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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디자인 정보
전통문화와 산업디자인 접목에 관한 연구 6 - 원형을 찾아서

글 싣는 순서
1. 연구개요
2. 건축, 석조
3. 회화, 목공예
4. 생활용구
5. 도자기
6. 의복, 직물류, 장신구
7. 금속공예, 악기, 맺음말

장신구

노리개

옛 여인들의 대표적인 장신구인 노리개는 저고리의 겉고름이나 안고름, 치마허리 등에 차고 다님으로써 한복에 구심점을 주어 화사한 분위기를 연출해 주었다.
노리개의 기원은 확실치는 않으나 허리띠에 갖가지 장식품을 달아 사용했던 삼국시대의 요패(腰佩)에서 비롯되어, 조선시대에 이르러 저고리 길이가 짧아져 옷고름을 여미게 됨으로써 옷고름에 찰 수 있는 노리개의 형태로 변형된 것으로 본다.

노리개는 금속이나 옥석으로 된 물형에 매듭과 술을 달아 늘어뜨리는 일종의 수하식(垂下飾)으로 주체가 되는 패물과 종속물로 구성되어 있다. 주체에는 금, 은, 주옥, 산호, 칠보 등의 재료를 사용하여 정사각형, 마름모, 원, 꽃, 나비 등의 모양으로 꾸미고 쌍희(囍)자, 수(壽)자, 용, 불로초 등의 길상문양을 장식한 공예 조형물로 주체의 형태와 재료 또는 재료 및 형태 등으로 그 명칭이 정해진다.
종속물은 띠돈, 매듭, 술, 끈목 등을 말하며 주체를 더욱 아름답게 장식해준다.

종속물의 세부적인 사항은 다음과 같다.

띠돈 : 최상단에서 단독인 경우에는 단독으로, 삼작인 경우에는 세 개의 주체를 따로 연결한 끈을 한곳에서 정리하여 뒷면에 마련한 고리로 고름에 걸게 되어 있다.
재료는 금, 은, 비취, 산호 등이며 형태 역시 사각형, 원형, 나비, 꽃 등 다양하다. 띠돈에도 문양을 장식하여 아름다움을 더하였다.

매듭 : 주체를 중심으로 상하에 있으며 색깔은 적, 청, 황 등의 삼색을 기본색으로 하고 이밖에 분홍, 연두, 보라, 옥색 등이 사용되었다.
매듭은 노리개의 크기와 형태에 따라 다른데, 크고 호화로운 노리개에는 단순한 것을, 작고 귀여운 것에는 큼직한 매듭과 중간 크기의 매듭 및 작은 매듭을 번갈아 썼으며, 금삼작이나 은삼작처럼 무거운 것에는 중간 크기의 매듭을 사용했다.
매듭의 종류에는 대차매듭, 소차매듭, 나비매듭, 벌매듭, 매화매듭, 생쪽매듭, 딸기매듭 등이 있는데 노리개에 활용된 매듭은 풀지 않으면 열리지 않는 금단의 상징으로 처녀성이나 정절을 나타내기도 했다.

: 기, 보(褓), 띠 따위의 둘레나 끝에 장식으로 다는 여러 가닥의 실을 말한다. 노리개는 매듭만으로는 그 비례가 맞지 않고 술이 있어야 전체와의 조화를 이루게 된다.
술 가운데 딸기술(술을 8묶음, 12묶음으로 나누어 차례로 엮어서 가운데에 작은 심을 박고 조여서 만듬), 봉술(나무나 종이로 술의 머리를 반구형으로 만들어 금색 물을 들인 뒤 술과 같은 색의 꼰실로 망을 떠서 입히고 그 밑에 술을 늘어뜨리거나 술의 머리를 상아나 흑단, 석각 뿔로 둥글게 깎아 만들어서 그 밑에 술을 늘어뜨림), 끈술(노리개의 매듭을 맺는 끈목으로 원하는 길이의 두 배로 여러 겹을 만든 후 반을 접어 중심부를 끈목으로 엮어서 만든 술) 등이 노리개에 주로 사용되었다.

