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 문화를 반영한 한국의 도자기
한국의 전통공예 가운데 백미로 뽑을 수 있는 우리의 도자기는 인간의 정착생활(신석기시대)과 함께 생활 필수품으로 자리잡게 되었고, 구울 때의 온도와 태토(그릇을 만드는 바탕이 되는 흙)의 굳기에 따라 토기, 도기, 석기, 자기 등으로 발전하면서 좀더 단단해지고 기형과 문양 등의 변화를 보이면서 당시의 시대상과 미의식을 십분 발휘했다.
주둥이 부분의 짧은 사선무늬, 허리 부분의 물고기 뼈 또는 파도 모양을 형상화한 빗살무늬, 바닥 부분의 좌 사선과 우 사선이 어긋나게 시문된 기하 추상적인 문양의 신석기 시대를 대표하는 팽이형의 빗살무늬토기
→청동기 시대의 민무늬 토기
→ 민무늬 토기의 전통 위에 새로이 중국의 회도(灰陶) 기법의 영향을 받아 생겨난 초기 철기 시대의 연질 또는 경질의 타날 무늬(打捺文 : 두들겨서 생긴 무늬) 토기
→투공이 있는 높은 다리를 가진 고배(高杯: 바닥이 높은 작은 잔 모양) 둥근 항아리에 굵고 높은 목이 달리고 고배와 같이 투공 뚫린 다리가 붙은 장경호(長頸壺), 집 모양과 기마 인물 모양 등 부장품적인 특색을 보이는 이형토기 등의 고신라 토기
→시유 토기와 인화문이 등장하고 뚜껑있는 합과 골호(骨壺)가 선보이는 통일신라 토기
→뛰어난 조형성과 비색의 아름다움, 상감기법 등을 통해 우아한 격조를 느낄 수 있는 고려청자
→고려청자를 계승한 것으로 백토로 분장한 후 청자 유약을 발라 굽는 우리 나라에만 있는 독특한 자기로 실용성과 견고성이 우수한 분청사기
→실용성과 견고성, 장식적 기교 대신 자연미를 표현한 순수, 솔직, 담백한 조선백자 등 우리의 도자기는 각 시대마다 고유색과 독특한 기형, 문양을 발전시키면서 때로는 소박하고 때로는 화려한 예술의 극치를 선보였다.
1. 옹기 (오지그릇을 중심으로)
투박한 빛깔과 불룩한 몸통 등 고려청자나 조선백자에서 느낄 수 있는 세련됨이나 우아함은 없어도 소박한 자태에서 어머니의 품 같은 포근함과 넉넉함을 주는 옹기는 옛부터 서민들과 함께 동고동락을 함께 한 가장 전통적인 생활 용기이다.
거친 입자의 흙으로 기형을 만들고 가마 안에 산소 공급이 개방된 산화(酸化) 번조로 구워내 숨을 쉬는 오지그릇과 중간에 산소 공급을 차단하고 구위낸 불완전 환원번조의 질그릇 등을 포함하는 옹기는 한국 전통의 저장구 시설로 수 천년간 우리 조상들이 생활에서 얻은 경험과 슬기로 빚은 천연의 그릇으로 어떠한 외침에도 그들 문화에 오염되지 않고 꾸준히 그 맥을 이어왔다.
그러나 주거 생활의 패턴 변화로 옹기의 쓰임새가 적어지면서 불에 터지지 않고 열기를 오래 간직하는 떡시루와 같은 질그릇은 단절된 지 오래이고 항아리와 뚝배기 등의 오지 그릇은 인체에 유해한 독성있는 그릇만이 양산되고 있어 옛 오지그릇과 질그릇을 되살리는 노력이 절실하다.
오지그릇은 유동식의 발효식품을 담는 저장구로 실용과 기능에 충실하도록 제작되었다.
속이 깊고 주둥이가 큰 주발 모양의 독과 형태는 비슷하나 주둥이가 오므라져 있는 항아리가 주종을 이루고,
이밖에 단지(일반 항아리에 비해 목이 짧고 주둥이보다 배가 더 부른 형태로 소형의 것이 대부분임),
물과 술 등의 운반 및 휴대에 사용된 장군(액체를 담아 나르는 데 쓰였고 형태는 항아리나 독보다는 작고 배가 부른 주둥이를 뉘어 놓은 것처럼 생겼음),
자라병(술이나 물을 담아 휴대할 수 있는 병의 한 가지),
술춘(많은 양의 술을 멀리 운반하고자 만든 주둥이가 좁고 목이 짧으며 어깨가 밋밋하고 몸통은 둥근 원형으로 일직선을 이루는 형태)과 기름병과 술병 등이 있다.
