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st element : metal

알루미늄과 뉴 메탈리즘

“ 자! 여러분 이것은 은의 순백색, 금의 불멸성, 철의 강인함, 구리의 가용성, 유리의 가벼움을 가지고 있어요. 그것은 쉽게 가공이 가능하고 매우 넓게 매장, 분포되어 있으며 대부분의 암석에 기본적으로 형성되어 있습니다..
더욱이 이것은 철보다 3배나 가벼워서 마치 우리가 추진하는 목적을 위해 창조된 것 같습니다.
니”
쥘 베른느(Jules Verne), [지구에서 달까지] 중에서

소설가들은 사회변화의 조짐을 감지해내는 데 있어 곧잘 놀라운 통찰력을 보여주곤 한다. 알루미늄에 대한 쥘 베른느의 언급은 바로 20세기 알루미늄의 존재를 한마디로 요약해주는 놀라운 구절이다..
여기서 그가 알루미늄을 통해 이루고자 했던 목적이란 지구에서 달까지 가는 스페이스 캡슐을 만드는 것이었지만, 동시에 그것은 바로 20세기가 추구했던 물질문명의 압축적인 상징이기도 하다.

소설 속의 언급처럼 알루미늄은 생각보다 매우 흔한 소재이다..
지구에서 세 번째로 풍부한 원소로 무려 지구표면의 약 8%를 차지하고 있다. 한마디로 우리 주변에 널려 있다..
손톱에 들이는 봉선화 물을 예로 들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손톱에 봉선화 물을 들일 때 꽃잎과 나뭇잎을 잘 빻으면서 명반을 함께 넣곤 하는데 이 명반이 바로 알루미늄이다..
예부터 명반은 약의 재료나 옷을 물들이는 매염제로 많이 쓰여왔으며 알루미늄이란 말 역시 염색 매염제를 뜻하는 라틴어 ‘알루덴’에서 유래하였다.

알루미늄과 20세기 물질문명
19세기와 20세기에 걸쳐 과학과 기술 발달을 통해 새로운 이름을 부여받은 물질 중, 디자인에 있어 전세계적인 영향을 미친 것 둘을 꼽으라면 알루미늄과 플라스틱을 들 수 있다..
하지만 플라스틱과 달리 알루미늄은 산업사회, 혹은 디자인에 있어서 한번도 지배적인 위치에 놓였던 적이 없다. 20세기 내내 끊임없이 자신의 이데아와 물성을 사람들에게 강요해온 플라스틱과 달리 알루미늄은 감초와 같은 자신의 위치에 만족해왔다..
사람들이 알루미늄에 대해 갖고 있는 가장 흔한 오해는 그것을 하나의 금속을 지칭하는 말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순수한 알루미늄 결정체는 오히려 소재로서 별다른 매력을 지니지 못한 금속에 불과하다.
오늘날 제품에 사용되는 알루미늄은 모두 다른 금속과의 합금으로, 알루미늄에 구리를 첨가해 강도를 높인 두랄루민이 가장 대표적인 예이다. 여기에 마그네슘을 섞고, 다시 아연을 첨가한 초초두랄루민은 현재 항공기 재료로 널리 사용되고 있다.
만약 알루미늄이 자신의 속성(무엇보다도 가벼운)을 유지한 채, 다른 금속과 자유로이 결합해 새로운 운명을 개척해 나갈 수 없었다면 그것은 그저 장식용 공예품을 만드는 소재에 머물렀을 것이다.

알루미늄으로 만든 제품은 일반적으로 두 가지 상반된 느낌을 제공한다.
하나는 19세기에서 20세기 초에 걸친 과학과 문명에 대한 낙관주의, 그리고 그로부터 파생될 유토피아적인 세계관에 대한 묘한 향수이며, 다른 하나는 새로운 것, 혁신적인 미래에 대한 경쾌한 느낌이다.
특히 알루미늄의 가벼운 무게는 속도를 표현하는 상징적 매체이기도 하다. 가구나 소품에 쓰인 장식적인, 때론 미니멀한 느낌의 알루미늄이 전자에 해당한다면, 전자제품에 쓰인 알루미늄에는 후자의 느낌이 강하다. 하지만 이것은 명목상의 구분일뿐 실제로 두 가지 느낌을 동시에 나타내는 디자인을 우리는 흔히 볼 수 있다.
일례로 유명한 마크 뉴슨의 [록히드 안락의자]를 살펴보자. 이 의자에 사용된 알루미늄의 미학은 그 파격적이고 유기적인 형태만큼이나 강한 인상을 내뿜는 표면처리에 의존하고 있다.
MoMA 디자인 건축큐레이터인 파올라 안토넬리는 이를 두고 “얇은 알루미늄 합판에 리벳을 박아넣은 이러한 표면처리는 20세기 초기의 비행기 동체를 연상시키며 지난 세기에 대한 동경을 느끼게 한다.”고 평한 바 있다.