끈목 : 띠돈, 주체, 매듭, 술을 연결해주는 것으로 실을 두 세 가닥 또는 여러 가닥을 합하여 꼬거나 짠다. 폭이 넓은 광다회(廣多繪)와 끈목의 둘레가 둥근 원다회(圓多繪)가 있는데 노리개에는 원다회가 쓰였다.

노리개의 문양에는 자연문(구름, 해, 돌, 산, 물), 식물문(고추, 가지, 포도, 연꽃, 대나무), 동물문(박쥐, 거북, 원앙, 나비, 학), 기물문(투호, 방아다리, 표주박, 도끼, 자물쇠, 벼루), 그리고 쌍동자, 길상문 등이 다양하게 이용되었다.
문양이 담고 있는 뜻을 살펴보면 고추나 가지는 득남, 대나무는 절개, 자물쇠는 출산과 축재(蓄財), 벼루는 학문이나 벼슬, 박쥐는 오복과 다산, 거북은 영생장수, 원앙은 부부의 금슬과 자손 번창, 학은 청렴하고 곧은 기백을 각각 상징한다. 나비문은 상징적 의미는 강하지 않으나 화려한 형태와 여성적인 느낌 때문에 노리개의 소재로 알맞아 많이 사용되었으며 상류층보다는 평민층에서 애용하였다.

노리개는 계절과 옷 색깔, 신분 등에 따라 그 착용이 각기 달랐다. 계절별로는 봄과 여름에 옥이나 구슬로 된 색이 엷은 단작노리개를, 가을에는 옥이나 구슬로 된 삼작노리개를, 겨울에는 자마노와 밀화, 산호 등의 삼작노리개를 달았으며, 흰옷에는 옥 또는 비취노리개와 옥장도와 같은 단작노리개를, 색깔 있는 옷에는 색깔이 각기 다른 삼작노리개를 찼다. 또한 신분에 따라 삼작노리개는 왕실 및 양반 여인네들에 한해서, 순금제 노리개는 왕족만이 패용이 가능했다.

화려하고 가격이 비싼 까닭에 상류 사회 부유층에서만 착용이 가능했던 노리개는 부와 지위를 과시하는 수단이 되기도 하였으며, 옷 전체와의 조화를 이루어 아름다움을 연출했다.
더욱이 자수로 문양을 수놓은 노리개는 섬세한 기교와 화려함이 돋보이며, 옛 여인들의 정성과 사랑 그리고 향기가 흠뻑 배어 있을 뿐만 아니라 장식성 외에 장도나 향집 같은 실용적 측면을 겸하기도 했다.

서구식의 의생활 변화로 실생활에서의 노리개 활용은 그리 크지 않으나 최근 생활 한복의 착용 증가와 더불어 노리개의 활용범위도 넓혀 나가고 있다. 따라서 이에 대한 관심과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 나간다면 노리개가 지닌 아름다운 조형성은 다시 그 빛을 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조개형 괴불 노리개 대삼작 낙지발술 노리개 노리개의 형태, 문양, 색채 등을 용기 및 단추에 적용
이진구/ 한동대 산업정보디자인과 교수
조선시대 칠보 노리개의 형태, 문양, 색채 등을 용기의 형태 및 단추 등에 적용함으로써 고급스러우면서도 장식적인 현대적 디자인을 구사하였다.

약주머니와 향낭 겨울철 방한모의 한가지인 조바위 여인들의 긴머리를 장식했던 댕기 댕기 형태를 적용한 오디오 시스템 및 조명기기
김한응/ 인덕대 산업디자인과 교수
직선과 삼각형의 단순하면서도 조화 있는 댕기 형태에서 기능의 미를 살린 오디오 시스템과 CD 케이스, 조명 기기.



