설에 나오는 전체가 합성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자동차 역시 태평양 연안 연방(일본)의 부러움의 대상이다.
물론 자동차 엔진까지 플라스틱으로 만드는 요즘의 추세로 볼 때, 플라스틱 로켓을 만든다는 것이 그저 환상으로 남을지는 아직 두고 봐야 할 일이다.

플라스틱의 역사는 대체의 역사이다. 20세기만 놓고 따져봤을 때 플라스틱만큼 강렬하게, 더욱이 맹목적으로 다른 소재의 영역에 침투해 들어간 소재는 없을 것이다.
순진한 과학자들의 열정에 힘입어 플라스틱은 먼저 섬유의 영역을 침식해 들어갔으며, 다음으로는 고무, 유리, 철, 나무 등 오랫동안 인간과 함께 해온 소재들을 하나씩 대체해 나갔다.
위의 대목이 재미있는 것은 이 책 자체가 대체 역사를 다루고 있는 소설이라는 사실이다.
(이 소설에서는 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과 일본이 승리한 것으로 나온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소설 속의 소설은 진짜 역사를 다루고 있다.)
물론 작가가 플라스틱의 그런 점까지 염두에 두고 썼다고는 생각되지 않지만 ‘대체’라는 말은 플라스틱의 본질에 근접한 단어이다.

‘성형하기 알맞다’라는 뜻을 지닌 그리스어 ‘plastikos’에서 유래한 플라스틱은 ‘가소성’이라는 그 어원 그대로 처음부터 무엇이든지 모방할 수 있었으며, 무엇으로든 변할 수 있었다.
때로는 유리처럼 투명하게 몸을 숨기며, 때로는 딱딱한 금속 행세를 하며, 또는 세라믹이나 나무의 질감을 흉내내며 전세계를 플라스틱 세상으로 바꿔왔다.
아니 태어날 때부터 플라스틱은 ‘무언가’를 대신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1860년경 무분별한 코끼리 사냥과 전쟁의 여파로 당구공을 만드는 상아가 부족하게 되자 뉴욕의 한 실업가가 상아를 대신해 당구공을 만들 수 있는 재료를 발명하는 자에게 1만 달러의 상금을 내걸었던 것이다.
이 현상금은 우연곡절 끝에 셀룰로이드의 발명으로 이어졌으며 최초의 실질적인 플라스틱 제조의 기초가 된다. 즉 플라스틱은 처음부터 자신의 소명(즉, 자연의 모방)을 받고 태어난 것이다.

그 다음으로 플라스틱의 목표가 된 것은 섬유였다.‘석탄과 물과 공기로 만들어진 거미줄보다 더 가늘고 강철보다도 강하며 비단보다도 부드러운’ 물질. 이것이 바로 1939년 뉴욕 만국박람회에 나일론이 소개될 때 내건 캐치프레이즈이다.
곧 이어 1940년 뒤퐁사가 선보인 나일론 스타킹이 시판 첫날 4백만 켤레가 팔려나갔다는 사실은 사람들이 당시 이 새로운 물질에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짐작케 해준다.
한술 더 떠 사람들은 플라스틱을 일컬어 ‘신이 세상을 창조할 때 유일하게 빠뜨린 물질’이라고 떠들어댔다. 과학과 이성이 신의 부족한 부분을 메워줄 만큼 위대한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이다.
20세기 플라스틱의 시대가 채 지나가기도 전에 사람들은 자신들의 주변이 하나 둘씩 플라스틱으로 채워지는 광경을 목격하게 된다. 의자, 책상, 화장실, 꽃, 음식, 심지어 인공관절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플라스틱은 인간의 몸 속까지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플라스틱 폭발하다
하지만 20세기 내내 플라스틱이 사람들로부터 환영받았던 것은 아니다. 앞으로 돌아가 1930년대 나일론 스타킹에 열광했던 사람들은 최초의 시기가 지나고 난 후, 오히려 플라스틱에 대해 냉담한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자신의 영역을 갖지 못한 채 태어난 플라스틱은 그저 남의 흉내만 내는 소재로 여겨졌으며 이것은 프로테스탄티즘의 전통을 이어받은 사람들에게 비도덕적인 무엇으로 비춰진 것이다.
또한 구세대 디자이너들로서는 자신들의 감수성을 전혀 반영하지 못하는 이 새로운 물질을 이해할 수 없었고 당연히 플라스틱의 매력을 드러내는 데도 서툴렀다.
더구나 값싼 대량생산이라는 플라스틱 최대의 장점은 싸구려라는 사람들의 인식을 부추겼다. 플라스틱이 제 모습을 찾기까지는 그것에 익숙한 새로운 세대의 디자이너들을 기다려야만 했다.

