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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곳과 저곳의 분리는 삶과 죽음 현재와 과거 미래 현실과 가상 따위의 시간과 공간적인 원근감을 초래했다”
- [정보의 역사를 읽는다], 마츠오카 세이코, p78
유리가 없는 공간 space & glass
창이 없는 건축물을 상상할 수 있을까? 유리창이 없는 공간을 생각할 수 있을까? 아마 그것은 감옥 혹은 단절되거나
격리된 어떤 공간을 의미하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이제 인간생활이 유리라는 재료로 인해 얻게 된 물질적 정신적 이득에
대해 새롭다거나 다른 세계를 갖게 되었다는 생각을 접어버린 듯 하다.
팔기 위한 혹은 사기 위한 selling & buying
상품 디스플레이의 역사는 유리창이 없는 건물이 주류를 이루었던 고대 이집트에서 상점 외벽에 물건들을 걸어놓았던 것에서
시작한다.
이때 사람들은 도난을 방지하기 위해 굵은 밧줄로 외벽에 붙인 상품들을 묶어놓았다고 한다. 마치 지금 백화점에서
고가의 상품들을 도난 방지용 와이어로 묶어놓은 것처럼
이렇게 시작된 윈도디스플레이의 역사는 유리라는 재료가 건축에서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게 되는 산업혁명 시대를 거치면서 근대적인 디스플레이로 발전해 나간다.
윈도디스플레이 덕에 사람들은 굳이 상점에 들어가지 않더라도 그 상점이 어떤 물건을 판매하는 상점인지 알 수 있게 되었으며 반대로 상점으로서는 유리를
통해 상점의 모든 상품을 가능한 한 많이 보여줌으로써 직접 구매행위를 하려는 고객들만 가게 안으로 들어오도록 유도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자본주의의 이름으로 이루어진 대량생산은 치열한 경쟁사회를 낳고, 또 다시 그
경쟁사회는 윈도디스플레이에게 더 많은 것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나타나 물건의 대량, 과잉생산은 물건과 사람 사이의 기능적 단순소유 관계를 깨뜨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사람들은 이제 더 많은 선택 속에서 자신의 입맛에 맞는 물건을 고를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에 따라 판매와 구매의
관계 역시 행위의 성질이 변하게 되었다.
예전에는 상품을 ‘보여주는’ 행위는 판매와 구매 사이에서 꼭 필요한 행위가
아니었다. 물건을 사려는 사람은 자신에게 필요한 물건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으며, 또 어디 가면 그것을 구할
수 있는지 역시 명확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상품이 경쟁이라는 이름아래 편입되면서 이 ‘보여줌’은 중요한 지위를 획득하게
된다.
판매와 구매사이에서 ‘보여줌’이라는 것은 물건의 공급을 담당하는 판매자에게는 ‘판매’의 가장 중요한 첫 단계로서,
물건을 구매하고자 하는 구매자에게는 ‘구매’의 첫 단계를 시작하는 접점이 된다.
현대 문명사회에서 판매와 구매의 접점에는 상점의 윈도에 놓인 상품 혹은 이미지가 있다.
상점 윈도가 없는 경우에는
상점 이름이나 브랜드명만이 상점의 내용을 간단하게 설명하기도 하지만 상점이 있는 윈도의 경우 상품을 직접 보여줌으로써
사람들에게 상품에 대한 흥미와 소유의 욕구를 유발하고 결국에는 상점으로 들어오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잠재적인
고객)들을 스스로 상점으로 들어오게 하는 힘은 윈도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안과 밖 between inside & outside
미국의 몇몇 도시를 제외하고 세계의 큰 도시들은 대부분 대중교통이 발달한 ‘걷는’ 도시이다.
이렇게 걸으면서 일상생활을
해나가기 위해서 사람들은 건축물을 사이에 두고 밖에서 안으로, 안에서 밖으로 목적에 따라 움직이며 살아가게 된다.
이렇게 걷는 문화 속에서 사람들은 다른 이에게 자신을 나타내는 수단의 하나로서 물건을 소유하고 이를 보여줌으로써 자신을
표현한다. 그리고 이러한 물건의 소유는 상점이라는 공간 안에서 구매라는 행위를 통해 이루어진다.
작은 상점인 경우는 1m 내외, 대형 백화점의 경우 디스플레이를 위한 윈도의 크기는 8m 정도이다. 8m 윈도 앞을
사람들이 일상적인 걸음걸이로 걷는 데는 5초 내외의 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사람들에게 이 짧은 시간 안에 상점으로
들어올 수 있는 용기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 상점들은 경쟁이라는 이름아래 적극적으로 자신을 표현한다. 이러한 판매자와
구매자 사이에는 윈도디스플레이라는 판매촉진 활동이 놓여 있게 마련이다.