신발류

신체를 보호하는 실용적 측면에서 생겨난 신발은 사회 문화의 발달에 따라 장식적 의미가 부여되고 형태, 재료, 문양, 색 등을 통해 신분의 표현수단으로도 사용되었다.
우리 나라의 신은 목이 긴 화(靴), 목이 없고 운두만 있는 혜(鞋) 등이 기본 형태를 이루고 있는데, 화는 북방 유목민의 신이고, 혜는 남방계의 신으로 우리 나라의 지리 및 기후 조건의 영향으로 이질적인 두 계통의 신이 함께 사용되었다.
또한 사용 재료에 따라 짚신, 가죽신(갖신), 나막신 등으로 날씨에 따라 마른신과 진신으로 구분되고, 사용 계층에 따라 왕족이 신던 석(제복에 신음), 흑피화(黑皮靴 : 일상복에 신음), 백관들의 흑피혜와 목화, 양반층의 태사혜(太史鞋), 발막신, 당혜(唐鞋), 운혜(雲鞋), 수혜와 서민들의 미투리, 짚신, 나막신 등이 있다.

갖신 : 왕족이나 양반이 신던 갖신은 가죽을 재료로 하여 만든 신발을 총칭하며, 마른신(태사혜, 당혜, 운혜)과 진신(물이 스며들지 않게 가죽을 기름에다 결고 바닥에 징을 박아 만든 신)으로 구분된다.
태사혜는 양반 계층의 남자가 신던 것으로 헝겊이나 가죽으로 울을 하고 코와 뒤축에 선으로 무늬를 새겼으며 밑창은 푸른 안가죽을 댄 화려한 신이다.
발막신은 상류층 노인이 신었던 것으로 축과 코에 꿰맨 솔기가 없고 코끝이 넓적하며 가죽 조각을 대고 경분(輕粉)을 칠했다. 또한 당혜는 상류층 부녀자나 양반 규수가 혼수를 장만할 때 준비하는 신으로 신코에 당초문을 수놓았다.
당혜와 비슷한 운혜는 바닥에 가죽을 댄 단창이며 융 같은 것을 대고 곱게 기워 아름답게 꾸몄다.
갖신은 재료, 가공 및 제작 등에 있어 여러 단계를 걸쳐 만들어진 까닭에 매우 견고하며 내구성이 우수하다.
신발 하단부의 구조 및 형태는 보행에 편리하고 신발 변형에 대비하여 곡선을 취하였으며 앞 코 부분의 말아 올림은 버선의 형태와 조화를 이룬다.
또한 신발 밑창에 징을 박음으로써 내구성 강화는 물론 험한 길에서의 보행이 가능하도록 했다.

나막신 : 비나 눈이 올 때 주로 신는 나막신은 굽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있다. 남녀노소 신분에 구분없이 신었으며 오동나무나 버드나무로 만들었다.
초기의 형태는 평판에 끈을 단 것으로 일본의 게다와 비슷한데 거기에 사방 울을 하고 굽을 다는 형식으로 발달하면서 나무를 배 모양으로 파고 밑에 굽이 두 개 달린 오늘날의 나막신으로 변화하였다.
나막신은 무겁고 비활동적이어서 말을 타거나 먼길을 갈 때는 신지 않았다. 어린이들은 나막신에 색을 칠한 채극이란 신을 신었고 살림이 가난한 남산골 선비들은 진날이나 마른날이나 나막신을 신었다 하여 가난하고 청빈한 선비를 일컫는 말로 ‘딸깍발이’라는 말이 생겨나기도 했다.

짚신 : 짚은 생활 주변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소재였던 까닭에 오래 전부터 우리의 생활 곳곳에 활용되었고 따라서 짚신 역시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다.
오랫동안 서민들의 발이 되었던 소박하고 섬세한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짚신은, 짚만을 써서 네 날로 엉성하게 짠 초기의 짚신에서 차츰 치장을 더해 왕골, 부들 따위를 쓴 섬세하고 고운 신발이 되었고 이후에는 삼, 닥, 백지 등을 이용하여 여섯 날 바닥의 고급스럽고 세련된 미투리라는 것을 만들었다.
더욱이 짚신바닥은 내구성이 있으면서도 신축성 있는 구조로 짜였으며, 측면은 발의 형태와 움직임에 따라 유연하고 발의 크기에 따라 끈을 조절함으로써 융통성 있게 신을 수 있게 한 인체공학적 측면이 돋보인다.
즉 손쉬운 재료이용, 가공기술의 탁월함, 사용의 편리성 등 종합적인 조형의식이 짚신에 함축되어 있는 것이다.