가장 먼저 플라스틱을 이해한 것은 감수성이 예민한 예술가들이었다. 플라스틱이 가진 가벼움, 현란하고 가변적인 색채, 깊이가 없는 자기노출과 대중성을 띤 공격성 등, 현대 사회의 감수성을 나타내기에 플라스틱보다 더 좋은 재료는 없었다.
특히 1960년대에 유행한 팝 아트는 플라스틱에 고유한 컨텍스트를 심어주기에 충분했으며, 때로는 예술가들 자신이 디자인에 매료되어 직접 디자인 작업을 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플라스틱의 폭발은 그에 조금 앞선 1950년에서 60년대에 걸친 기술적 발전 덕으로 돌려야 할 것이다.
이때서야 비로소 폴리프로필렌을 비롯해 충분한 강도를 지닌 합성수지들이 개발된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최대의 성과물이자 60년대 디자인에 있어 하나의 이정표로 남아 있는 원-피스 플라스틱 의자(One-piece Plastic Chair)가 등장하게 된다.

디자인에 있어 의자는 생각보다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하나의 의자에는 그 당시 사회의 기술적 성과와 사람들의 욕망이 반영되곤 한다.
단 한번의 주조로 만든, 조립이 필요 없는 의자. 1967년 베르너 판톤이 선보인 의자가 그러했다. 이 의자에는 그 당시의 기술적 발전이 일궈낸 디자인적 가능성과 소재가 훌륭하게 결합되어 있다. 하지만 그의 디자인이 지금까지 거듭 언급되는 것은 단지 파격적인 형태나 색깔 때문만은 아니다.
또 그의 의자가 선사하는 다양한 경험, 예를 들면 에로틱한 욕망, 때문만도 아니다.
물론 훌륭한 디자이너는 자신의 시대가 선사하는 디자인적 가능성을 유감없이 발휘하곤 한다. 하지만 그의 디자인은 그 가능성마저 뛰어넘는 것이었다.
실제로 이 의자의 원형을 구상한 것은 1956년, 그러니까 당시 기술로서는 실현이 불가능한 시절이었다. 충분한 강도를 지닌 폴리에스테르가 등장하기까지 판톤의 디자인은 10년을 기다려야 했다.
[클라시커 50 디자인], 크리스티네 지베르스/ 니콜라우스 슈뢰더 ,해냄,2001,P181참조

비슷한 시기를 전후하여 이러한 시도는 여기저기에서 일어났으며 대략 1970년대 말까지 플라스틱은 전성기를 누리게 된다.
1960년 이후 레고는 나무 장난감 생산을 중지하고 플라스틱으로만 제품을 생산하기 시작했으며, 패션 역시 파코라반이 1965년 사슬 갑옷에 연결된 플라스틱 디스크로 드레스를 만든 후 플라스틱에게 문을 열어주었다.
어센틱, 카르텔 등은 기세를 몰아 플라스틱의 고급화에 앞장서며 주변의 가구들을 재빨리 플라스틱으로 바꾸었다. 어디나 마찬가지였다. 아마도 당시의 분위기는 엔디 워홀이 록 그룹 벨벳 언더그라운드를 위해 기획한 다음의 공연 이름에 잘 나타나 있을 것이다.
‘피할 수 없는 플라스틱의 폭발’
- [도발:아방가르드의 문화사] 마크애글스,이우,2002,P208에서 재인용

플라스틱, 오명을 벗고 돌아오다
플라스틱의 직접적인 시련은 1973년과 1978년, 두 번의 오일 쇼크와 함께 찾아왔다. 석유값이 폭등하면서 석유화학 공업에 기반을 두고 있던 플라스틱 산업에 가장 먼저 타격을 준 것이다.
또 하나의 간접적이긴 하지만 더 치명적인 타격은 환경 문제의 대두였다. 일반적으로 플라스틱이 환경오염의 주범으로 여겨지는 것은 그것이 썩지 않기 때문만은 아니다.
예를 들어 주변에 널려있는 썩지 않는 돌멩이를 가리켜 환경 오염의 주범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플라스틱의 문제는 보다 단순한 수학적인 문제에 있었다. 바로 그 생산되고, 또 버려지는 천문학적인 양이 문제였던 것이다.
대량생산, 대량소비의 화신 플라스틱이 사람들의 공격목표가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1980년대를 관통한 플라스틱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와는 달리, 디자인에 있어 플라스틱이 외면받았던 적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70년대 이후에도 플라스틱은 디자이너들이 꾸준히 애용한 소재였다. 80년대를 플라스틱과 함께 시작한 스와치, 플라스틱으로 모더니즘을 청산해버린 필립스탁에서부터 최근의 론 아라드에 이르기까지 플라스틱은 발걸음을 멈춘 적이 없다. 다만 플라스틱은 조금 조신해진 모습이다.
그리고 이런 현상은 90년대를 지배한 미니멀 트렌드로 이어진다.

