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유학중이었던 1992년 처음 시그라프(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컨텐츠 산업의 미래와 역사를 알 수 있는 컴퓨터 그래픽스 최대의 행사인 시그라프(SIGGRAPH)가 올해는 지난 8월 8일부터 13일까지 로스앤젤레스 컨벤션 센터에서 열렸다.) 행사에 참관했을 때 처음에는 외국 행사장에서 한국 사람을 발견하곤 무척 기뻤다.
그들의 표정은 진지하기만 하였고 외국 참관인들과 상담하는 모습을 보며 어떤 열의를 느끼기도 했다. 그러나 첫날 전시장에서 받은 느낌은 다음날 완전히 바뀌었다. 이틀 후부터는 한국 사람들을 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전시장보다 세미나 참석에서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하던 터라 전시만 훌쩍 보고 그 다음 코스로 지역 관광을 떠나버리는 한국인의 모습은 이해할 수 없는 광경이었다.
이후에도 매년 비슷한 양태를 보곤 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매년 열심히 참가하는 것일까? 시그라프 전시내용이나 주제가 해마다 그리 많이 변화하는 것도 아닌데 유난히 한국 사람의 참가율이 높다.
그리고 비교적 전문적인 주제를 다루는 세미나에는 참가하지 않고 전시장만을 둘러보면서 얼마나 많은 정보를 얻는지 의문이 갔다. 물론 3D그래픽스와 같이 기술이 급변하는 분야는 그 흐름의 이해가 무척 중요하며 시그라프는 그러한 기술의 흐름을 보여주는 훌륭한 행사이다.
그러나 한국 사람들이 열심히 참여하게 되는 근본적인 이유는 따로 있지 않을까? 무엇보다 디자인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컴퓨터를 통해 재화를 생산하는 정보화시대로 접어들면서 디자인의 역할은 산업시대와 같이 객체가 아니라 주체로서의 기능을 찾으려는 어떤 자존심과 직결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우선 산업시대에 이은 정보화시대에서 디자인의 개념은 국부론보다는 문화론으로 인식되기를 원하는 것 같다. 산업시대에서 디자인은 늘 객체로 기능하였고, 경제적 위기시에는 제일 먼저 정리되는 불쌍한 존재가 되곤 하였던 것이다.
영화의 경우는 이미 철저하게 문화산업의 이미지 메이킹에 주력하여 스크린쿼터와 같은 예민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도 여론의 지지를 받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영화가 제작상의 여러 가지 어려운 여건에도 불구하고 산업으로 도약할 가능성이 비쳐지는 것은 바로 컨텐츠 산업이라는 자신감에 바탕한다.
사실 지금까지 디자인의 컨텐츠는 무엇이고, 어떻게 컨텐츠를 채워나갈 것인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저 누구나 디자인은 중요하다고 말할 뿐이었다. 최근 들어 인터페이스 디자인이니 인포메이션 디자인이니 하면서 새로운 용어들이 등장하였지만 그 또한 주변적 컨텐츠로서의 의미가 강하며 다소 모호하기까지 하다.
이런 시각에서 볼 때 시그라프행은 기존 디자인 분야에 대한 반발의 의미도 숨어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로 인해 디자이너들은 명확하지는 않지만 컨텐츠라는 개념에 접근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정보화시대에 산업시대의 시각을 가지고 디자인을 설명하는 이들이 아직도 많은 국내 현실에서 해소되지 않는 갈증, 즉 주체로서의 디자인의 기능을 찾기 위한 몸부림이 시그라프의 참여로 나타나는 것은 아닐까?
컴퓨터가 재화를 생산하는 정보화시대에 시그라프행은 갈증을 느끼는 디자이너에게는 그야말로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것이다.
매년 디자이너들이 시그라프의 참여를 통해 느낀 것은 바로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급속한 신장의 발견과 함께 그 산업에 동참한다면 주체로서 기능하는 디자인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예감인지도 모른다. 올해는 영상 컨텐츠 분야 중 가상세계 연출의 핵심기술인 캐릭터 애니메이션에 관한 내용이 많았다고 한다.
실제로 작년 이후 국내에서 지식기반산업으로 지정된 디자인, 그중 영상 분야에서는 게임과 애니메이션, 그리고 여기에서 파생되는 컨텐츠 산업이 가장 두각을 나타냈다.
산업시대에는 대체로 광고산업에서 디자인의 역할을 찾을 수 있었지만 정보화시대에는 엔터테인먼트 산업에서 그 역할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인터넷의 확산과 거대한 네트워크의 구축에 따른 컨텐츠는 무한한 잠재시장이다.
보고 즐길 수 있는 엔터테인먼트 산업과 정보기술에서 파생되는 네트워크 사회에 수용될 컨텐츠 비즈니스는 디자이너에게는 새 시대의 골드러시일 수 있다.
이른바 ‘산업화는 늦었어도 정보화는 앞서가라’는 기치 아래 노력한 결과인지 우리의 컴퓨터 활용능력이 세계 수준과 크게 뒤지지 않는다는 것이 중론이다.
시그라프가 매년 보여주는 디지털 기술의 흐름을 효과적으로 수용할 때, 변화하는 디자인과 영상 분야의 산업구도에서 국내는 물론 세계 시장을 상대로 디자인 비즈니스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글_안상혁(성균관대학교 예술학부 영상학과 주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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