이처럼 신발은 오랫동안 신분을 나타내는 수단이 되었으며, 더 나아가 한 민족의 문화적인 배경을 구별해주는 요소가 되기도 하였다. 일례로 우리의 짚신과 일본의 조리를 비교해 보자. 모두 짚을 이용했지만 형태나 만드는 기술, 디자인 측면에서는 현저한 차이가 있다.
일본의 조리는 바닥만을 짠 짚신으로 끈을 달아 발가락 사이에 끼우지 않으면 신을 수 없지만, 한국의 짚신은 바닥은 물론 발을 싸는 덮개와 뒷굽까지도 모두 짚으로 정교하게 짜여 있어 편리하게 신을 수 있다.

더욱이 우리의 신발은 디자인 측면에서도 신발코의 중심점으로 선이 모이는 독특한 특색이 있으며, 이곳에서 힘이 뭉쳐 굳어지는 것이 아니라 뾰족하게 솟은 신발코에서 그 뭉친 힘이 풀어진다. 그러나 짚신만은 신발코의 부분이 텅빈 구멍으로 뚫려 있으며 빈곳을 향해 응집된 선을 이룬다.
이렇듯 동그랗게 솟아 있거나 비어 있는 신발코의 미학은 맺고 푸는 한국의 문화를 여실히 보여준다.

목이 긴 신발인 목화 비단을 두르고 수를 놓은 꽃신 유선형의 신발 형태를 이용한 공중전화 부스
이기윤/ 대전대 산업디자인학과 교수
전통 신발의 유선형의 몸체와 속이 비어 있는 특징적 형태를 현대의 공중전화 부스에 적용하였다.
신발의 세워진 모습을 기본형으로 부스 안에 문양을 곁들였다.


비녀

조선 영조 때 가체에 대한 사치가 심해져 단행된 발제개혁(髮制改革)에 의해 쪽진 머리가 일반화되면서 비녀 또한 다양한 모습으로 발전하였다.

외형상 남근을 상징하며 기혼녀만이 꽂을 수 있는 비녀는 단순히 쪽진 머리가 풀어지지 않도록 꽂는 용구로서 뿐만 아니라 단단히 잠근 비녀의 형태는 부덕과 정절을 지키는 대문의 빗장과도 같았다.
비녀의 재료로는 금, 은, 동, 옥, 백동, 놋쇠, 뿔, 대나무, 박달나무 등이 쓰였고 크기는 10~12cm, 머리는 4각, 몸체는 원봉형(圓棒形)으로 되어 있다.
비녀 머리에 아무런 장식이 없는 것도 있지만 대부분 칠보의 초화문이나 수(壽)자 등의 글자를 새겼다. 서민층에서는 백동, 놋, 나무, 뿔, 뼈로 만든 민잠을, 양반층에서는 옥, 은 등의 비녀를 사용했는데, 이처럼 신분에 따라 비녀의 재료와 형태가 달랐기 때문에 비녀는 여인의 신분을 나타내는 척도가 되기도 하였다.

비녀는 비녀의 머리 모양에 따라 다음과 같이 구분할 수 있다.

봉잠: 비녀 머리에 봉황이 앉아 있는 봉잠은 상당히 화려하며 섬세한 투각기법이 돋보이는데 왕세자비가 주로 꽂았다.

용잠: 비녀 머리를 용으로 장식한 것으로 왕비가 주로 사용했고 사대부집에서도 예장용으로 큰 머리에 용잠을 꽂는 경우가 많았으며, 서민은 혼례에만 꽂을 수 있었다.

매죽잠: 사군자에 속하는 매화와 대나무는 정절을 상징하는데 조선조 여인들은 절개를 최고의 미덕으로 여겼던 까닭에 매죽잠을 즐겨 사용했다.