물질문명에 대한 사람들의 시각은 지난 20세기의 마지막 십년 간 너무도 많이 변해버렸다. 이러한 변화는 너무나 뚜렷해서 언더그라운드 패션이나 키치를 내세운 대중문화와 같이 전통적으로 윤리적인 조류에 대해 저항하는 태도를 지닌 분야에도 눈에 보이는 영향을 미쳤다.
1980년대의 감각적이고 물질적인 과부하 상태를 보낸 후, 지칠대로 지친 사람들은 단순함과 순수함이라는 새로운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버렸다.
사람들은 보다 더 단순한 형태를 선호했고 디자이너들도 요란한 장식보다는 소재의 표면 처리나 색으로 사람들에게 어필하는 쪽을 택했다.
전세계적인 미니멀 트렌드 속에서 20세기의 마지막을 강타한 애플 컴퓨터에 대한 레이 라일리의 언급이 이를 잘 설명해주는 것 같다.
“진짜 멋진 건 애플 디자이너들이 새로운 모양을 발명하려고 노력하지 않고, 재료 그 자체에 초점을 맞췄다는 것이다. 플라스틱의 흐름, 그것은 진정한 형태의 조각이다.”
- [월간디자인]2003년3월호 P150에서 재인용,애플의제품중 큐브에 대한언급

다른 한편, 독일의 V+W(Vogt + Weizenegger) 디자인 그룹이 최근 선보인, ‘the SINTERCHAIR’는 앞으로 다가올 플라스틱의 다른 가능성을 시사해주는 듯 하다.
겉으로 보기엔 단순히 60년대의 원-피스 플라스틱 의자의 계보를 잇는 듯한 이 의자는 ‘가소성’이라는 플라스틱의 속성과 ‘대량생산’이라는 플라스틱의 양태가 현대의 테크놀러지와 교묘히 결합한 작품이다.
사용자는 즉석에서 3D 모델링 시스템(SLS(r), Selective Laser Sintering)을 사용해 자신에게 가장 알맞은 의자의 형태를 결정한다.
잠시 후, 디자이너가 의자의 기본 뼈대에 구매자의 데이터를 입력하면 마치 손으로 맞춘 듯한 의자가 탄생하는 것이다.
이는 현대 테크놀러지와 근대 수공예기법의 평화로운 공존이자 대량생산과 맞춤생산이 결합한 미래의 디자인 개념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곳에서 플라스틱은 단순한 소재가 아닌, 디자인 프로세스의 핵심 부분을 이룬다.

글_박활성기자

유연한. 경쾌한. 인공적인. 가짜의. 대량의. 소비적인. 디스토피아. 공상. 현란한. 사이키델릭. 에로틱한. 일홰적인. 반항적인. 알랑거리는. 가소성의. 아방가르드. 폭발적인. 가변적인. 자조적인. 익살맞은. 컬트. 패러독스. 넌센스. 말랑말랑한. 스티로폼. 펑키. 즉흥적인. 대리만족. 환경오염.

Panton chair (Model no.PA100).
베르너 판톤.
1967.
열가소성 플라스틱.

Ball Chair.
에로 아르니오.
1963.
강화유리섬유 폴리에스테르.

플라스틱의 매력을 한껏 보여준 애플의 큐브.
2000.

the SINTERCHAIR.
V+W.
2002.

Tavola collection.
카르텔.
1976.

Bookworm.
론 아라드.
1997.
PVC.

Wall- chair.
Jurgen Bey.
1997.
PVC 코팅.

La Marie.
필립스탁.
1999.
폴리 탄산 에스테르.

Once Again.
스와치.
2001.

자료제공:
Droog Design, Kartell.
Vogt + Weizenegger.
애플코리아.
스와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