독 또는 항아리는 지역에 따라 생김새와 문양의 차이가 있고, 용도와 제작기법에 따라서도 각기 다른 이름으로 불렀다.
먼저 지역별 독의 생김새를 보면, 충청도 독은 목 부분이 높고 밖으로 약간 벌어진 형태가 많고 전체적으로 투박하나 견고한 모습이고, 경상도 독은 입 부분이 좁으며 어깨가 각진 것과 각이 지지 않고 전체적으로 둥근 형 등이 있다.
또한 경기와 서울 독은 홀쭉하고 연꽃 봉오리 형태의 꼭지 달린 뚜껑들로 덮어지고 난이 그려진 것이 많으며, 전라도 독은 배가 불룩하고 크며 투구 모양과 비슷한 삼층 둥근 탑 모양의 꼭지가 있는 뚜껑이나 소래기라 불리는 자배기 형태의 뚜껑을 덮는다.
옹기의 문양은 난과 산수를 비롯하여 왕실 전통 문양과 불로초, 당초무늬, 기하학적 문양들이 아주 치밀하고 섬세하게 나타났고, 불교에서의 연화, 물고기 등의 문양과 나비무늬, 붕어무늬, 꽃무늬, 곡선무늬, 용수철무늬, 매듭무늬, 구름무늬, 곡식무늬, 파도무늬 등이 다채롭게 그려져 있으며, 자유로이 그려진 그림은 매우 소박하면서 자연스럽고 활달하여 생동감이 넘친다. 옹기에 그림을 그려 넣는 것은 장식적 측면이 강하나 이밖에 그릇 내부에 산소 공급을 위한 숨구멍 기능, 장독대에 놓인 옹기 내용물의 식별 수단, 시유한 유약의 두께 점검 등을 고려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용도와 제작기법에 따른 명칭의 구분을 간략히 살펴보면,
독과 항아리는 용도에 따라 김치독, 술독, 젓갈항아리, 제작기법에 따라 해주독(사기를 소재로 하얀 바탕에 물고기, 목단무늬 등이 장식되어 있으며, 청화백자의 기법을 그대로 살린 것이 많은데 주로 황해도 해주와 회령을 중심으로 제작되었음),
이중독(한여름에도 상하지 않고 오래도록 신선한 김치를 먹고자 고안해 낸 삼단 단지 김치독으로 항아리의 어깨 부분에 주둥이보다 낮은 턱을 높게 만들고 턱의 안쪽에는 한 두 군데 작은 구멍을 뚫어 고인 물이 흘러 내릴 수 있도록 만들고, 뚜껑에는 꼭지가 있음, 가급적 물이 닿는 시간을 오래 유지하도록 2, 3개의 낮은 턱을 두어 냉각효과를 높일 수 있도록 고안),
석간주 항아리(그릇 위에 입히는 채색 안료가 석간주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녹적색, 황적색, 담적색 등의 다양한 색을 띠며 장점은 착색력과 은폐력이 큰 것이며 햇빛, 공기, 수분, 열 등에 안전하고 원형과 팔모형이 주류를 이룸)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옹기의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자연환원성, 통기성, 방부성, 경제성 등을 꼽을 수 있다.
자연환환원성
그릇에 금이 가거나 파손되었을 경우, 자연으로의 토화 현상이 매우 빠르게 진행되며, 습기 있는 땅 속에 묻히거나 노출된 상태에서는 풍화 작용에 쉽게 제 모습을 잃고 원래의 상태인 흙으로 환원된다.
통기성
옹기의 태토에는 작은 모래 알맹이가 수없이 함유되어 있고 유약 또한 부엽토의 일종인 약토의 재로 형성되어 있어 산화번조의 제작기법으로 소성시 점토질과 모래 알맹이가 고열에 의해 이완되어 그릇 전체 표면에 미세한 숨구멍이 생긴다.
또한 문양을 넣는 과정에서 이미 시유된 잿물을 손가락이나 나무조각으로 긁어냄으로써 미적 표현은 물론 숨구멍을 트여 주는 역할을 하게 되며, 옹기의 밑부분은 본연의 태토 그대로 놓아 두어 상하좌우 어느 곳이든 통풍 역할을 할 수 있게 하여 음식물을 오래도록 저장할 수 있도록 해준다.