파란잠: 비녀 머리만 파란(흔히 칠보라고 알고 있는데 칠보는 일본식 명칭)으로 만들고 형태를 쌍봉(雙鳳), 매죽, 파란봉잠 등으로 구분하여 제작했다. 외명부가 궁중 의식을 치를 때, 큰 머리를 하였을 때 꽂았다.
파란은 유리 성질의 물질인데, 쇠로 된 그릇을 꾸미거나 녹을 방지하기 위해 그 표면에 발라 굽는 것으로 산화염, 붕사 및 유리가루로 만들었다.

옥호도잠: 옥으로 만든 호도 모양의 비녀로, 사대부집 안방마님들이 좋아했던 비녀다.

민잠: 백동 또는 은에 파란을 입힌 비녀로 서민들이 사용했다.

흑각죽잠: 무소의 검은 뿔로 된 것을 대나무처럼 깎아 긴 비녀로 만든 것으로 중인 계급의 아녀자가 많이 사용했다.

옥비녀: 젊은 아녀자들이 많이 사용하였으며, 백옥비녀를 꽂은 여인은 장도를 찬 경우가 많아 남자들이 치근거리지 않았다고 한다.

머리를 가지런히 고정시킴은 물론 정절을 지키고자 했던 깊은 뜻이 내포되어 있는 비녀는 그러한 의미를 반영하듯 정교하고 치밀한 기법으로 제작되었으며, 화려한 장식과 우아한 곡선 처리로 아름다운 자태를 보여준다.
또한 기능에 충실한 구조와 형태를 취하면서 간결한 멋과 함께 머리에 꽂았을 때 전체 머리 모양과의 조화도 뛰어나다.

근대화 이후, 여인네들의 머리 모양이 달라지면서 비녀는 찾아보기 어려운 물건이 되고 말았지만, 요즘과 같이 쉽게 사랑하고 쉽게 헤어지는 사랑의 통속적 세태를 보고 있노라면 곱게 쪽진 머리에 비녀를 단정하게 꽂은 옛 여인들의 아름다움과 멋이 다시금 그리워진다.

잠두 모양에 따라 명명된 다양한 비녀들 닭모양 장식 머리꽂이 두발용 장신구인 떨잠 노리개의 떨잠과 매듭 형태를 응용한 스카프
김애숙/ 호남대 산업디자인과 교수
노리개의 아름답고 화려한 모습을 섬유 제품의 문양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전통 매듭의 선을 이용, 전체의 흐름을 잡아주고 노리개 중 ‘옥향갑단작 노리개’와 쪽머리에 꽂는 장식품인 떨잠 뒤꽂이의 화려하고 단아한 모습을 재구성하여 스카프를 디자인하였다.



귀걸이

귀걸이는 장식용뿐만 아니라 부적 등의 주술적 목적이나 신분을 상징하는 방법으로 남녀 모두 사용했다. 삼국시대의 유물을 통해 귀걸이의 다양한 형태와 변화해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삼국 가운데 신라는 뛰어난 금속제작기법을 바탕으로 다양하고 특색있는 조형적 아름다움을 지닌 누금세공(얇은 금판에 금알을 하나하나 새기는 방법)을 이용한 수준 높은 귀걸이가 만들어졌다.
고려시대에도 귀걸이 양식의 격은 떨어졌으나 귓불에 구멍을 뚫어 귀걸이를 다는 풍습이 신분의 귀천에 관계없이 크게 유행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삼작노리개에 다는 것과 같은 비단실을 단 금파(金波) 귀걸이나 파란 귀걸이(귀에 다는 고리에 구슬을 꿴 것)를 주로 달았다.

귀걸이에 대한 우리의 미의식과 그 표현방법은 시대에 따라 변화했으나 단순한 장식물의 성격을 떠나 정교한 세공과 조형성, 색감의 대비 등은 시대를 초월한 아름다움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


목걸이

사회적 신분을 나타내거나 주술적인 목적으로 착용했던 목걸이는 점차 장신구의 성격을 띠며 발전했다.
우리 나라에서는 삼국시대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유리로 만든 구슬에 구멍을 뚫어 연결하고 늘어지는 부분의 끝에 곡옥(曲玉)을 달았으며, 대개 1줄 또는 2~3줄로 되어 있다.
신라 미추왕릉에서 출토된 유리구슬에 인물상을 감입한 상감유리옥부경식과 쌀알 만한 크기의 유리 구슬을 꿰어 만든 황, 청, 흑, 갈색 등 다양한 색채의 유리경식이 있다.

