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th element : DESIGN

재료, 디자인, 인간

어떤 일을 하거나 일을 이루는 ‘꺼리’로서의 재료
제품 디자인에 대해 논의할 때 논리적으로 가장 우선하는 문제는 실용성과 유용성의 문제이며, 이는 그 실체를 정확하게 이해한 후 적용되는 재료를 철저하게 분석할 때에만 효과적으로 달성할 수 있다.
재료가 적절치 못하게 선택되어진다면 마치 우리 신체기관들이 장애를 겪는 것과 동일한 불완전함과 불만족을 사용자에게 제공하게 되는 것이며, 신체적 장애를 일으키는 것과 같다. 종이를 가지고 방탄복을 만들거나, 플라스틱으로 난로를 만들거나, 철판으로 부채를 만든다고 한다면, 어린아이도 웃을 일이 될 것이다.
특히, 기술적인 문제의 경우 대부분이 재료 선택의 문제와 얽혀 있기 마련인지라 디자인과 재료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실용적인 제품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사용되는 재료나 제작상의 기술이 무시된 예는 없다.
동서를 막론하고 그릇을 비롯한 고대 유물들을 살펴보면 한결같이 의도된 사용목적에 따라, 또 재료와 그 재료가 갖는 특성에 따라 디자인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겉에 나타난 유약이나 색채, 또는 문양들로 표면처리를 한 경우에도 그것들이 절대로 실체를 압도하지는 않는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단지 재료 자체의 문제만은 아니다.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재료의 올바른 사용, 그 재료와 구조와의 관계, 그리고 재료의 미적 효과 등에 대한 문제이다.
재료의 선택과 사용, 그리고 적절하고 효과 있는 통합과 조화에 관한 점은 제품의 기본적인 구조를 디자인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디자이너의 중대한 책임인 것이다.

현대사회는 확실히 잘 만들어지고, 기능도 완벽한 제품들이 전체 제품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그렇다고 위의 문제들이 해결된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더욱 깊이 논의되어야 할 여지는 점점 커지는 추세이다. 문제는 속도이다.
기술은 따라가기조차 힘들고, 문화는 진화하며, 인간의 욕구도 끊임없이 변화한다. 따라서 제품 디자이너는 기술적인 지식과 아울러 창조적이며 독창적인 예술적 소양을 가져야 하며, 계속해서 처음으로 돌아가 스스로 의문을 던질 줄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등불 밑의 진실이 반드시 태양 빛 아래에서도 진실이지는 않기 때문이며, 또한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만이 아무 것도 의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래저래 현대의 제품 디자이너들은 고되다.

디자인의 표현 제재(題材)로서의 재료
많은 사람들이 21세기를 문화산업이 지배하는 시대가 될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으며, 그러한 모습들은 이미 여러 가지 면에서 광범위하게 나타나고 있다.
타일러(Tylor)의 총체론적 개념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문화라고 일컫는 소재들은 ‘지식, 신앙, 법률, 도덕, 관습, 그리고 사회구성원으로서 인간에 의해 얻어진 모든 능력이나 습성의 복합’을 의미한다.
반면에 실제 소통되는 말과 그것을 지배하는 규칙 내지 원리를 구별하는 관념론적 개념의 입장에서 본다면 문화는 관찰되는 행동 자체가 아니라 그런 행위를 규제하는 규칙의 체계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사회집단의 문화현상 과정과 그 요소들 사이의 상호작용을 알기 위해서는 총체론적 접근이 바람직하다고들 말한다.
전체문화를 하나의 얼개로서 살피고 구조적으로 인식할 때, 학문, 예술, 교육, 종교, 정치, 경제, 풍속, 등의 변천을 사회문화의 요소로서 인식하는 문화적 역사가 성립된다는 것이다. 어쨌거나 모든 문화적 얼개에 속한 각 분야들 중 특히 예술은 어떤 소재를 출발점으로 하여 일을 시작하게 되며, 그 결과를 역사에 남긴다.
심지어 어두운 굴속에 깊이 숨어 음모의 이빨을 드러내는 정치공작도 하나의 ‘거리’로부터 출발한다. 재료는 역시 모든 예술적 창조작업의 시작과 끝이다.

모든 예술은 하나의 기호창조이고 기호는 전달기능을 갖는다.
예술은, 무형이면서 비시각적인 이미지 재료를 있는 그대로거나 또는 어떤 가공작업을 통하여 유형이며, 시각적이고 존재적으로 우리에게 전달해 준다. 사회현상에 대한 이러한 구조적 인식은 디자이너의 창조적 작업도 소비자의 필요성과 요구사항이라는 하나의 재료를 가지고 출발한다는 생각을 가능케 해준다.
디자인이 과학과 예술의 통합작업이라는 데에 동의한다면, 편리한 사용성 추구와 관련된 과학에 관한 문제 외에도, 아름다움의 추구와 관련된 스타일링이라는 문제는 디자이너의 예술적 소양과 재료지식에 전적으로 달려있다.
최종적인 스타일링 단계에서는 이미 설정된 구조와 관련하여 가장 효과적이며 효율적인 재료를 검토하고 목록을 만들어 실험하고 적용시키게 되는데, 외형적 미와 추를 결정하게 되는 그 단계를 이름하여 머티리얼라이즈(materialize)라고 한다.
최근 영국에서는 디자인의 한 분야로서 서피스 디자인(Surface Design) 전공이 따로 개설되기에 이르렀다. 결국 재료의 적절한 이용이 실체화의 근본이라는 점을 강력하게 시사해 주는 대목이다.

물질적이고 정신적인 재료로서의 인간
현재 국가목표로 잡고 있는 ‘2000년대 세계 10위권 선진국 진입’을 이루기 위해서는 분명 재료관련 산업의 뒷받침이 매우 중요하다. 또한 머지 않은 장래에 인류에게 심각하게 대두될 자원고갈, 에너지 문제 등을 해결하여 인간의 생존과 번영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기능을 지닌 소재의 개발이 불가피하다.
그러나 한편 물질재료를 기반으로 하는 문명이, 문화와 그 기반이 되는 정신재료를 밀어내고 있어 그로 인한 정신의 황폐화가 인류와 자연을 좀먹어간다는 위기상황을 많은 이들이 지적한다.

분명 정신적 가치가 물질적 가치를 어루만질 수 있을 때 그 사회는 휴머니티가 있는 사회가 될 것이지만, 그렇다고 물질이 죄악시되는 사회는 더욱이 바람직하지 못하다. 물질과 정신의 균형발전이라는 표현은 정신재료와 물질재료가 별개로 존재하여 상호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상보적인 관계여야만 한다는 의미를 말하는 것이다.
문화와 문명은 양립하되 동일 비중으로 발전해야 한다. 때문에 우리는 물질 재료의 발달과 균형을 이루는, 정신의 승화를 위한 가치 있는 많은 재료들도 찾아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충분히 가능하다.
왜냐하면 우리 선조들이 그랬던 것처럼 현재의 우리도 그와 같은 정신적 재료와 물질적 재료를 발견하여 개발하고 개선시켜 인류를 진화시키는 지혜를 아직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글_임연웅,원광대 산업디자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