방부성
발효식품은, 사람도 숨이 막히거나 순환 계통이 약하면 살 수 없듯이, 순환하고 상통하는 숨쉬는 그릇이 아니면 맛이 나지 않을 뿐 아니라 식품으로서의 효과를 거둘 수 없기 때문에 옹기가 주요 저장구가 될 수밖에 없다.
경제성
옹기의 재료인 흙은 자연으로부터 쉽게 얻어지고 사용할 수 있으며, 또한 간단한 설비로도 제작이 가능하기 때문에 경제적이다.
이상과 같은 특성을 지닌 옹기는 김치와 같은 발효식품의 보관 뿐 아니라 식생활(양념단지, 물동이, 수저통 등)과 일상생활(화로, 등잔, 약탕관, 악기류, 문구류), 주거생활(옹기 굴뚝, 옹기 기와)과 신앙생활(성주단지, 조왕단지) 등에 있어 폭넓게 사용되었다.
자연과 호흡하며 소박한 아름다움을 지닌 우리의 옹기는 20세기로 접어들면서 과학문명의 발달과 거세게 밀려온 서양 문화에 의해 퇴락 자멸하는 기로에 놓이게 되었다.
더욱이 19세기 말 개발되어 우리 나라에 유입, 왜정 시대 때 극성하였고 그 이후로도 이어진 광명단 옹기(납을 주성분으로 하는 화공약품의 일종인 광명단을 오지 잿물에 섞어 표면을 유리같이 매끄럽고 반짝이게 만든 옹기)는 그릇 표면 구석구석에 광명단을 침투케 하여 빈틈없이 발라 놓아 숨쉬는 살아있는 그릇이 아닌 죽은 그릇을 양산케 했으며,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실시된 60년대부터 산업화의 발달에 따른 농촌의 피폐와 핵가족화, 도시집중으로 인한 아파트 공간의 발달로 한국 전통 주택의 필수 시설인 장독대가 설 자리를 빼앗아 재래식 옹기는 내리막길을 걷게 되었다.
또한 대량 생산체제에 의해 만들어진 값싸고 다루기 쉬운 플라스틱과 스테인리스 그릇의 출현은 옹기의 자리를 위협했으며, 전 국토의 1일 생활권은 각 지역의 독특한 옹기 모양을 획일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광명단 옹기처럼 튀지는 않지만, 오지색 그대로 꾸밈이 없고 살아 숨쉬며 우리를 이롭게 하는 재래식 옹기를 산업화와 편리함이란 미명하에 맞바꿈하는 것이 과연 현명한 일인가를 오늘을 사는 우리는 다시금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인간이 만들었음에도 인공적 아름다움보다는 자연과 가까운 공해 없는 우리의 옹기는 지나친 합리주의와 이기주의에 시달려 본래의 모습을 잃어가는 우리들에게 자연과 호흡하며 살아가던 본연의 모습을 되돌아보게 하며 여유와 운치, 그리고 마음의 풍요로움을 안겨준다
2. 고려청자
통일신라시대의 토기제작기술을 바탕으로 중국의 자기(磁器) 기술을 받아들임으로써 출현한 고려청자는 철분이 극소량 함유된 태토로 기형을 만들고 잘 말려 700-800도에서 초벌구이 한 다음 그 위에 철분이 3% 정도 함유된 장석유를 바르고 1200-1300도의 고온에서 환원염으로 구워낸 자기의 일종으로 우리 나라 도자 문화의 꽃이라 할 수 있다.
고려청자의 특징은 크게 조형성, 비색의 아름다움, 우리만의 독특한 상감기법 등으로 대변된다.
조형성
고려청자는 개성이 강한 아름다움의 경지를 보여준 조형작품의 하나로 기형과 문양의 美가 돋보인다.
병의 유려한 곡선과 매병 등의 당당하면서도 부드러운 선과 동물과 과일 등 자연의 형상을 본딴 기형은 물론, 당초문, 보상화문, 구고하문, 연화문 등이 반복 시문된 기하학적인 도안과 운학문, 포류수금문, 포도동자문 등 정서적이며 낭만적인 도안 등이 어우러져 고려청자의 아름다움을 십분 발휘하고 있다.