백제 무녕왕릉에서는 마디를 표현하여 장식한 목걸이가 출토되었다. 봉(棒)같이 다듬은 대나무 모양의 마디와 마디를 연결하고, 고리에 고리를 연결한 후 순금제 철사를 여러 번 감은 것으로 칠절(七節), 구절(九節) 등을 형성하였는데, 각 마디마다 활처럼 휘어져 있으며 원형에 가까운 세련된 형식을 취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유교의 영향으로 목걸이 착용이 많지 않았으나 일부 계층에서 옥으로 만든 목걸이를 사용했다. 옛 사람들은 옥을 단순한 자연의 물질로 보지 않고 대지의 정물(靜物)로 간주했으며, 옥을 지니면 무병 장수하여 잡귀를 물리칠 수 있다고 믿었다. 또한 색깔과 무늬가 아름다워 널리 각광받았다.

요즘은 목걸이 사용이 보편화되어 재료와 형태가 매우 다양한 편이지만 신라와 백제의 목걸이를 오늘날의 장신구와 비교해 보아도 손색이 없을 만큼 뛰어나다. 서구 것의 일방적인 모방보다는 우리의 전통적 요소에서 새로움을 찾는 노력이 뒷받침된다면 참신한 디자인의 제품 생산도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삼국시대의 금제 귀걸이 경주 천마총 출토의 옥제품 삼국시대의 상감옥 목걸이와 금제목걸이 곡옥의 모습을 형상화한 호출기와 리모콘
이기윤/ 대전대 산업디자인학과 교수 삼국시대 목걸이에 많이 사용된 곡옥의 형태를 목에 걸고 다니거나 허리에 차고 다니는 호출기에 적용, 젊은 감각의 세련되고 독특한 디자인을 시도해 보았다.


반지와 팔찌

반지(指環)
반지는 오래 전부터 혼인예물이었고 배우자에 대한 신표의 의미를 지니며, 부적이나 건강을 위해 사용되기도 하였다. 반지와 가락지 등의 단어가 마구 섞여서 사용되고 있지만 반지는 하나의 링에 알을 박거나 중앙에 문양을 새긴 것이 많고, 가락지는 보통 쌍으로 된 것이 많다.

반지의 시대별 변화를 살펴보면, 삼국시대에는 남녀구별 없이 반지를 착용했으며 재료는 순금을 많이 사용했으며, 신라시대의 반지는 윗 부분 폭이 조금 넓고 마름모꼴을 한 것이 많다. 고려시대에는 몽고침입 후 부녀자들이 원(元)으로 끌려갈 때 부모와 친척들로부터 반지를 정표로 받아 끼고 갔다고 한다. 이 여인들이 끼고 간 반지가 그곳에서 유행하여 원나라에서는 여인들이 한 손가락에 여러 개의 반지를 끼는 풍습마저 생겨났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금이 명나라에 많이 유출되었기 때문에 금반지는 드물고 은과 옥, 그리고 구리에 금을 도금하거나 파란을 입힌 반지를 많이 착용했다. 그 중 백옥 가락지는 희고 매끄러운데다가 여인의 정절을 상징한다 하여 여인들이 즐겼다.

대개의 반지는 아무런 문양이 없으나 은, 백동 가락지에는 무늬를 새기거나 파란을 올려 멋을 더하였다. 여기에는 대부분 박쥐문양이 음각되어 있는데 복신(福神)의 상징으로 간주되어 반지 외에도 노리개와 향집에 많이 새겨졌다.
또한 은제반지의 형태는 몸체가 나선형인 것, 주문을 돌린 것, 유리알을 박아 장식한 것, 당초문을 양각한 것, 거치 무늬를 돌린 것 등이 있다.

