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 벤치

‘T’자형 인간

태양이 나날이 열기를 더해가고 있고 산으로 바다로 피서를 떠나는 성하(盛夏)의 계절이다.
유난히 덥다는 올 여름, 아직 IMF에서 벗어나지 못한 우리의 피서 모습이 자못 궁금해진다.

지금 디자인계는 새 천년에 즈음한 세계 양대 디자인대회 준비에 바쁘다.
icograda가 열리는 2000년에는 우리의 디자인이 과연 얼마나 달라질까? 또 ICSID가 열리는 2001년에는 우리가 세계에 무엇을 자랑할 수 있을까? 이 모든 것이 이제 길게는 2년, 짧게는 1년 남짓 남았다.
그동안 바쁘게 움직이면서 준비했던 것들이 얼마나 내실있게 다져지고 있는지 반성의 시간을 가져볼 때인 것 같다.

요즘은 하도 뭘 어떻게 하자는 얘기가 많아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일순간 바보가 되는 기분이다.
그러나 그런 세세한 것보다 좀더 기본적이고 스케일이 큰걸 먼저 챙겨야 되지 않을까. 사실 자잘한 파도에 신경 쓰다 보면 큰 해류의 흐름을 몰라 배는 ‘OO포’로 빠질 수 있다.
아마 스트레스의 90%이상이 시간 때문인 것 같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속담은 타이밍을 놓치지 말라는 건데, 어떻게 보면 ‘인간은 시간의 줄을 타는 곡예사’이다. 테크닉 중에서 제일 가는 테크닉이 시테크라고도 하지 않는가.

군대식 결과주의도 그래서 어느 정도 필요하리라. 우리를 ‘빨리빨리’ 민족이라고 부르고 경부고속도로나 신도시 건설 등의 예를 드는데 그나마 그렇게 밀어 부쳐 된 것 같다.
근데 요즘은 조금 밀어 부치는 분들이 줄어들고 있는 것 같다. 밀어 부치는 분들에게 호감은 안가지만 착착 진행되어야 할 일이 많이 지연되는 건 문제다.
그렇다면 이제는 개인주의로 각자가 알아서 잘해야 하는 시대가 된 것인가.

한 기술간부가 있었다. 상관이 자신과 아주 친한 친구의 제품을 은근히 구매하여 달라는 눈치를 보였다.
그러나 그 간부는 그 제품보다 조금 좋은 제품이 있다는 이유로 이를 무시하고 딴 제품을 구매하였는데 그 결과 평생 상관과는 등돌리고 직장생활도 이상하게 잘 풀리지 않았다고 후회하는 얘기를 한 적이 있다.

정도를 벗어나는 것이 좋다는 건 아니다. 그러나 위의 예처럼 좋은 제품구매만이 중요한 건 아니다. 그래서 축구에서도 ‘공만 보지 말고 사람을 잘 보라’고 하지 않는가.
한때 ‘T’자형 인간이 되자고 한 적이 있다. 경제발전과 더불어 Technology를 강조하니(T자의 아래 부분에 해당) 협력을 위한 부분이 부족하였다(T자의 윗부분).
그래서 T자형이 나온 것이다. 예를 들면 건축을 전공하고 또 경영을 전공한 사람은 건축경영자로서 엄청난 대우를 받는다고 하는데 두 가지 다 전공하기가 쉬운 일인가? 그리고 그런 사람은 우리 나라에 딱 한사람밖에 없다고 들었다.

그가 대우받는 건 다른 사람의 입장을 잘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T’자형은 전공을 두 개하자는 얘기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입장에 서서 대화하고 타 분야의 기본상식을 염두에 두고 남을 이해하자는 것이다. 정보통신기술의 발달로 의사소통이나 정보의 공유가 보다 쉬워지기는 했으나 개인플레이는 점점 심해지는 추세다.

언젠가는 가수 김OO의 ‘핑계’ 한번 들어 보아야겠다고 하면서 못 들었는데 주제가 무엇인지는 모르나 가사 중에 ‘입장 바꿔 생각해 봐’라는 부분이 있다고 한다.
따지고 보면 이 가사처럼 입장 바꿔서 생각하면 통하지 않는 게 없을 것 같다. 벽에다 다시 한번 ‘T’자를 써 붙여보면 어떨까.

디자인 중흥시대 또는 디자인 르네상스라는 대망의 2001년을 앞두고 조화롭게 어울리는 ‘어울림’의 정신이 양대 세계디자인대회가 추구하는 정신인데 나와 남이 오순도순 지내는 ‘T’자형이 사실 어울림의 기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글_김경태(산업디자인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