알루미늄의 문화사
아무리 둔감한 사람이라도 느낄 수 있을 정도의 파워를 가진 플라스틱의 영향력을 생각해 볼 때, 문화사가 혹은 디자인 비평가의 입장에서 플라스틱이 20세기 디자인사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사실을 지적하는 일은 비교적 쉬운 일이다.
알루미늄에 대해서는 어떨까? 이번에는 관점을 조금 바꾸어 그보다는 덜 요란한 알루미늄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티핑 포인트]로 유명한 말콤 그래드웰은 1998년 콜로라도에서 열린 국제 디자인컨퍼런스에서 ‘소니의 워크맨이 미국인들의 건강상태 향상에 기여한 바’에 대해 발표한 바 있다.주장의 요지는 달리거나, 등산하면서, 혹은 역기를 드는 등 운동중에 워크맨을 통해 들려지는 음악이 운동효과에 주는 영향에 관한 것이었다.
인상적인 주제이긴 하지만 워크맨의 영향력을 미국인들의 건강상태따위에 국한시키는 것은 잘못된 일일 것이다. 워크맨은 인간을 둘러싼 공간을 변화시켰으며, 더 나아가 산업혁명과 도시화의 물결 속에서 개인이 잃어버린 사적인 공간을 재생시켰다. 이는 예전의 물리적인 공간 속에 홀로 있는 사적인 공간이 아닌, 대중 속에서 만들어지는 현대적 의미의 사적인 공간의 탄생을 의미하는 것이기에 더욱 중요하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1979년 처음으로 소개된 워크맨의 몸체에는 알루미늄이 포함되어 있었다.
좀더 거슬러 올라가 1950년대 서구의 도시 근교 발달에 알루미늄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살펴보면 더욱 흥미진진해진다.
알루미늄관과 나일론 천을 연결해 만든 폴딩 체어는 전후 알루미늄으로 만들어진 제품 중 가장 대중화된 상품으로 여겨진다. 가볍고, 보관하기 쉽고, 녹도 슬지 않는 이 의자는 1950~60년대 대량생산, 대량소비 문화와 맞물려 폭발적인 성공을 거뒀다.
교외에 사는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집 안마당에 이 의자를 하나씩 두고 싶어 했다. 날씨가 좋은 날이면 사람들은 벽장 안에 접어두었던 의자를 꺼내 마당에서 여가를 즐기곤 했다. 도시에 사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노인들은 아파트 입구 앞에 의자를 들고 나와(그만큼 가벼웠으므로) 한가로이 햇볕을 즐기기도 하였으며 여름이면 해변가를 뒤덮기도 하였다.
디자인적으로 보면 솔직히 많은 결함이 있는 이 의자에는 2차 세계대전 이후, 늘어난 생산량을 유지하려는 알루미늄 생산업체들의 속셈이 깃들어 있다.
양차 세계대전이 알루미늄 산업의 폭발적인 성장을 가져온 것은 공인된 사실이다. 1차 세계대전 때는 수통을 비롯한 군인들의 장비, 혹은 총알의 거푸집에, 2차 대전 때에는 본격적으로 비행기에 쓰이기 시작했다. 실제로 이 의자에 사용된 알루미늄관은 전쟁 때 비행기 동체를 만들었던 생산 시스템을 그대로 사용했다고 한다.