그렇다면 크지 않은 윈도디스플레이 공간 안에
많지 않은 무엇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
윈도디스플레이 디자이너들은 유리를 사이에 두고 불특정 다수의 길거리를 걷는 사람들(passer-by) 에게 상점 혹은
상품(inside)을 설명하게 된다.
사람들이 하나의 물건을 소유하게 될 때까지는 여러 단계를 거치게 되는데 눈으로
어떤 물건을 본 후 만져보거나, 냄새를 맡아보고 싶거나, 맛보고 싶거나, 어떤 소리를 내는지 알고 싶다는 감정을 일으키게
된다. 이렇게 어떤 물건을 접했을 때 시각, 촉각, 후각, 미각, 청각의 오감으로 판단하여 결국 소유의 여부를 결정하게
된다.
상점윈도에서 구매자의 오감을 만족시킬만한 시간적인 공간적인 한계(outside)를 판매자들은 윈도의 유리를
통해서 해결하고 있다.
상상 속의 세계 real world & imaginary world
사람들이 물건을 구매하는 이유는 그 물건이 지닌 기능만을 소유하는 데 있지 않다. 그 물건의 이미지가 지닌 사회적
경제적 지위를 함께 소유함으로써 사람들은 소유에 대한 만족감과 자신의 위치를 자타에게 느끼게 해준다.
물건이 가진
이미지의 전달은 윈도를 보는 사람들에게는 윈도의 장면을 통해 동질성을 느낄 수 있도록 하면서 사람들이 꿈꾸는 인생을
물건과 함께 보여줌으로써 가능해진다.
이러한 이상적인 장면을 보여주는 데 있어서 윈도의 유리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데 이것은 현실의 세계가 아닌 꿈속의 세계, 마음의 세계, 미래의 세계를 유리라는 경계선을 사이에 두고 보여줌으로써
생각 속의 세계를 눈으로 직접 볼 수 있게 해준다.
만일 이때 윈도의 유리가 없다면 사람들은 윈도 안에 펼쳐진 이상의 세계를 현실 세계의 일부로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직접 만질 수 있는 이상 세계는 더 이상 이상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유리를 통해 윈도를 보는 사람들이 느끼는 신비감은
유리 이쪽과 저쪽 세계에 대한 분명한 ‘가름’에서 온다. 이러한 가름은 사람들을 상점 안으로 들어오게 만들어주는 적극적인
감정을 유발하게 된다. 상점 안에서 보여주고 있는 상품의 이미지와 ‘저쪽’ 세계는 유리로 격리되어 있지만 멀지 않은
곳에 통로가 있음을 끊임없이 일깨워주는 것이다.
상점 문을 통해서 사람들은 유리 안의 세계로 들어올 수 있고 만져보고
느껴봄으로써 물건을 소유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소유하게 된 상품은 기능과 함께 윈도 안의 세계를 나의 것으로 만들었다는
꿈꾸던 세계에 대한 소유를 의미한다. 마치 드라마에 나오는 멋진 주인공처럼, 동화 속의 백마 탄 왕자처럼. 이렇게
윈도디스플레이에 있어서 유리는 두 가지 다른 세계를 나누어주는 혹은 연결해주는 의미를 갖는다.
사람들은 투명한 유리를
통해 또 다른 세계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도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는 다른 세계를 말이다.
불가능이 없는 유리 속의 세계 tension & identify
윈도의 유리는 보는 사람들에게 두 가지의 감정을 동시에 느끼게 한다.
현실에서는 볼 수 없는 세계를 바로 눈앞에 마주하면서
느끼게 되는 긴장감, 그리고 유리 한 장을 사이에 놓고 되고 싶은, 주고 싶은, 갖고 싶은 그 무엇을 윈도 속의 마네킹을
통해서 느끼게 되는 대리만족과 동질성이 그것이다.
윈도디스플레이 디자이너들은 유리를 사이에 두고 상점의 안과 밖을
넘나들며 바로 이 긴장감과 동질성을 바탕으로 이상적인 꿈속의 세계를 선사하는 역할을 한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불가능이
없는 세계를 유리 안에 만들어 가면서 말이다. 생각만 하던 세계를 볼 수 있는 세계로, 또 만질 수 있는 세계로,
나의 세계로 만들어 주는 세계의 경계에 유리가 있다.
마츠오카 세이코는 이곳과 저곳의 분리는 삶과 죽음, 현재와 과거,
현실과 가상, 시간과 공간적인 원근감을 초래한다고 말했다.
윈도디스플레이에서는 그 사이에 유리가 있다. 투명한 유리가.
글_박동애 아메바디자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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