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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2월에 열린 제2회 산업디자인 진흥대회의 슬로건은 ‘21세기 기업경영의 핵심은 디자인 경영’이었다. 실제 기업경영의 핵심이 디자인일까? 이러한 의구심을 갖고 있는 독자들에게 먼저 한마디를 하고자 한다.
기업의 경쟁력은 그 기업이 생산해 내는 제품이나 서비스에 의해 표출됨은 주지의 사실이다. 제품이나 서비스의 경쟁력은 어디에서 출발하는가. 과거에는 가격이었다.
오늘날에는 품질이다. 그리고 미래에는 디자인이다.
미래의 상품경쟁력은 기획력, 기술력, 그리고 디자인력의 곱(乘)으로 결정된다. 한 요소라도 빠지면 곤란하다.
우리에게 특히 취약한 분야인 디자인 같은 소프트한 창의력을 기업의 소중한 자산이자 21세기 기업 경영의 최후 승부수로 가꾸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엔터테인먼트 PC의 탄생
디자인을 기업 경영에 이용한 대표적인 사례로 소니(Sony)의 바이오(VAIO) 컴퓨터를 들 수 있다.
워크맨으로 잘 알려진 소니지만, 그들의 컴퓨터에 대한 관심은 1967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소니는 전자 계산기와 함께 컴퓨터를 생산, 판매했으나 격심한 가격경쟁에서 패해 시장에서 철수한 경험이 있다.
그리고 1983년에도 게임시장을 겨냥한 MSX 규격 컴퓨터를 판매했으나 역시 실패하고 말았다. 워드프로세서 판매에서도 참담한 고배를 마셨다.
워크스테이션만이 고군분투하는 상황이었다. 이처럼 소니의 가정용 PC사업의 역사는 실패의 연속이었다.
1989년의 ‘SMC시리즈’와 91년의 ‘MSX시리즈’ 등 가정용 PC를 잇따라 철수했다. 그렇지만 소니에게는 항상 PC에 대한 의문이 있었다.
“왜 저렇게 재미없게 만드는 것인가? 지금의 PC는 재미가 없다. PC 선진국인 미국도 집에서는 세무계산이나 업무상으로 사용할 뿐이어서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제품이 아니다. 소니가 만든 것이라면 갖고 있는 것만으로도 즐겁고 사용해서 즐거운 PC라야 한다. 보통의 PC로는 안된다.”
비록 PC 개발에 실패했지만 항상 갖고 있는 생각이었다.
소니는 시장동향을 계속 파악했다. 그리고 때가 왔음을 발견하였다. PC시장에서도 엔터테인먼트를 추구하는 트렌드가 등장한 것이다.
트렌드를 예측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소비자의 변화를 연구하는 기능이 있어야 하고, 그 기능은 R&D 부서 및 상품개발 부서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
소니는 가상조직인 ‘바이오 센터’를 만들어 전사적인 힘을 결집하였다. 외부의 환경변화와도 끊임없이 교신하였다.
그 결과 소비자의 니즈 변화를 정확히 읽은 상품개발에 성공한 것이다.
기존의 PC가 사무용이었다면 소니의 PC는 복합 엔터테인먼트용이다.
기존 PC가 비즈니스맨을 핵심 고객으로 삼는 반면 소니는 학생층과 멀티미디어 엔터테이너를 핵심 고객으로 선정하였다. 고객에게 제공하는 가치도 달랐다. 일반 PC는 ‘기능성 위주’였다. CPU의 처리속도, 메모리 용량을 중시하였음은 물론이다.
반면 소니는 ‘AV감각’을 중시하여 영상편집, 소프트에 충실, 실감나는 음향, 휴대성을 추구했다. 제품의 컨셉이 결정되는 것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브랜드. 브랜드는 ‘바이오’로 결정하였다.
바이오는 컴퓨터, 가전 제품, 통신기기의 융합이란 현 시대에 걸맞는 컴퓨터를 표방하고 있다. TV튜너를 내장한 MPEG 리얼타임 레코더, 스테레오 스피커, 우퍼가 내장된 트리니트론 디스플레이를 표준 장비로 채택했다.
컴퓨터인지 가전 제품인지 헷갈릴 정도로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는 컴퓨터’.
이것이 소니가 목표로 하는 것이다. 바이오란 명칭은 아날로그의 사인커브(波形)와 디지털의 0,1을 합친 이미지 디자인에서 유래한 것으로 AV와 IT의 융합을 상징하기도 한다. 가정에서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고 앞으로 이 개념에 맞는 주변기기에는 모두 VAIO란 마크를 붙일 방침이다.
기획력 + 기술력 + 디자인력
바이오의 개발도 처음부터 순조로웠던 것은 아니다.
96년 5월부터 8월에 걸쳐 최초의 시작판(試作版)으로 생각했던 모델은 결국 대량생산이 취소됐다. 금형을 만드는 단계까지 진행되지 않았던 것이 불행 중 다행이었을 정도였다.