알루미늄에서 파생된 문화현상을 언급할 때 스포츠 역시 빼놓을 수 없는 분야이다. 국제적인 테니스 대회에서 알루미늄 라켓이 처음으로 사용된 것은 1967년 U.S 오픈으로 당시 4명의 선수가 알루미늄 라켓을 사용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당시 우승자는 나무 라켓을 사용한 존 뉴컴이었지만, 상황이 바뀌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마추어의 눈으로 봐도 알루미늄 라켓의 성능은 나무로 된 것과 비교할 수가 없었다.
결국 7년 후인 1974년 윌슨의 T2000을 사용한 켄 로즈웰이 U.S 오픈에서 우승하게 된다. 알루미늄 라켓을 사용하는 선수들이 늘어감에 따라 남자 경기의 경우 눈에 띄게 랠리가 짧아지는 등 경기 자체의 내용도 바뀌기 시작했다.
하지만 알루미늄 라켓이 더욱 큰 의미를 가지는 것은 테니스의 대중화에 있다. 즉, 무겁고 탄력이 약한 만큼 정확한 기술을 요구했던 나무 라켓과 달리, 왠만큼 갖다 댈 수만 있으면 누구나 그럭저럭 테니스를 즐길 수 있게 된 것이다.
실제로 1970년대 이후 미국 내에서는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테니스장들이 이곳 저곳에서 많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반대로 성능이 너무 좋아서 탈인 경우도 있다. 대표적인 경우가 알루미늄 야구배트. 프로의 경우 알루미늄 배트를 제한하는 까닭은 지금까지 세워진 역대 기록과 공평하게 평가한다는 명목 이외에도 실제적인 이유가 있다.
프로선수가 알루미늄으로 만들어진 배트를 사용할 경우 스윙속도가 너무 빨라 위험하다는 것이다. 공이 투수 정면으로 날아갈 경우 생명까지 위험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또한 파울 볼의 경우 스탠드에 있는 관객까지도 위험할 수 있다. 전에 알루미늄 배트를 사용하던 대학 야구마저 나무 배트로 바꿈에 따라 현재 우리나라에서 알루미늄 배트를 볼 수 있는 것은 고교 야구뿐이다.
이 외에도 낚시, 등산, 골프 등 알루미늄 합금이 쓰이지 않는 스포츠 분야는 거의 없을 정도다. 그리고 각각의 경우 알루미늄은 스포츠의 룰 자체를 바꾸는 역할을 담당하기도 한다.
물론 알루미늄의 아성은 곧 티타늄을 비롯한 다른 신소재에 의해 도전받게 되지만, 현대 스포츠사에 있어 알루미늄의 사용은 중요한 전환점으로 남는다.

알루미늄과 뉴메탈리즘
알루미늄을 위시한 20세기의 새로운 소재들은 디자이너에게 자신을 둘러싼 사회를 표현할 적당한 재료를 제공해줌과 동시에 그 자체가 디자인 프로세스의 중요한 요소가 되어갔다.
디자이너들로서는 자신에게 던져진 새로운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위에서 잠시 살펴본 것과 같이 이러한 만남은 그저 단순한 상품으로서의 기능뿐만 아니라 20세기에 새로운 물질문화를 탄생시키는 데 일정부분 기여하게 된다.
1960년대 이후 각 시대별로 대표적인 디자인을 살펴본다면 디자이너들의 알루미늄에 대한 사랑이 결코 플라스틱 못지 않았음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알루미늄이란 소재가 가진 기술적인 가능성과 모더니즘의 이상을 표현해내는 소재 자체의 힘에서 기인한다.

알루미늄의 예를 들면 단순한 소재를 넘어 알루미늄이 표현할 수 있는 풍부한 디자인 언어, 그리고 그것에 의해 형성되는 새로운 형태의 문화가 바로 알루미늄에 의한 뉴메탈리즘이 될 것이다.
쥘 베른느가 앞에서 언급한 바와 똑같이 21세기 인류사회가 추구하려는 목표에 있어 알루미늄은 어떤 역할을 할 것이며 거기에서 디자이너는 알루미늄과 그의 친구들을 가지고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글_박활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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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히드 안락의자(Lockheed Lounge)
마크 뉴슨
1985.
알루미늄, 유리섬유, 고무

워크맨 (Walkman)
소니
1979.
알루미늄외

알루미늄 케이스
제로헬리버튼
2000.
알루미늄,가죽,폴리에스테르,네오플랜

아메리칸 폴딩 체어(American Folding chair)
1960년대 후반
알루미늄,나일론

T2000
알루미늄 라켓(가운데)
윌슨
1967.
알루미늄, 나일론 외

알루미늄 배트
알루미늄, 그래파이트, 가죽, 고무

이 글은 2000년 10월 28일부터 2001년 2월 11까지 카네기 미술관에서 열렸던 ‘Aluminum by design: jewelry to jets’ 전시를 참고하였으며 게재된 사진 역시 전시 도록의 이미지를 사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