비색
11세기 중엽부터 12세기 중엽까지 녹청색을 띠는 순청자의 깊고 차분한 비색의 아름다움은 서긍의 ‘고려도경’과 송나라 태평노인의 ‘수중금(袖中錦)’에 기록될 만큼 우리 나라 뿐만 아니라 중국에까지 널리 알려졌다.
상감기법
나전칠기, 금속공예 등에 이용되는 상감을 도자기에 적용한 것은 우리만의 독창적인 기법으로, 흙으로 기형을 만든 다음 마르지 않았을 때 문양을 음각하고 이 부분에 백토 또는 자토를 메꾸고 초벌구이한 다음, 청자유를 바르고 재벌구이하는 방법이다.
고려청자의 변천은
10세기 초에서 11세기 중엽의 녹청자(표면이 고르지 못하고 유약을 바르는 방법이나 구울 때의 온도 조절이 익숙하지 못한 단계)로 대표되는 청자 발생기,
11세기 중엽에서 12세기 중엽의 순청자 시기,
12세기 중엽에서 13세기 중엽의 상감청자 시기,
13세기 중엽부터 14세기 말의 기형이 둔해지고 선이 흐트러지며 유약이 두껍고 무거우며 밀도가 줄어들고 청자의 비색이 황록색으로 변하고 상감무늬의 도안화가 진행되는 쇠퇴기의 고려청자 등으로 살펴볼 수 있고,
고려청자는 다음과 같이 순청자, 상감청자, 철회청자, 진사청자, 화금청자, 철채청자, 퇴화문청자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순청자
고려청자 비색의 아름다움과 기형의 유연한 선 등이 조화를 이루는 순청자는 발색이 깊고 순수하며 균열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순청자에는 아무런 장식도 하지 않은 소문청자, 그릇 표면에 음각으로 무늬를 새긴 음각청자, 나타내고자 하는 무늬를 그릇 표면에 도드라지게 시문하는 수법의 양각청자, 그릇 표면을 투각하여 무늬를 표현하는 수법의 투각청자, 나타내고자 하는 동식물의 형태를 본따 만든 상형청자 등이 있다(예: 청자 참외형 화병, 오리형 연적 등).
상감청자
순청자보다 유약이 얇아지고 고르게 발라짐으로써 색이 엷고 가벼워지며, 유약층이 얇아짐에 따라 빙렬이 나타난다.
시문된 문양으로는 운학문, 포류수금문, 들국화문 등 도가 사상이 강한 것이 많으며, 13세기로 접어들면서 상감수법이 점자 거칠어지고 14세기 후반에는 틀로 찍는 수법이 유행하다 조선 초기 인화분청으로 그 맥이 이어진다(예: 상감청자 운학문 매병).
철회청자
흑색, 백색 등의 안료를 이용하여 그릇 표면에 시문할 문양을 직접 그리고 청자유약을 발라 굽는다.
선(線)보다는 면(面)을 주로 하는 무늬이기 때문에 다소 무거운 느낌을 준다(예: 철회청자 양류문병).
진사청자
진사로 그릇 표면에 시문하거나 다른 무늬의 일부에 점을 찍어 청자유를 발라 구워낸 청자를 말한다(예: 진사채 연판문 표형 주전자, 상감청자 진사채 포도동자문 주전자).
화금청자
상감된 무늬 일부에 금을 칠한 것으로 일반 상감청자에 비해 그 예가 드물다(예: 청자상감원토당초문화금편호)
철재청자
청자 표면 전체에 철사 안료를 바르고 그 위에 청자유를 발라 구워낸 것으로 완성된 빛깔은 흑색으로 광택이 난다.
철채청자는 무문철채청자, 음각철채청자, 퇴화문철채청자(철사안료를 그릇 위에 바르고 그 위에 백토를 사용하여 무늬를 그리면 하얀 백토만큼 두꺼워져 양각적 느낌이 남) 등이 있다.
퇴화문청자
백토 또는 자토로 그릇 표면에 점 또는 무늬를 도드라지게 그려 놓은 다음 청자유를 입혀서 구운 것으로 양각적 느낌이 난다.
이밖에 고려시대의 자기로는 철유를 입혀서 구운 철유(鐵釉)자기, 흑유를 입혀서 구운 흑유(黑釉)자기, 흑토, 백토, 회토 등의 세가지 흙을 섞어 기형을 만든 다음 청자유를 칠해 구워낸 그릇 표면에 나무결 같은 세 가지 색이 엇갈리면서 독특한 문양을 나타내는 연리문(練理文) 자기가 있으며, 순백자, 상감백자, 철회백자 등의 백자도 나타나고 있다.