이 단계에서는 팀장과 컴퓨터를 담당했던 3명의 기술자만이 실제 개발에 참가하고 있었다.
그런 만큼 ‘PC는 우선 기능’이란 발상을 버릴 수 없었고 4명이 제안한 시작(試作)모델은 A4사이즈였다. 디자인보다 성능을 중요시한 ‘보통 PC’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했다. “이제는 물러설 데도 없다.
B5사이즈에서 얇고 가볍게, 과감하게 소니다움을 표방하자.” 96년 연말쯤에 기술진은 드디어 기본설계를 크게 전환하여 오늘날 바이오의 원형을 고안하게 됐다.
<나머지는 소니다움을 어떻게 제품에 구체화시키느냐는 문제만 남았다.
원래대로라면 기술진이 가장 고민해야 하는 이 문제를 해결한 사람이 97년 1월이 돼서야 개발에 참가한 디자이너인 고토(後藤禎祐)주사(主査)였다.
고토 주사는 “바이오를 내가 만들었다”고 자부하는 사람이다. 그는 소니의 게임기인 ‘플레이스테이션’의 디자인을 단독으로 행할 정도로 디자인에 관한 한 소니 내에서 독보적인 존재이다.
그는 “중앙연산처리장치의 속도나 메모리의 용량 등은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잘라 말한다.
“고객도 아니고 기술자도 아닌 입장에서 생각했다. 내가 들고 다녀도 멋있는 PC를 만들고 싶었다. 색깔도 디자인도 로고도 모두 그런 기준으로 결정했다.”고 한다.
선명한 보라색 외관에 마그네슘합금의 본체, 바깥 쪽에는 커다랗게 ‘VAIO’라는 로고를 넣고, 워크맨 등 휴대용 단말에 흔히 사용되는 미끈한 타원형의 스위치가 달려 있다.
B5 사이즈로 두께 23.9mm, 무게 1.35kg, 20만 엔대라는 매력적인 가격대도 괜찮지만 히트의 최대 이유는 PC의 상식을 뒤엎은 디자인에 있었다.
바이오가 얇게 만들어진 가장 큰 이유는 충전지의 위치에 대해 신경을 썼기 때문이다. 다른 PC와 같이 본체에 끼우는 것이 아니라 액정과 키보드를 연결하는 축 부분인 본체를 벗어난 바깥쪽에 배치했다. 본체의 폭과 똑같은 22mm를 충전지의 폭으로 한 것도 특징적이다.
97년 겨울 시장에 출시되면서 순식간에 히트상품 반열에 올라섰다.
컴퓨터 시장에서는 한 개의 기종으로 5%의 시장점유율을 달성하면 ‘폭발적인 히트상품’으로 간주한다. 그런데 바이오는 무려 7%를 장악했던 것이다.
제품의 성공에 대해 주변에서 하는 이야기도 공통점이 있다. 샤프(Sharp) 사는 “디자인 부분에서 타사에는 없는 특징을 내세우고 있다. 과연 소니다운 PC를 만들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평가한다.
일본 IBM은 “미국 IBM이 같은 디자인을 채택했다고 해도 그것이 IBM답지 않으면 팔리지 않는다, 역시 소니다움이 보인다”고 격찬했다. 결국 소니가 갖고 있는 브랜드 이미지를 충분히 활용했기 때문에 히트한 것이다.
소니의 이미지는 무엇인가. 바로 ‘소형화, 경량화’가 아닌가. 회사의 이미지를 제품의 이미지에 연결시켜 성공한 대표적인 예인 것이다.
디자인은 단순히 외관이 아름다운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트렌드를 읽을 수 있는 상품기획력, 고객이 쉽게 기억하고 수긍할 수 있는 브랜드력, 그리고 이를 시장에 접목시킬 수 있는 마케팅력이 기반을 이루어야 한다.
그러한 점에서 소니의 바이오 개발사례는 3박자를 모두 갖춘 상품이라고 할 수 있겠다. 21세기 기업경영의 핵심은 디자인 경영이다.
우리 기업이 갖고 있는 브랜드는 어떠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 그리고 현재의 시장동향과 이를 어떻게 접목시킬지를 끊임없이 고민한다면, 디자인 경영에 한 발 더 다가선 셈이다.
글_신현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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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현암
1963년생
서울대와 동대학원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삼성경제연구소에 입사.
제일제당 파견근무 후 현재 삼성경제연구소 경영전략실 수석연구원 및 연세대학교 IS School 겸임교수로 있다.
MBC TV "실업의 고통을 함께 나눕시다(1998)" , i-TV "밀레니엄 보고서" 등의 진행을 맡기도 하였다.
브랜드와 트렌드, 인터넷 관련 강연과 기고활동도 활발히 하고 있다.
저서로는 <브랜드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공저) 외 다수가 있다.
한경닷컴(hankyung.com) e-biz 전문가집단 멤버, 무한창투 산하 컨설팅 기관인 '우뇌집단' 의 자문위원도 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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