팔찌(腕輪)
최초의 팔찌는 활을 쏠 때 반달 모양의 가죽 도구와 짐승의 털을 제기 모양으로 다지고 꿰매어 왼쪽 팔목에 싸매어 현(弦)이 팔을 때리는 것을 방지하고 현흠(弦欠)을 높이고자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우리 나라에서는 조개, 토제, 석제 등의 팔찌가 신석기시대부터 착용되었으며, 청동기시대에는 옥 팔찌가 사용되었다. 또한 삼국시대에는 재료 및 양식 등에서 다양한 발전을 이루었는데, 특히 백제 무녕왕릉에서 출토된 금, 은 팔찌 등은 제작수법이 매우 뛰어나다. 이곳에서 출토된 은제 팔찌는 고리 표면을 톱니모양으로 이어서 장식했으며 경자년(庚子年)이라는 명문이 새겨있고 팔찌의 바깥에는 용 두 마리를 양각하였는데, 용이 머리를 뒤로 돌리고 있는 모습이 매우 힘차고 사실적으로 묘사되었다.
신라 고분에서 출토된 팔찌는 금판을 만들고 그 좌우에 원형의 영락을 한 개씩 단 천형장식(釧形裝飾), 노랑색, 연녹색, 남색의 유리옥을 일정한 간격으로 섞어서 꿰고 다섯 등분점에 곡옥 한 개씩을 배치한 금제유리곡옥장식천(金製琉璃曲玉裝飾釧), 엷은 금판의 상하를 말아 거기에 남색과 청색의 옥을 끼워 세공한 누금천 등 다양하다.
고려시대의 팔찌로 특이한 것에 동심(銅心)에 목피(木皮)를 감고, 그 위에 빨간 칠(漆)을 입힌 동제주칠천(銅製朱漆釧)이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우리의 전통 팔찌를 정리해보면 완전한 고리 모양을 이룬 것, 양끝을 연결하거나 끝을 완전히 연결하지 않고 임의로 넓혔다 좁혔다 할 수 있는 것 등이 있다. 대부분 왕릉에서 출토된 것으로 그 형태와 문양, 재료 등이 다양하여 당시 세공기술의 우수성과 함께 화려한 미의식을 엿보게 한다.

왼쪽 태극문양이 장식된 보검 가운데 오른쪽 자유로운 곡선이 화려함을 주는 왕비의 관(冠)장식 정교한 누금 세공기법을 보여주는 금제 관모(冠帽) 팔각함과 조명등
서진환/ 서울산업대 금속공예학과 교수
팔찌의 자유로운 곡선을 변형하여 팔각함을 디자인했고, 귀걸이의 기하학적인 선과 주금 세공기법을 응용하여 조명등을 디자인했다.




 

글_김주미(KIDP 객원 편집위원)

김주미 1960년 생.
덕성여대 영문과 졸업(1984). KIDP 홍보출판실(1984∼1994)과 KIDP 편집 전문가로 활동(1994∼1997)하면서 <산업디자인> <포장기술> 등의 간행물과 각종 도록과 포장기술개발 성공사례집 등을 기획, 편집, 제작했다.
산업자원부(KIDP)에서 주관한 산업디자인기반기술개발사업의 하나인 ‘전통 문화와 산업디자인 접목에 관한 연구’ 편집위원으로 참여했다(1998). 현재 동국대학교 미술사학과 석사과정에 다니면서 디자인의 원형탐구에 관심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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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디자인 1999년 09 10월호 (166호) 첫페이지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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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지/웹진 '산업디자인'은
한국디자인포장센터에서 발간하던 격월간 잡지로 1970년 11월 '디자인·포장' 창간호가 1983년 2월까지 발행되고, 1983년 4월(no.67)부터 '산업디자인'으로 명칭변경되어 발간되었습니다.
이후 2001년 1/2월호(no.174)를 마지막으로 산업디자인지는 폐간되었으며, 2001년 7/8월(vol.175)부터 현재까지 designdb라는 이름으로 발행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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