고려청자의 푸른 빛이 도는 비취색은 하늘 또는 푸른 옥에 비유하기도 하는데, 고려인들은 이를 통해 무한한 공간과 그 공간 속에 그들이 동경하는 무(無)와 고요함의 이상 세계를 표현하고자 했다.
즉, 현세를 떠나 영원한 세계를 동경하는 마음을 담고자 했으며, 그 속에 시문된 운학문은 청자의 푸른 표면을 하늘로 생각한 발로이고, 포류수금문은 자연에 대한 동경과 문학적 정서에 대한 희구를 반영하고 있는데 이러한 성격은 통일신라 말에 들어와 고려시대에 그 뿌리를 내린 현세보다 내세를 지향하는 선종이 사색으로 진리를 찾고자 했던 것에 기인한다고 하겠다.
맑고 청아하며 고즈넉한 느낌을 주는 고려청자의 비색, 시적인 운치가 넘치는 회화적인 상감문양, 유연하고 유려한 선의 흐름을 지닌 형태, 군더더기 없이 담담하게 표현된 시문 등은 격조있는 고려청자의 조형감각과 아름다움을 설명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것 같다.
3. 분청사기
고려말의 쇠퇴한 상감청자를 모태로 하여 등장한 분청사기(청자토로 기형을 만든 후 백토분장을 하고 청자유를 발라 굽는 우리 나라에만 있는 독특한 자기로 그 이름은 1940년 고유섭 선생이 粉粧灰靑沙器 라고 이름 붙인데서 연유함)는 다양한 기법으로 발전하여 백자와 함께 조선 시대 도자의 주류를 이루면서 발전해 오다 16세기 그 주류를 점차 백자에게 넘겨주며 백자화를 거듭하다 소멸되었다.
그릇이 시대의 산물임을 반영하듯, 분청사기의 발달과 변천의 역사는 곧 정치, 사회의 변천을 여실히 보여준다.
분청사기는 14세기 후반 원나라를 통해 유입된 현세와 실용을 중시하는 유학의 영향과 권문세족에 도전하는 신흥사대부의 대두 및 이들에 의한 개혁 정치의 추진으로 도자기에 있어서도 실생활에 널리 쓰여질 수 있는 소박하고 실용적인 그릇의 대량 생산이라는 필요성에서 탄생했다.
더욱이 고려말의 정국 혼란으로 국가의 보호와 배려를 받지 못한 도공들이 살 길을 찾아 전국으로 흩어짐에 따라 국가가 운영하는 관요 대신 민영 체제의 소규모 가마가 전국 곳곳에 설치됨으로써 고려청자가 그 정형을 잃어가던 때였다.
이처럼 분청사기의 근원은 고려 후기의 상감청자에서 비롯되었지만 달라진 국내외 여건과 형식이나 조건에 구애됨 없이 도기를 제작하고자 했던 도공들의 의식 변화 및 실용성을 중시하는 수요층의 변화 등이 ‘분청사기’라는 이름의 새로운 그릇을 탄생시켰다.
초기의 분청사기는 고려청자를 대량 생산하는 과정에서 색깔도 칙칙하고 섬세한 문양도 간략화 되는 등 조잡한 양상을 보였지만, 세종 때 그릇 밑에 고명을 쓰게 하여 도공들이 책임감과 자부심을 갖게 함으로써 그릇의 태토와 무늬도 점차 짜임새 있게 자리를 잡아갔다.
한국적 아름다움의 원형을 잘 간직하고 있다 하여 민족 자기로도 불려지는 분청사기는 민족문화의 계발과 창달이라는 차원에서 외래 문화의 수용보다는 민족의 자주성과 우리 문화의 우수성을 찾고자 한글이 창제되고 압록강과 두만강으로 이어지는 오늘의 국경이 형성되며 단군을 민족의 시조로 받아들이게 된 세종대왕의 치세 기간 중 자생적으로 그 꽃을 피웠기에 가장 한국적인 우리의 민족 자기로 설 수 있었다.
서민 취향의 분청사기는 언뜻 보면 무거워 보이나 들어보면 가볍고 청자나 백자보다도 열전도가 느린 실용적인 그릇으로 우리 나라에서는 명나라로부터 백자가 수입되어 이를 선호하게 되고 국정이 혼란해진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소멸되나 이후 일본인들에 의해 높이 평가되어 일본 도자사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는 16세기 후반 일본에서 소박하고 꾸밈없는 자연을 추구하는 문화가 크게 유행하였는데 이러한 분위기에 분청사기가 적합했기 때문이다.
분청사기의 종류
분청사기는 감화(嵌花)분청과 인화(印花)분청 등의 상감분청계와 백토분청(귀얄문겢訓」�), 박지분청, 음각분청, 철화분청 등의 백토분청계로 대별할 수 있다.
감화분청
퇴보한 고려상감청자를 계승한 것으로 고려상감청자보다 무늬의 선이 조잡하고 대담해지며, 선(線)상감과 면(面)상감이 있다.
인화분청
고려청자의 상감법을 간소화한 것으로 무늬를 조각하지 않고 양각한 나무나 도장으로 태토 표면을 두드려 자국을 내고 거기에 백토를 메워 하얀 무늬를 나타낸다.
일정한 무늬의 도장을 반복하여 찍었기 때문에 무늬의 효과는 추상적이고, 인화분청에는 관청명이 백토 상감된 것이 특징이다.
박지(剝地)분청
백토를 바르고 시문하고자 하는 문양을 그린 후 문양 외의 배경을 긁어내면 청자 바탕의 백색 문양이 나타나게 되는데, 고려시대의 역상감 기법과 통한다.
철화분청
백토 분장 후 철분이 함유된 안료로 문양을 그려 구워내면 문양이 흑갈색으로 나타난다.
음각(조화)분청
백토 분장 후 문양을 선으로 음각하면 태토의 회색이 문양선으로 나타난다.
귀얄분청
귀얄(빗자루)이란 도구를 사용하여 백토 분장 후 문양을 시문하지 않고 빗자루 자국만 나타나게 하는 독특한 기법이다.
덤벙분청
제작된 기형을 백토물에 거꾸로 덤벙 담가 백토를 입히는데 이러한 분장효과는 운동감 있는 귀얄문보다 차분한 느낌을 준다.
분청사기의 변천
전기 (1360 ~ 1420년경)
고려상감청자의 쇠퇴기인 태동기(1360-1390년경)와 분청사기의 발생기(1390-1420년경)로 나눌 수 있다.
태동기의 분청사기는 태토가 조잡하고 기벽이 두껍고 암록색을 띠며 민무늬의 경향을 보이나 조선 왕조의 기반이 다져지면서 상감무늬가 이어지고 한편으로는 기하추상적인 무늬가 나타나고 유태가 재정비되어 조선적인 분위기를 형성하기 시작한다.
중기 (1420~1480년경)
분청사기의 발전기인 이 시기는 다시 1기와 2기로 나눌 수 있다.
1기에는 상감, 인화, 박지, 음각 등의 다양한 제작기법이 선보이고 태토도 정선되어 밝아지고 유약은 잡물이 없이 투명해지는 등 분청사기의 특질이 뚜렷해졌으며 특히 세종 연간인 15세기 전반에는 상감분청자와 인화분청자가 자기의 중심을 이루었다.
2기에는 인화기법이 완성되어 그 절정을 이루며, 귀얄기법의 분청자가 일부 선보였다.
후기(1480 ~ 1600년경)
쇠퇴기(1480-1550년)와 소멸기(1550-1600년)으로 나눌 수 있다.
쇠퇴기에는 상감과 인화기법이 쇠퇴하고 철화기법의 발생 및 발전과 함께 16세기 초부터 유학 정치가 심화되면서 백자를 전용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일어 귀얄과 분장기법이 성행한다.
소멸기는 백자를 닮아 가는 과정 속에서 귀얄기법에서 담금분장기법 등의 과정을 거쳐 분청사기가 사라지게된 시기이다.
세련된 빛깔도 섬세한 문양도 찾아볼 수는 없으나, 세월의 흐름만큼 연륜을 쌓아가는 우리네 인생살이처럼 또한 구수한 된장찌개처럼 토속적인 맛과 멋을 물씬 풍기는 분청사기는 다소 거칠기는 하나 절제의 틀을 벗어나지 않는 범위에서 대담하게 자신을 표현한 진솔하고 꾸밈없는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으며, 이러한 아름다움은 일상의 그릇이라는 편안함과 소박함 속에서 그 빛을 더욱 발휘한다.
글_김주미(KIDP 객원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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